대한정통사(81)-매국노들과 민족주의자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7/25 [11:59]

대한정통사(81)-매국노들과 민족주의자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7/25 [11:59]

 

  일제가 온갖 사기적 수단을 다 동원하면서 억지로 강제 체결한 정미늑약 제5조에는 ‘대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는 엉터리 같은 조항도 있었다. 간악한 일제는 조항 같지도 않은 조항을 근거로 일제의 침략첨병들을 대한국의 각 부 차관(次官)에 멋대로 임명하였으니, 저들은 형식적으로는 대한국의 정부 관리이면서도 실제로는 대한국을 병탄하려는 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저들은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대한국정부로부터 고액의 봉급까지 받으면서도 바로 그 대한국을 침략하고자 준비공작을 하는,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수한 기능을 맡은 ‘합법적 관리’였던 것이다.


  저들은 4240년(서1907) 10월 26일에 열린 소위 제22회 ‘대한국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 대한국 측 대신들과 함께 참석하기 시작했으니, 저들의 직위는 차관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한국의 대신들보다도 강력한 실권을 쥐고서 각 부의 행정은 물론 인사권까지도 불법적으로 장악해 버렸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 부의 국장급에도 일인이 한두 명씩 임명되었고, 중하급 관리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유학생 출신자들이 많이 채용되면서 대한국 정부의 일제화(日帝化)가 급속히 진전되어 갔다. 더 나아가서 일제는 대한국의 경찰과 사법부와 감옥사무 등을 자기들이 장악할 수 있도록 일인들을 대거 임명하였으며, 따라서 남은 것은 노골적으로 병합해 버리는 일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등이 통감을 사퇴한 직후인 4242년(서1909) 7월 6일에는, 그때까지 이등이 추진하던 ‘점진적 병탄’ 방침마저 ‘즉각적인 병탄 방침’으로 바꿔 버린 일제정부가, 대한국을 병탄하는 데 대한 안건을 내각회의에 걸어서 본격적인 합병을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기본정책인 ‘대방침’과 ‘대한시설대강’이라는 강도적 대한(對韓)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대한국 병탄을 기정사실로 가정하고 대한국내정의 각 분야를 직접 장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노골적으로 직접적인 병탄을 감행할 때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것은 물론이고, 대한국인들의 거족적인 필사적 저항에 부딪칠 것은 명약관화한 노릇이었으므로, 일제는 병탄 방법에 있어서 철저한 국제사기극을 연출했다. 즉, 저들은 어디까지나 ‘대한국 측의 청원에 의해서’ ‘할 수 없이’ 합방에 동의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음모를 진행시켰다. 따라서 저들은 일단 확정된 병합 방침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로 한 채, 일진회의 고문인 삼산(杉山:스기야마)이 병합 문제에 대해서 다그치는 데 대해서 외무대신인 소촌은,


 “국제적인 눈이 있어서 자칫하면 일본이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여자가 살러 오겠다고 결혼신청을 하면 모를까, 안 그러면 병합은 안 되는 걸쎄!”
하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럼 조선이 결혼신청을 하면 승낙하시겠소?”
 “물론이지!”


  삼산은 계(가쓰라) 수상에게도 가서 병합문제를 제기했으나, 교활한 계는 강제 병탄에 따르는 일체의 책임을 삼산에게 떠넘겨 버리려는 속셈으로 한 술 더 떠,


 “얼빠진 소리 말라구! 대만의 생번(生蕃)들도 제 번사(蕃社:영주의 종묘사직)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네. 그들보다 지식이 발달된 조선인이 ‘내 나라를 먹어 주시오’ 하고 신청해 올 턱이 없어. 당신이 말하는 결혼신청서란 건 불가능이야!”
하고 능청을 떨었다.


 “그 불가능이 가능해지면 병합하겠소?”
 “그렇게만 된다면 상책인데…하지만 그건 불가능이야! 황당무계한 얘기지!”


이로써 병합의 사전 공작에 대한 일체 권한을 위임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삼산의 암약에 의하여 ‘병합 청원’이라는 정치 연극이 구상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국제적 명분을 얻으려는 수작으로써 이용구․송병준․내전(內田:우찌다) 등의 협의 하에 진행되었다.


  송병준과 내전이 소위 ‘합방건의서’를 쓰고, 내전과 천기(川岐:가와자끼)와 갈생(葛生) 등이 세 가지 종류의 소위 ‘병합청원서’의 초안을 잡았으며, 일진회의 고문인 무전(武田:다께다)이 그것을 넘겨받아서 완전 한문체로 개작․수정했다. 그리하여 그 문서는 마침내 4242년(서1909) 12월 1일에 서울에 있는 청화정(淸華亭)에서 이용구에게 교부되었고, 일진회의 총무인 최영년 등이 검토한 후에 그의 아들인 최정식의 달필로 3통의 소위 ‘병합청원서’가 완성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소촌이 말했던 ‘결혼신청서’로서 그 한 구절을 보면,


 “…우리 대일본천황께옵서 지극하신 인덕(仁德)과 하늘같은 넓으심으로…일한합방을 창설하시고, 우리 군신을 만세에 어여삐 여기시와, 황실과 신민이 길이 신성무궁한 은혜를 입도록 하여 주심을 황송이 머리 숙여 감히 소원하나이다…”
라고 하는 등 파렴치한 매국적 문구로 시종일관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재명 의사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은 매국노 이완용이 총리직을 사퇴하고 박제순이 총리대신으로 임명되는 등 정국이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친일매국노집단인 일진회의 송병준과 이용구 등은 이완용이 습격당한 다음 날인 12월 3일에 소위 ‘한일합병에 관한 상주문’을 융희황제께 올리는 한편, 청원서를 만들어서 통감 증미(曾彌:소야)와 박제순에게 제출하고, 성명서를 만들어 신문지상에 공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대한협회․국민대회․흥사단 등이 크게 궐기해서 일진회 매국도당을 타도하기 위하여 일제수상 계(桂:가쓰라)에게 반박성명서를 발송하고, 송병준과 이용구를 극형에 처하라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하는 등 줄기차게 일진회타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한국을 병탄할 야욕을 굳힌 일제는 4243년(서1910) 5월 30일에 일제육군대신인 육군대장 사내(寺內:데라우찌)를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악랄한 왜구들 중에서도 매파로 이름난 사내를 대한국의 통감으로 임명한 저의는 불을 보듯 뻔했으니, 대한국에 부임한 사내는 6월 중에 박제순과 각서를 교환하는 수법으로 경찰권 등 그나마 약간 남아 있던 대한국의 통치권까지 송두리째 빼앗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800여 명이었던 왜헌병을 일시에 2,000명으로 증가시켜서 전국에 헌병대 분대 1,562개소를 설치하였고, 헌병대장 명석(明石:아카이시)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악질적인 헌병보조원제도를 채용하였다. 그리하여 대한국인들 중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교활한 부랑자들과 천박한 반민족적 인간들을 골라서 왜헌병 1명 밑에 보조원 3명 정도를 배치하되, 그들의 사기․강간․강도행위 등을 눈감아 주는 대신 항일투쟁하는 지사들의 비밀을 캐고, 동향을 염탐하고, 지식인들과 유지 등의 일체 언동을 정탐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내는 대한국인들이 신문조차 못 보게 만들어 대한국인들을 암흑 속에 빠뜨려 버렸다. 그리고 그 동안 상처가 완쾌된 이완용은 7월 29일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기용되어 다시 대한국의 마지막 숨통을 졸라매는 매국작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내의 그러한 악랄한 책동과 매국노들의 준동에 반발한 대한국인들은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 치열한 의병활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니, 4242년(서1909) 8월 23일 상해에서 간행된 한 신문에 의하면,


 “대한국은 실로 흥미 있는 나라이다. 일본인은 대한국에서 경제적 승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병력을 증가하거나 관리들을 주입하지 않으면 실업계가 일종의 마비증에 걸린다.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여러 사업들이 정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라고 일제의 대한국에 대한 침략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릴 정도로 일제는 국제여론의 빗발치듯한 비난 속에 곤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영국기자 맥켄지 등의 활동을 통해서 대한국인들의 치열한 의병활동과 일제의 만행 같은 것은 이미 국제사회에 잘 알려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열강도 공식적으로는 일제의 탐학(貪虐)을 제지하거나 비난하고 나서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는 국제도의나 인류양심 같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제 멋대로 계속 대한국을 요리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4243년(1910) 1월 논설에 의하면, 합방설이 분분해짐에 따라서 애국인사들은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면서 그 부당성을 반박하기도 함.

 

彼明淸等不過 是政府壓迫하여 金幣千兩이나 하고 人蔘幾百斤이나 하여 名義上으로 徵貢國하는 同時又 韓政府納送하는 物品徵收하는 物品보다 하고 且人民權利하지 못하였으며 人民産業하지 못하였으니 然則 彼一時 韓國羈絆(굴레)함은 虛名뿐이라 韓人其痛冥然不覺하였거니와 에는 하면 하니 韓人日本擧動明淸같이 하지 아니하며

 

* 羈絆=굴레

, 청과의 관계는 명목상으로는 조공국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우리 한인들이 경제적 이득을 보아 왔고, 인민의 권리와 산업에 대해서는 감히 간섭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거동은 그와 달라서 나라와 인민이 함께 멸망당할 것임을 경고함.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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