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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마산대전'서 당태종 응징한 연개소문(3)

연개소문이 승리하였다는 기록을 중국인들이 굳이 남겨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플러스코리아 | 기사입력 2009/11/24 [08:06]

산동성'마산대전'서 당태종 응징한 연개소문(3)

연개소문이 승리하였다는 기록을 중국인들이 굳이 남겨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플러스코리아 | 입력 : 2009/11/24 [08:06]
본 기사는 '우리역사교육원(기사하단 배너참조)의 도움을 받아 추적중인 중국내에 있는 연개소문 관련 유적지 중 그 세번째로 중국 산동성 즉묵(卽墨)시 마산(馬山)에 남겨진 전적 유적지를 소개합니다. 관련사이트는 현재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 사이트 주소 : http://www.qingdaonews.com/content/2003-03/16/content_1110455.htm
* 소재지 : 산동성 즉묵(卽墨)시 마산(馬山)
* 유적지 : 연개소문이 머물렀던 대왕구(大王溝)
* 신문기사 : 青岛新闻网(청도신문망) 2003년 3월 16일자 기사

마산전기(‘马山传奇),  '마산의 기이한 전설’

즉묵(卽墨) 마산(馬山)은 해발 241미터로 즉묵의 서부 평원에 유일하게 우뚝 선 고산으로서 신기(神奇)한 지방으로 충만된 곳이다. 현재 이미 알듯이, 마산은 당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그 이름이 나타났으며, 그것은 흡사 소(牛)와 유사한 관계가 있어 우비산(牛脾山)이라 불려왔다.

이렇게 된 연유는 산의 형세가 마치 소의 지라와 같아서이며, 나중에는 마산은 또한 "우왕묘(牛王墓)"라 불려졌고 "우왕제신(牛王諸神"으로 받들여져 왔다. 현재 이 곳은 유적지로서 보존되고 있다.

▲ 산동성 즉묵시 마산전경     ©플러스코리아

명청시대에는 이 산이 쌍봉이 융기되어 있는 모습으로 인하여 멀리서 보면 말안장같이 보여 "마안산(馬鞍山)" , 또는 "고안산(高鞍山)이라고도 했다. 오늘날에는 마산(馬山)으로 불리며 마안산을 간략히 부르는 말이다. 마산산맥의 주 요체는 사봉(四峰), 일령(一嶺), 일간(一澗)으로 되어 있다. 동쪽의 주봉은 마산이며, 서쪽은 대산, 동남쪽은 보안산이다.

서남은 단산(團山)이며 서쪽의 한 봉우리는 동북방 방향으로 길게 고개를 형성하여 산령을 이루었다. 네 봉우리 간에는 하나의 동서로 된 넓고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대왕구(大王溝)라 불리고 있다.

청대의 초영제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에 실려 있는 기사에 따르면 당조 정관17년(643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그 군주를 살해하고 스스로 나라의 군후(君後)가 되어서 대군을 이끌고 해(海)를 건너(渡海) 즉묵지방을 침범했다. 당태종이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친히 부대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거쳐 래주(萊州)를 향해 오는 적을 격퇴하기 위해 나섰다.


▲ 산동성 즉묵시 마산대전 위치도     ©플러스코리아

당태종은 마산의 서남쪽의 고개(坡, 파)에 주둔했다. 10여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달빛 아래 산에 올라 적 진영을 정탐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연개소문에게 발각이 되어 연개소문이 병사를 이끌고 단산(團山)에서 당태종을 추격했다.

당태종이 능히 추격에서 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알게된 용양장군(龍骧將軍) 김걸(金杰)은 칼과 말을 준비하여 단산에 올랐다. 김걸이 쾌마를 타고 마산의 앞 고개의 산골짜기에 다달았을 즈음 정면에서 연개소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김걸이 노하여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를 향해 부르짖는 모습을 보니 마치 큰 우레와 같이 정상에서 터지는 듯 하여 산골짜기로 도는 듯 했다. 연개소문이 구원병이 있음을 본 것의 진상은 분명하지 않으나 말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가게 되어 당태종은 풀려나게 되었으며 근심어린 모습으로 도망가 숨었다.

2일째 되던 날, 마산대전(馬山大戰) 중 김걸장군의 작전이 매우 뛰어나 손수 여러 차례 적진을 베어 나갔으며 40여리 이상을 적을 추격했다. 몸의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마산 아래에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숨졌다.

후에 사람들은 김걸장군의 영웅적인 사적을 보고 감회에 젖었으며 단산(團山)을 장군봉으로 불렀다. 원대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충용왕(忠勇王)으로 책봉이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그를 기리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의 연개소문이 머물렀던 산골짜기를 대왕구(大王溝)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연유로 명청시대에 산 위에 한 기의 사당을 만들어 "대왕묘(大王廟)"라 했다.

묘비에는 "김걸이 연개소문이 있는 곳에서 질타했다(金杰叱盖苏文处, 금걸질개소문처)"고 되어 있다. 당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구당서’에 또한 나와 있다.

[중략]  

▲ 산동성 즉묵시와 마산(241미터)의 위치지도     ©플러스코리아
 
이상이 청도신문망에 소개된 기사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연개소문 관련 전적지를 보면 연개소문이 산동성에서 당태종을 응징하기 시작하여 강소성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사에 나오지는 않지만 현지에 이러한 연개소문 관련 전설들이 전해내려 온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지금까지 소개한 세가지 이외에 또다른 전설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였건 이미 소개한 백제 동성대왕이 북위군사를 물리치고 차지한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등 강역이나, 대진국(발해)의 장문휴 장군이 산동성 등주를 공격한 역사적 사실 등을 감안해 보면 산동성은 여러 가지로 우리민족과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본지 2009년 10월 6일자 <놀라운 '남제서(南齊書)'의 대륙백제> 기록 참고

연개소문이 패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하였다는 기록을 중국인들이 굳이 남겨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에는 '산동성 봉래(등주)에서 당태종의 형을 전사시킨 연개소문'의 전설을 소개합니다.


분석 09/11/27 [23:25] 수정 삭제  
  연개소문이 당태종 이세민을 추격하여 결국 서안에서 항복을 받고 하북성 등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는 [한단고기]기록이 역사적 진실임을 알 수 있다. ..대진국은 해군을 동원하여 산동성 등주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결국 당나라는 대진국을 해동성국으로 부르며 찌그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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