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85)

이어지는 망명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1/08 [09:31]

대한정통사(85)

이어지는 망명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1/08 [09:31]

 

일제의 대탄압에도 불구하고 신민회원들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이미 예정했던 대로 인가가 드문 서간도의 유화현 삼원보 추가가(柳花縣 三源堡 鄒家街) 일대의 대한인 거주지역으로 이주를 시작하였다. 이주에 앞장 선 애국지사들은 이미 남만주 임강현에 이주해 간 개천의 유림 현여준을 비롯하여 이회영의 6형제와 이동녕이상룡김창환주진수 등이었다. 그들은 각각 자신들의 가족들을 거느리고 4244(1911) 초까지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이회영은 7형제 중 째로서(이시영은 다섯 번째) 활달한 성격과 명민한 두뇌로 장래가 촉망되었던 그는 애국계몽교육사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4234(1901) 4월경에는 풍덕에 인삼밭을 구하여 인삼재배를 한 적이 있었다.그러나 미처 수확하기 전인 4238(1905)의 을사늑약 시기를 전후하여 강도떼가 몰려 와서 다 큰 인삼들을 모조리 강탈해 갔는데, 범인들을 찾아 나섰던 이회영이 마침내 강도들 중 하나를 잡고 보니 그 자는 일제 헌병이었다. 이회영이 그 자를 개성경무청에 고발하자 경무청에서는 일제 헌병대에 알렸고, 헌병대에서는 대일본제국의 헌병을 모독했다는 적반하장 격 태도로 오히려 이회영을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회영의 문중에서는 대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므로, 대한국 정부에서도 통감부에 항의하여 정부와 통감부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때 내장원경 이용익이 이회영의 석방을 황제께 과감하게 상주하여 황제가 칙명을 내려 석방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이회영은 일제가 판치고 있는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전 가족들을 이끌고 망명하기 위하여 수년간에 걸쳐서 차례차례 문중 재산을 정리하는 등, 왜구들의 감시를 피하여 용주도하게 준비한 끝에 일시에 전 가족의 서간도 이주라는 쾌거를 단행했던 것이다.

이회영 일가는 전 가산을 바쳐서 독립운동에 몰입하여, 4243(1910) 4월에는 삼원보에 민단(民團)적 성격을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농사지으며 공부하는 단체의 뜻)를 조직하고, 부속기관인 신흥강습소(나중에 신흥무관학교가 됨)를 설치하여 망명해 온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켰다.대한국 무관학교 출신인 신흥학교장 이세영과 교관 이장영양성환 등은 전교생을 인솔하여 낮에는 황무지 개간 및 농업에 종사하면서 틈나는 대로 구국항쟁을 위한 맹렬한 군사훈련을 전개했다. 그리고 4244(1911) 4월에 서간도로 이주해 온 대한인들이 대한인 대회를 개최하여 경학사의 취지서를 채택하고 각 임원들을 선임하고, 그 후 4252(1919)의 삼일운동 때까지 부민단(扶民團), 한족회로 확대개편하면서 서간도 전 지역을 망라한 막강한 항일독립운동단체로 성장해 갔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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