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84)-생지옥 속의 애국지사들

생지옥 속의 애국지사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12/19 [15:56]

대한정통사(84)-생지옥 속의 애국지사들

생지옥 속의 애국지사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12/19 [15:56]

 대한정통사(84)-생지옥 속의 애국지사들

 


 [플러스코리아타임즈=안재세]4243년(서1910)을 전후하여 대한국의 뜻있는 지사들은 본토 바깥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일찍이 헤이그 밀사로 떠난 이준․이상설 등도 함께 참여하여 결성한 바 있던 신민회는 조국과 민족의 위기를 절감하고,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반드시 해외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해야만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면서 곧 그 실행에 들어갔다.

 

4242년(서1909) 봄에 서울에 있던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는 양기탁․이동녕․주진수․안태국․이승훈․김도희․김구 등이 모여서 비밀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문제와 군관학교 설립문제 등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그리고 각 도 별로 애국적인 유지들로부터 거둘 모금액을 할당하였으며, 그 해 여름에는 이회영 등을 서간도에 파견해서 독립운동에 적합한 지점을 매수토록 했다. 그러나 거미줄 같은 밀정망을 통해서 그와 같은 움직임을 알아차린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일제는 합방늑약을 강제한 후 군벌출신이며 무단정치가로 유명했던 사내(寺內:데라우찌)를 소위 ‘조선총독’이라는 명목으로 대한국에 파견했다. 사내는 부임하자마자 병력과 경찰력을 대폭 강화하고 보다 철저하게 대한국인들을 무단적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명석(明石:아카시)을 경무총감에 임명하여 애국지사들을 탄압하기 위한 모든 악랄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95-98)참조.


 그에 따라서 모든 애국적 활동은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고, 조국을 팔아먹는 밀정들과 부왜매국노들의 날카로운 감시망도 더욱 심해져 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애국지사들의 반일감정과 애국심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안중근의사의 사촌인 안명근은 안중근의사와 마찬가지로 투철한 애국자로서, 안중근의사보다도 먼저 간도지방을 넘나들며 비밀리에 독립운동 조직을 다지고 있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지방의 유수한 애국지사들을 결집하는 한편, 신민회의 전국조직망을 독립운동의 보루로 삼아 일순간에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기회만 노리고 있던 안명근은,. (144-93)참조.


 사내가 4243년(서1910) 12월 27일로 예정되었던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선천역 부근에서 사내를 처단하기로 하고 극비리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일제는 억지 합병 이후 애국세력을 말살하려고 벼르고 있던 중 밀정들로부터 그와 같은 움직임을 포착하고, 소위 ‘총독암살음모사건’이라는 명칭의 사건조작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6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고 살인적인 고문을 가하여 ‘본때’를 보이려 했다.. (152-363)참조. 서1940년 대판매일신문사 발행의 ‘반도이면사’ 306쪽에는 안중근 의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빌렘 신부의 누설로 사건모의가 발각되었다고 함. 빌렘(홍)신부는 안중근 의사의 최후 미사를 맡는 등 안중근 의사의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 그는 뮈텔이 허용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안의사의 최후미사를 여순까지 가서 진행해 주었으나, 분격한 뮈텔 주교가 “신부직을 떠나든가 안중근가문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일일보고하든가 택일하라!”는 강압을 받자 후자를 선택한 것임.


 4244년(서1911) 1월 1일을 기하여 경무총감부에서 전국의 왜경을 총동원하여 일제 검거한 애국지사들은 안명근을 위시하여 유동열․양기탁․안태국․이승훈․이동휘․임치정․김구․조성환․선우훈․안병찬․한필호․김근형 등 거의 모든 저명한 애국지사들을 총망라했다. 이로 인해 저명한 애국지사들과 전국의 신민회지도급 인사들이 총검거되는 비운을 맞았는데,. (144-105)참조.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에서 파견된 대한국담당 주교였던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한국명 민덕효/閔德孝)신부는, 안명근 자신도 신자였던 천주교조직을 통하여 알게 된 독립운동자들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정보를 경무총감 명석에게 전달했음을 비망록에 남기고 있다.


 “…빌렘(Wilhem)신부가 ‘총독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안명근(영세명 야고보)도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홍신부(빌렘신부의 한국명칭)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 사실을 아카시 장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데도 그를 찾아 갔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명동성당 앞에 통행로를 잘 내어주기를 부탁했다…”


 * 참고 1:명석은 본바닥에서 익힌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함으로써 ‘뮈텔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뮈텔의 적극 협조가 가능했다고 함.(1-397 참조)


 * 참고 2:뮈텔은 4223년(서1890)에 조선교구의 제8대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선교사업의 공로로 4253년(서1920)에 로마교왕으로부터 백작벼슬과 교왕탑전시종(榻前侍從)의 벼슬을 받았고, 4258년(서1925)에 조선교회 최초로 대주교에 임명된 인물임(참고목록 106참조)


 * 참고 3:‘새국사사전(일신각편,서1980.5.10발행)’에 의하면, 뮈텔은 빠리외방선교회로부터 조선교구에 파견되어 4213년(서1880)에 백령도에 상륙 후 황해도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이미 조선당국이 서양과의 문호를 개방한 후이므로 곧 석방되어 서울에 들어 와서 전교사업했음. 그는 10년후인 4223년(서1890)에 조선선교구 제8대 교구장이 된 후 명동성당 건립에 착수했고, 대원군의 부인인 민 부대부인(府大夫人)에게 영세를 주기도 했음. 4266년(서1933)까지 교구장 직을 맡았음.


 그처럼 운수 사납게 검거된 모든 애국지사들에게는 생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가혹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한 무자비한 고문의 양상은 단재 신채호선생이 ‘조선혁명선언’에서 일부 묘사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105인 사건


 “…주리 틀고, 목에 칼을 채우며, 단근질․채찍질․전기질․바늘로 손톱 밑 발톱 밑을 쑤시고, 수족을 달아매고, 콧구멍에 물 붓고,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등…”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나마 요행히 살아 나온 ‘운 좋은(?)’사람들이 경험한 것이며, 애국지사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던 악귀 같은 왜족들은 인간이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을 모든 잔인무도한 고문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한필호 지사와 김근형 지사는 결국 살인적인 고문을 당해내지 못하고 순국했으며, 600여 명의 총검거자중에서 105명은 기소되었다.


  주모자였던 안명근은 문자 그대로 ‘형극(荊棘)의 길’을 갔던 것이니, 저 악귀들은 널빤지에 촘촘하게 뾰족한 못을 박아 만든 고문대도 아닌 도살대(屠殺臺) 위에 안명근지사를 엎어 놓고 굴려대었던 것이다.. (144-105)참조. 인류애와 평화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련한 인생들을 천당으로 보내주겠다고 선전하는 서양 선교사들이, 성당으로 통하는 도로를 신속히 정비해달라는 요청을 하는 대가로 대한국의 열렬한 애국지사들을 인간도살장이나 다름없는 생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은, 황사영의 백서사건과 함께 오로지 교세확장에만 여념이 없던 서양 종교의 해독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음.


 한 번 악형에 시달렸던 애국지사들은 출감 후에도 대부분이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얼마 못 가서 병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한 일제의 악랄한 고문정치(拷問政治)가 의도하는 바는 명백했으니, 즉 일제의 무단통치에 반항하려는 기미만 보여도 모조리 때려 죽여 버리거나 회복불능한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윤치호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였는데도 일제는 사건의 구색을 갖추려고 윤치호까지도 사건에 끌어넣는 등 조작하기도 했는데, 애국지사들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윤치호는 완전히 얼이 빠져서 그 후 더욱 철저한 친일파로 일관했다. 주모자였던 안명근은 상상을 불허하는 잔인무도한 고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명만은 건지고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141-2-519)참조.

 

* 안명근 지사는 15년 후에 왜왕이 바뀌자 특사를 받아서 출옥한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광복운동에 헌신하다가 서거함.

 

* 1940년 대판매일신문사 발행의 반도이면사’ 306쪽에는 안중근 의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빌렘 신부의 누설로 사건모의가 발각되었다고 함. 빌렘()신부는 안중근 의사의 최후 미사를 맡는 등 안중근 의사의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 그는 뮈텔이 허용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안의사의 최후미사를 여순까지 가서 진행해 주었으나, 분격한 뮈텔 주교가 신부직을 떠나가 안중근가문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일일보고하가 택일하라!”는 강압을 받자 후자를 선택한 것임.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에서 파견된 대한국담당 주교였던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한국명 민덕효/閔德孝)신부는, 안명근 자신도 신자였던 천주교조직을 통하여 알게 된 독립운동자들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정보를 경무총감 명석에게 전달했음을 비망록에 남기고 있다.

 

빌렘(Wilhem)신부가 총독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안명근(영세명 야고보)도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홍신부(빌렘신부의 한국명칭)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 사실을 아카시 장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데도 그를 찾아 갔다그리고 그와 아울러 명동성당 앞에 통행로를 잘 내어주기를 부탁했다

* 참고 1:명석은 본바닥에서 익힌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함으로써 뮈텔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이와 같은 뮈텔의 적극 협조가 가능했다고 함.(1-397 참조)

* 참고 2:뮈텔은 4223(1890)에 조선교구의 제8대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선교사업의 공로로 4253(1920)에 로마교왕으로부터 백작벼슬과 교왕탑전시종(榻前侍從)의 벼슬을 받았고, 4258(1925)에 조선교회 최초로 대주교에 임명된 인물임(참고목록 106참조)

* 참고 3:‘새국사사전(일신각편,1980.5.10발행)’에 의하면, 뮈텔은 빠리외방선교회로부터 조선교구에 파견되어 4213(1880)에 백령도에 상륙 후 황해도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이미 조선당국이 서양과의 문호를 개방한 후이므로 곧 석방되어 서울에 들어 와서 전교사업했음. 그는 10년후인 4223(1890)에 조선선교구 제8대 교구장이 된 후 명동성당 건립에 착수했고, 대원군의 부인인 민 부대부인(府大夫人)에게 영세를 주기도 했음. 4266(1933)까지 교구장 직을 맡았음.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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