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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86)-의병장의 세계관

포효하는 광복군 - 의병장의 세계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1/18 [09:31]

대한정통사(86)-의병장의 세계관

포효하는 광복군 - 의병장의 세계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1/18 [09:31]

 대한정통사(86)-의병장의 세계관

 

 [플러스코리아타임즈=안재세]  일제의 농간에 의하여 국권을 강탈당한 대한국인들의 통한은 가히 하늘에 사무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의병항쟁의 기치를 시종일관 높이 들어 올리고 있던 유인석 의병장의 심정은 그 누구보다도 통절했다.

 

그는 민족광복투쟁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이념적 통일이 중요함을 인식하여, 위정척사론의 정통을 이어 받은 자신의 광복투쟁 이념을 각 분야에 걸쳐서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체(政體)에 대한 확고한 통일성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었고, 당시에 다분히 친서양적인 계몽운동의 영향에 의하여 점점 퍼져 가고 있던 민주제적 정치이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사물의 이치는 하나를 주()로 삼는 것이니 하나로써 만()을 통치해야 그 이치를 얻을 수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함을 강조). ()이 하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어지럽게 될 것이다.

 

천지를 두고 보아도 하나의 태극에서 음양오행과 남녀만물이 생기고, 사람에 있어서도 한 마음이 있어야 사지(四肢)백체(百體)를 쓸 수 있다. 많은 것으로 따지면 뭇별이 태양보다 많지만 태양이 위주가 되고, 뭇산이 태산보다 많지만 태산이 위주가 되고, 만민이 각양각색이지만 하나의 임금이 있어 그 위주를 이루는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총통은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교체 때마다 반드시 다툼이 있다. 하물며 제왕과 같이 귀한 자리는 어떻겠는가? 민심이 안정되지 않고 세상의 혼란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세습제를 행하면 당화(黨禍)를 그치게 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면 세상의 혼란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습제를 행하되 임금의 부덕함이 심하지 않을 경우는 신하로서 마땅히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충성을 바칠 것이고, 그 부덕함이 심할 경우 천명(天命)의 폐위(廢位)함을 따를 것이다

 

   따라서 유인석은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발생하여 공화정이 수립된 데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청국이 대총통제를 행하면 명분이 바로 서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며 체계가 잡히지 않아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함께 들어갈 바를 잃으니 백성이 불안할 것이다. 더욱이 서로 다투어 선거하면 틈은 갈수록 벌어져, 급기야 그 형세는 서로 무기를 동원할 것을 꾀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만 두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고, 각기 외국의 힘을 빌려 오고자 할 것이다. 외국이 이를 기회로 그들의 욕심을 꾀하면 그 때는 설령 그것을 알아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개화파들이 서양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평등과 자유의 원리를 주장하면서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는 데 대하여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평등하면 질서가 없고, 질서가 없으면 어지러워진다. 자유로우면 사양하지 않고, 사양하지 않으면 다투게 된다. 오늘날 세계의 어지러운 다툼은 다름 아닌 평등과 자유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면 어지럽게 다툴 마음이 생겨나 난쟁(亂爭)을 일삼게 되고, 천하가 평등과 자유로 만연되면 어지럽게 다툴 마음을 일으켜 난쟁을 일삼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그치지 않는다면 인류는 장차 쇠잔하여 없어질 것이니, 천지 또한 반드시 붕괴되고 말 것이다.”

 

   대단히 예리한 직관력과 현실적 판단력을 지녔던 유인석은 서양으로부터도 우리가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특히 오늘날의 세계가 무력을 외면할 수 없으므로 서양의 장점인 전쟁기술과 전쟁무기 등에 대해서 국가적 차원에서 잘 운영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리하여 서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인재를 선발할 때는 그 사람의 재주만을 볼 것이 아니라 충성된 마음을 지닌 사람을 유학 보내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광복투쟁의 최고목표를 일제에 의하여 파괴된 대한국의 제정(帝政)을 복원하는 데 두었던 확고한 황권옹호론자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서양식 입헌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입헌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임금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의원으로부터 먼저 의논하여 정한 후에 임금에게 이르는 것이니, 임금은 가부에 대한 취사(取捨)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허락만 할 뿐이다. 이는 아래로부터 위로 미칠 뿐이며, 위로부터 아래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렇게 되면 임금의 자리란 이름은 높지만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시킴을 받을 뿐이니, 실은 백성의 심부름꾼밖에 안 된다.”

 

   이처럼 대한국 무장광복투쟁의 최선봉에서 활약한 유인석 의병장이 광복하고자 한 나라의 모습은, 덕망 있는 임금을 중심으로 하되 민의를 충분히 수용하면서 동양적인 도덕성과 예절을 잘 지켜나가는 한편, 서양의 물질문명도 서양의 침략에 맞설 수 있을 만큼은 도입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민족적 주체성이 강한 전형적인 동도서기(東道西技)’적 문명국가였던 것이다.

 

   혹자는 유인석 의병장의 세계관이 다분히 봉건적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무장독립운동의 선구자들에게 있어서 황정의 유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며, 오히려 황정을 폐지하고(, 임금을 없애고) 공화정을 실시하자는 자들에게는 의혹에 찬 따가운 시선이 주어졌던 것이었다. 오히려 공화제를 주장하는 자들을 임금도 없고 애비도 없는야만적인 서양을 무조건 흠모하는 비주체적이고 서양사대적인 불온분자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의병투쟁의 목적도, 광복투쟁의 목적도 오로지 좋았던 옛 태평성대를 회복하는 데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또한 태평성대를 이루고 살았던 우리 고유의 문명스러운사회제도들을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데서 가능한 것이었기에, 광복투쟁의 사상적 구심점을 황정 복고에 두었던 유인석 의병장의 세계관은 뚜렷한 하나의 범민족적 투쟁목표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조금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유인석 의병장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로는

 

첫째, 당시의 열강 중에서도 미국 및 프랑스를 제외하고 영국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등 강국들을 포함한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은 물론, 그 외에 유럽열강의 식민지 신세를 면하고 남아 있던 태국일본 등 대부분의 나라들도 엄연히 입헌군주국을 표방하고 있었던 점과,

 

둘째, 나중에 광무황제의 폭붕으로 야기된 삼일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를 포함한 각 광복운동단체들이 공화제를 채택한 이후 광복운동의 헤게모니 쟁탈을 목표로 한 대립반목투쟁분열이 그치지 않고 이합집산을 거듭함으로써 광복투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큰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해방 이후 민족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역사적 정통성과 권위를 의심할 바 없는 대한국황제(내지는 황제권자) 대신에, 오로지 정치적 권모술수와 자화자찬의 능력에 뛰어난 자들끼리 외세와 외래사상에 의존하며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임으로써 민족분열의 골을 심화시켜 온 게 아니겠는가?

 

▲ 유인석 의병장 초상     ©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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