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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강소성에서 당태종 응징한 연개소문(1)

진위여부를 떠나 왜 이러한 전설이 존재하는지 학자들의 연구를 기대

플러스코리아 | 기사입력 2009/11/05 [00:26]

[특집]강소성에서 당태종 응징한 연개소문(1)

진위여부를 떠나 왜 이러한 전설이 존재하는지 학자들의 연구를 기대

플러스코리아 | 입력 : 2009/11/05 [00:26]

 
본지는 한문수 역사전문위원의 설인귀 관련 기사중 대륙에 보이는 연개소문의 흔적에 대해서 '우리역사교육원의 도움을 받아 자세히 추적해 보기로 하였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기사로 중국 강소성 염성 건호현에 있는 “몽롱탑(朦朧塔)의 전설”을 소개한다. 몽롱탑은 KBS역사스페셜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관련사이트는 현재 접속이 불가하다.

* 사이트 주소 : http://www.jh.js.cn/sxts/sxfc1.htm
* 소재지 : 강소성 염성(鹽城) 건호(建湖)현
* 탑이름 : 몽롱탑(朦朧塔)
 - 3층, 높이 16.7미터, 8각형 누각형식
 

▲ 중국 강소성 염성 건호현에 있는 몽롱탑 전경     ©플러스코리아


몽롱탑(朦朧塔)의 전설

당태종 이세민이 군대를 거느리고 동정(東征)을 할 때에 ‘염성’ 일대에 병사를 주둔하였다. 어느 달빛이 몽롱한(희미한) 늦은 밤, 이세민은 단기필마로 병영을 순찰하다가 적 진영을 염탐하기 위해 적 진영에 다가갈 즈음 조심을 안해 진흙탕뻘에 다달았다.
 
마침 적 진영을 순찰 중이던 연개소문 장군에게 발각이 되자 연개소문 장군은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쫓아왔다. 이세민은 황급히 말을 재촉하여 달아나는데 말이 길을 잘 못드는 바람에 그만 진흙탕뻘에 빠지게 되었다.
 
이세민은 말에서 뛰어 내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다가 문득 한 개의 마른 우물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우물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연개소문이 추격을 하다가 우물이 있는 곳에 도착을 하였을 때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물을 보니 우물 안에는 가지런한 거미줄이 걸려 있어 사람이 그 안에 있을 거라고는 헤아리지 않았다. 다시 말을 돌려 군영으로 돌아갔다.
 
후에 이세민이 왕이 되었을 때 거미줄이 목숨을 살려준 은공을 잊지 못해 감격하여 우물이 있던 곳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 어둡고 어려움(蒙)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줘 목슴을 건진데서 "몽롱(朦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이리하여 이 탑이 "몽롱보탑(朦朧寶塔)" 이라 불려졌다.
 
더불어 탑을 세운 후 비교적 큰 정혜사(淨慧寺)라는 절을 세웠다.현재 이 탑의 동북방에는 세니하(洗泥河)가 있는데 당태종이 말과 함께 진흙탕뻘에 빠지고 위험을 벗어난 후 말을 씻었던 곳에서 유래한다.
 

▲ 중국 강소성 염성 건호현 위치     ©플러스코리아

이상 연개소문이 중국 강소성까지 진출하여 당태종과 전쟁을 하였다는 “몽롱탑의 전설”을 소개하였다. 진위여부를 떠나 왜 이러한 전설이 존재하는지 학자들의 연구를 기대해본다. 왜냐하면 정사에는 없는 연개소문의 전쟁기록이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산동성 유역까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역사의 진실 09/11/05 [11:23] 수정 삭제  
  아시아를 호령하고 당나라 이세민의 항복을 받아낸 민족의 대영웅 연개소문을 그렇게 악랄하게 혹평한 인물은 묘청의 북벌론을 무마시킨 소중화사대주의이자 신라사관론자인 김부식이다.그러나 민족사의 진실을 담고 있는 [한단고기]에는 연개소문의 진정한 참 모습을 잘 기록하고 있다.

900년의 고구려=단군조선을 계승한 진정한 천자국/당나라=단군조선의 제후국 선비족의 나라
 
[한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연개소문의 참 모습과 항복한 당나라 이세민

민족.민중과 함께한 대인 연개소문의 참 모습

'조대기'에 가로되,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대국적인 연개소문과 소인 김춘추의 참 모습
연개소문은 마침내 고성제를 내어 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로 삼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리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든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김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고구려의 필사즉생 항전과 당나라 이세민의 항복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인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려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드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볍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적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만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이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하북성.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왕개보가 말하기를 "연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다. 과연 그같은 막리지 있으니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존재하더니, 막리지가 없으므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망했다. 막리지는 역시 인걸이로다". 막리지는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너희들 형제는 서로 사랑하기를 물처럼 하렷다. 화살은 합치면 강하고 이를 나누면 곧 부러진다. 반드시 이제 이 죽으려는 사람의 말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할지니라"고 하였다. 때는 곧 개화 16년 10월 7일이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긋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술르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춰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 빛으로 흘러라 바람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이상은 『한단고기』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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