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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당태종 항복받고 영토확장했나?

천하의 중심을 내세운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윤복현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09/11/08 [00:02]

연개소문,당태종 항복받고 영토확장했나?

천하의 중심을 내세운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윤복현 역사칼럼 | 입력 : 2009/11/08 [00:02]
▲ SBS사극'연개소문'에서 연개소문과 이세민. 당나라 사서[신당서]에 기록된 "연개소문은  6개의 칼을 찾다고 하며, 얼굴에 수염이 많고, 금 은 등의 치장을 화려하게 했으며, 도교에 심취한 인물이다"라고 했다.  도교는 당나라 표현이고, 고고리(고구려) 조의선인의 우두머리 연개소문에게 있어서는 전통적인 고구려 선도(수행과 명상과 무예수련)를 의미한다.

명나라 장편 희곡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는 연개소문은 당태종을 ‘소진왕’으로 낮춰 부른 뒤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 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내 앞에 투항한다면 내 친히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네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당나라를 방목장으로 만들어버리겠다.” 라고 호령한다.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쫓는 장면은 이 희곡의 절정을 이루는 백미인데, 당태종이 진흙구덩이에 빠져 곤궁에 처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흙을 잡아 향으로 삼아 기도드리니 용의 신이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주소서!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내 당의 강산 절반을 주겠다.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너를 황제를 시켜주고 내가 신하가 되겠노라.”

여기에 나타난 당태종은 ‘천자’의 이미지는 간데없고 무능하고 겁에 질린 황제의 모습이다.
 
민족사를 왜곡하는 자들은 김부식같은 사대주의 사관론자들
 
▲ [그림자료]김부식 영정
진실을 가리우는 일은 역사의 냉엄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중대한 범죄행위다. 특히 역사의 진실을 가리우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민족사의 국통맥에 있어 '고고리(고구려 혹은 고려)'는 '단군조선(부여)'을 계승한 900년 정통 천자국으로써 아시아를 호령하고,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격퇴하고 당나라 수도 장안까서 쳐 들어가서 이세민의 항복을 받아낸 민족의 대영웅 연개소문에 대하여.
 
당시 고구려의 내부사정(고구려 영류왕 고건무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참패하여 죽은 무수한 수나라병사들의 무덤비를 부수기를 요구하자 부수고, 당나라의 도교를 수용하여 고구려의 자주적인 민족혼을 무력화시키면서 당나라에게 끌려 가는 사대외교노선을 지향하자 이에 연개소문이 항의하고 취소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과,
 
국제관계(지나지역과 북방초원세력을 완전히 제압,통일한 당나라는 당나라에게 머리숙이지 않으면서 천하의 중심을 내세우는 오직 하나 고구려를 굴복시켜야 하는 국가적 과제가 있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연개소문은 준비해야 했다.연개소문에게 영류왕 고건무의 사대노선은 결국 당나라에게 굴복당하는 행위였고 고구려정신의 죽음과 고구려자멸로 본 것이다)의 인식없이 현상적 관점으로『삼국사기』에서 ‘임금을 시해하여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하고 포악한 역적’으로 규정하며 악랄하게 혹평한 인물은 평양천도을 통한 북진노선을 앞세우고 쿠테타를 일으킨 묘청의 난을 진압시키고 철저히 신라중심사관으로 [삼국사기]를 기록한 소중화 대주의이자 신라사관론자인 김부식이다. 고로 지나국의 사서들을 많이 인용하여 편집한 [삼국사기]또한 신라사에 치중된 편향된 사서이고, 기록내용에 있어 100% 객관적 신뢰성을 갖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연개소문에 대하여 ‘임금을 시해하여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하고 포악한 역적’으로 규정
 
그러나 민족사의 큰 맥을 잡아주는 차원에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기법으로 진실을 담고 있는 [한단고기]에는 연개소문의 진정한 참 모습을 잘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한단고기]가 수록한 고서들을 수집하라고 전국 관찰사들에게 명을 내린 세조의 기록내용이 명확히 위서가 아님을 명확히 증명해 주고 있는 [한단고기]를 일제 반도사관론자들과 지나국의 동북공정론자들이 위서로 취급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진실이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민족사의 진실을 규명하여 거짓을 부수고 자랑스런 조상들의 고대사를 복원시켜 미래의 영광으로 재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왜곡행위를 차단함과 동시에 일제.서양제국주의와 같이 무단침략하고 남의 소유물을 독점하는 제국주의 또한 자주적으로 막아내야 할 우리민족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정말로 당나라 이세민 쫓아서 중원 깊숙히 공격해 들어간 흔적있나?

민족사를 통해서 민족혼을 살리고 일제로 부터 나라를 찾고자 했던 민족사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연개소문이 지나()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북경 조양문(朝陽門)외 7리지(里地)의 황량대(詤糧臺)로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10여 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山東) · 직예(直隸:하북성)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高麗)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 쯤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懸) 서북쪽 12리쯤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위 글 중 '지나(支那:곁가지)'와 관련하여  부연설명하자면 지금의 지나국은 본래 현 인류문명의 중심지를 의미하는 천하의 중심으로 천상의 나라 중국에 해당하는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곁가지 나라에 불과하다는 의미다.황하강 상류에서 살다가 동진한 화하족의 나라가 주나라다.주나라는 자신의 거주지를 천하의 중심으로 삼았고 나머지 지역은 오랑캐지역으로 보았다. 동이.서이.북이.남만 하는 용어들은 바로 황하강 상류에 거주한 화하족의 나라 주나라를 중심으로 구분한 기준이다. 주나라가 아니면 주나라를 둘러싼 사방의 모든 고대 한국인들을 오랑캐취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지역 깊숙이 들어갔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북경시 순의현의 고려영(高麗營) 유적이다. 신채호는 고려영은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성으로 보았다.

▲ 당나라 수도 서안(Xi'an)의 위치 - 당시 고구려 연개소문 군대는 장안(서안)의 동.북쪽지역(전통적인 동이족 지역)인 하북.산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지나전역에 퍼져 있는 연개소문관련 전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한 전설은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항복하고 산서.하북.양자강지역을 고구려에 주었다는[한단고기]기록내용이 사실임이 입증된다.
[한단고기]에서는 안시성에서 패배하여 퇴각한 이세민을 추격하는 고구려 연개소문군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이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이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하여 보볍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이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 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적들을 추격했다. 추격군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고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고구려 군대)을 나누어서 1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1군을 이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1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이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양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양자강지역)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즉, 고구려1군은 싸울 기력을 완전히 상실한 당나라 이세민 군대을 목을 조이듯 추격하게 하고, 1군은 요동성(창려:한단고기는 요동성을 창려하고 기록하고 있다)을 방어하게 하고, 1군은 상곡(탁록)을 지키게 함으로써 패퇴한 이세민을 공격과 방어로 궁지에 몰아 넣고 결국 당나라 수도 장안(서안)에 입성하여 이세민의 항복을 받고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는 연개소문의 용맹과 지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 [지도설명]고구려 모본왕 2년(49년) 한나라 공격루트는  어양, 상곡(탁록), 북평, 태원이다.  사마천의 사기본기 원문상 탁록在 상곡) -"탁록에 상곡이 있다." 그 유명한 치우천자와 신시배달국 제후 소전의 아들 황제헌원과의 '탁록전투'로 유명한 그 탁록에 상곡이 속하여 있었다. 당시 만주초원에서 길러진 고구려 말들은 하루에 1천리를 간다하여 명마로  알아 주었으며 주변 국가들이 비싼 가격으로 사 갈 정도였다. 만주에서 몽골까지 말로 달리면 1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따라서 하루에 1천리를 간다는 고구려 기마군대가 이세민을 추격하는데 이동과 공격은 거리가 제한이 될 수는 없었으며, 고구려가 북방초원지역을 포함하여 만주.몽골, 지나지역과 한반도지역까지 폭넓게 지배권을 형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였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 이세민이 안시성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하자, 추격한 고구려의 연개소문 군대는 북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 만리장성은 그리 대단한 장벽이 아니었다. 5호 16국시대, 남북조 시대에 흉노.선비족 등 북방 유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지나지역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만리장성같이 일직선상에 쌓은 성은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적군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성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기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었을 것이다.

북경 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북경 동북쪽의 황량대에서 ‘고려포보(高麗鋪堡)라 새긴 비석을 발견하였다. 이는 연개소문의 중원지역 공략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 정복을 운운하던 당 태종이 이런 쇼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적어도 1일권 안에 있었음을 반증한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군이 활동하던 것은 북경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리고 산동성과 강소성에는 연개소문에 관련된 전설이 무려 6가지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① 산동성 봉래시의 전설: 봉래 인근에서 당 태종과 연개소문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 때 당태종의 형이 전사했다.

② 산동성 즉묵시의 전설: 당 태종이 산동성 즉묵 마산에서 연개소문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힐 뻔 할 때 신라출신 용양장군 김걸이 당 태종을 구하고 자신은 연개소문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③ 강소성 비주의 전설: 고구려군과 당의 설인귀군 간의 격전이 있었다.

④ 강소성 숙천의 전설: 연개소문이 당의 설인귀군과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

⑤ 강소성 염성: 염성 건호현에는 몽롱탑(蒙朧塔)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거미줄이 쳐진 빈 우물에 숨어 살아났는데 나중에 이 은공을 잊지 못해 그 우물이 있는 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어둡고 어려움(朦)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 줘 목숨을 건진대서 몽롱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명나라 장편희곡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는 연개소문은 당태종을 ‘소진왕’으로 낮춰 부른 뒤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 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내 앞에 투항한다면 내 친히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네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당나라를 방목장으로 만들어버리겠다” 라고 호령한다.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쫓는 장면은 이 희곡의 절정을 이루는 백미인데, 당태종이 진흙구덩이에 빠져 곤궁에 처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흙을 잡아 향으로 삼아 기도드리니 용의 신이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주소서!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내 당의 강산 절반을 주겠다.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너를 황제를 시켜주고 내가 신하가 되겠노라.”

여기에 나타난 당태종은 ‘천자’의 이미지는 간데없고 무능하고 겁에 질린 황제의 모습이다. 이는 민간문학을 통하여 통치계급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⑥ 강소성 '금호'는 고려성이 있는 지역이다.

위의 전설들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수군으로 중원의 산동.강소성 일대를 대대적으로 침략을 했으며 이에 당태종은 친히 정벌코자 나섰지만 도리어 연개소문에 전략에 휘말려 당태종 자신이 죽을 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위 전설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전설이나 설화란 역사적 사실를 바탕으로 한다. 설화 속 연개소문은 위대한 인물로서의 이미지가 그 기조를 이루며, 결코 혐오스럽거나 추악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당태종에 감히 반기를 든 역적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또한 두려움 없는 용맹성이 그려지면서 이는 태종의 초라하고 무능한 모습과 대조된다. 민중의 압박자에 대한 풍자와 함께 용감한 반항자에 대한 동정과 경외심을 반영한다.

지나지역에 한 인물에 대한 전설이 그것도 6가지나 내려오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할까? 현 학계에서는 이런 사실을 얼토망토 않은 사실이며 또한 기록에전하는 바가 전혀 없다 하여 엉뚱한 주장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설로만 치부하기에는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너무 많다. 위의 전설 말고 어니하, 독목관, 분하만 등 연개소문에 관련된 전설은 중국 각지에 퍼져있다.
 
즉, 당나라 이세민를 추격한 연개소문은 배달국 치우천황이 지나지역의 우두머리 황제헌원군대와 지나전역에서 전쟁을 하여 탁록전쟁에서 종지부를 찍은 것 처럼 지나전역에서 이세민 추격전을 벌이고, 이세민은 방어전을 벌인 셈이 증명된다.

지나국은 소위 춘추필법이라고, 자국의 불리한 역사는 기술하지 않았다. 일례로 고구려와 후한의 대전쟁인 좌원대전 역시 기록하지 않은 그들이 과연 그들이 우러러보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겼다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을까? 당나라 사가들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 전쟁을 목격한 민간인들은 역사의 진실을 입을 통해 후대까지 전승시켜 전설과 설화가 된 것이라 해야 정확히 맞다. 마치 사마천 등 지나사가들은 황제헌원과 치우천황과의 전쟁에서 황제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 잡아 죽인 것 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한단고기]에서는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을 사로 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단고기]내용이 맞다는 증거는 진시황이나 한나라 유방이 전쟁에 나설 때 반드시 전쟁신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갔다는 사실이다.
 
치우가 패배했다면 어떻게 진시황과 한나라 유방의 전쟁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치우천황은 전설이 되어 도깨비가 되고 무서운 치우가면얼굴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진실은 아무리 가리우려도 해도 짝이 맞지 않으면 거짓으로 들통나고 마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고구려 수군을 통한 중원 정벌시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흔히 고구려하면 '개마무사'라는 막강한 기마군대를 떠 올릴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고구려에게 완전히 패퇴한 당나라 이세민군대를 추격한 민첩한 기마군대뿐만 아니라, 당시 강력한 수군을 가지고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수군을 활용하여 백제와 후연을 굴복시켰고, 고.수대전 시 고건무(영류왕)는 수군으로 패강에서 수나라 수군을 몰살시켰다. 게다가 보장왕 때 고구려는 신라와 당의 교역을 방해했는데 이는 강력한 수군이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연개소문의 수군을 통한 중원에 심장부로 통할수 잇는 요충지 산동과 강소성일대 침공은 그냥 전설일까? 전설역시도 그 이유와 원인이 있으니 전하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지 않을까 싶다. 연개소문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리고 연개소문이 지나지역에서 얼마나 큰 활약을 떨쳤으면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저 멀리 지나지역의 산동성과 강소성 일대에 나타날까?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연개소문의 전설이 허무맹랑하게 지나지역에서 화자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어니하라'는 전설에서는 어니하에서 당 태종의 말이 진흙수렁에 빠져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사로 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강소성 몽룡탑 동북방에 세니하라는 강이 있는데 이 세니하가 어니하에 등장하는 어니하는 아닐까?

참고로 [한단고기]기록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도망가는 당 태종을 추격하여 결국 당 태종을 사로잡아 수도 장안성에서 당 태종의 항복을 받고,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양자강 이북을 전쟁 배상으로 받아 냈다고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한단고기]는 위서라며 위 내용은 거짓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실패 이후 연개소문에게 궁복을 내렸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당 태종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고구려 사신이 가지고 온 글 또한 궤변으로 가득찼다면서 당나라 사신을 오만한 태도로 대했다는 지나의 사서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물론 이 기록은 연개소문을 깎아 내리려는 저의에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그들의 기록대로 교만하고 오만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는 고구려가 전승국으로서, 당에게 전쟁 배상을 물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승국인 고구려가 패전국인 당으로부터 전쟁을 일으킨 댓가로, 당의 영토를 이양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노릇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나국이 '정관의 치'로 대변되는 역대 최고의 황제로 숭상하는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전설이 내려올 수 있을까? 이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넒은 중원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개소문을 고구려 연개소문에 호되게 당했던 지나인들이나, 당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노선의 나라였던 신라인이나, 소중화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유학자들의 눈이 아닌 당당한 자주국가였던 고구려인의 눈으로 바라 봐야 한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정신과 기상을, 고구려인의 발자취를 저 멀리 중원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까지 떨친 당대의 호걸이다. 연개소문은 천하의 중심은 둘이 될 수 없다면서 고구려를 공격해 온 당나라에 대해 돌궐 등 북방유목국가을 외교적으로 움직여 당나라 본토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고립시켜 고.당전쟁에서 승리했다. 민족혼이 투철하고 고구려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용맹무상한 전략전술가였던 연개소문이 10년만 더 살았어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할 마음을 갖지 못했을 것이며, 아시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연개소문이 임종하면서 남생.남건 등 아들들에게 형제들간의 우애와 단결을 그렇게 요구했건만은 형제들간의 권력다툼으로 고구려는 결국 나당연합군의 공격빌미를 제공함으로써 자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고.당대전이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비단 고구려와 당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이 패전함으로써, 동방지역(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한 동쪽지역)을 직접 영유하려던 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문화권, 당 중심의 천하질서로 묶으려던 당의 계획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고당대전의 승리로 900년 천자국 고구려는 예전처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동방의 패자임을 실력으로 입증한 셈이다. 고당대전의 승리는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고당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개소문이야 말로 한민족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 

▲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 장면.1967년 중국 상하이 부근의 명나라 때 무덤에서 발견된 고서그림
 
[한단고기]는 연개소문과 당나라 이세민의 항복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나?

민족.민중과 함께한 대인 연개소문의 참 모습-
'조대기'에 가로되,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 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대국적인 연개소문과 소인 김춘추의 실체-연개소문은 마침내 고성제(영류태제)를 내어 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태제로 삼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리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서안)을 쳐 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김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고구려의 필사즉생 대당항전과 당나라 이세민의 항복-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떠들며 침을 뱉으며 이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이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인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이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고연수 등도 말갈군대와 함께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이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이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이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하여 보볍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이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 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적들을 추격했다. 추격군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고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고구려 군대)을 나누어서 1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1군을 이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1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이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양자강지역)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양자강이남의 홍콩지역)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왕개보가 말하기를 "연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다. 과연 그같은 막리지 있으니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존재하더니, 막리지가 없으므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망했다. 막리지는 역시 인걸이로다". 막리지는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너희들 형제는 서로 사랑하기를 물처럼 하렷다. 화살은 합치면 강하고 이를 나누면 곧 부러진다. 반드시 이제 이 죽으려는 사람의 말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할지니라"고 하였다. 때는 곧 개화 16년 10월 7일이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긋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 수를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땅 위에 묻힌 비문이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 빛으로 흘러라! 바람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 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 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 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 [한단고기]는  기록에 따르면, "이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양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양자강지역)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양자강이남의 홍콩지역)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라고 했다. 고로 광개토태왕이후부터 연개소문 당시까지 포괄하여 북방초원지역과 지나지역,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일본열도에 대한 고구려의 직간접 통치지배권이 미쳤던 최대영역은 상위 지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안티윤복현 10/01/29 [23:19] 수정 삭제  
  니가 쓴 글 중 보니 내가 예전에 쓴 글의 문구가 드문드문 보이는구나
야 임마 남의 글 인용할 때 출처를 밝혀야지
넌 대학에서 그런 공부 안배웠냐?
하긴 무식하니깐 그런것도 모르겠지
근데 아가야 앞으로는 남의 글 인용할 때 출처 밝혀라
니것인양 하지 말고 이 도둑놈아

한번만 더 그러면 너 저작권법 위반으로 신고한다
이건 경고다

니가 쓴 글 중
현재 학계에서는 [한단고기]는 위서라며 위 내용은 거짓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실패 이후 연개소문에게 궁복을 내렸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당 태종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고구려 사신이 가지고 온 글 또한 궤변으로 가득찼다면서 당나라 사신을 오만한 태도로 대했다는 지나의 사서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물론 이 기록은 연개소문을 깎아 내리려는 저의에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그들의 기록대로 교만하고 오만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는 고구려가 전승국으로서, 당에게 전쟁 배상을 물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승국인 고구려가 패전국인 당으로부터 전쟁을 일으킨 댓가로, 당의 영토를 이양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노릇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나국이 '정관의 치'로 대변되는 역대 최고의 황제로 숭상하는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전설이 내려올 수 있을까? 이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넒은 중원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증하는 것이다.

이 글은 내가 예전에 연개소문 관련 글 쓸 때 서병국 교수님의 고구려제국사. 이덕일씨의 살아있는 한국사를 읽고 참고하여 쓴 글이란다. 너 따위가 읽었을련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야... 최소한 남의 글 베낄 때 출처를 다는것은 기본 예의란다.

기자란 놈이 버젓이 남의 글도둑질하는 세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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