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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90) -신한혁명당의 명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4/06 [00:28]

대한정통사(90) -신한혁명당의 명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4/06 [00:28]

 

▲ 이동녕(가운데)을 비롯한 주요인사들     © 편집부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4247(1914) 8월에 유럽지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터지자, 일제의 배후공격을 두려워 한 러시아는 일제와 제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연해주에서의 광복운동에는 큰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러시아영토 내에서의 모든 대한국인들의 사회활동, 특히 정치활동이 금지되었으므로, 권업회도 해산당하고 권업신문도 정간당하고 말았다. 또한 중요한 인물들도 대부분 투옥당하거나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하여 권업회가 모체가 되어 성립되어가던 대한광복군정부도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4243(1910)을 전후하여 해외독립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지역할을 했던 해삼위의 신한촌도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없게 되어, 광복활동의 중심을 상해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갔다.

 

1차대전의 경과에 따라서 만주와 중국본토지방에 있어서도 여건은 점점 어려워져 갔으니, 전쟁의 불똥이 튈 것을 두려워한 중국당국도 대한국인의 광복운동을 억제시키려고 합법비합법적 모든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그에 따라서 북간도의 간민회(墾民會) 등이 해산당하고, 서간도의 부민단 및 신흥학교도 극심한 경영란에 빠져서 백두산 서편으로 이동하여 백서농장(白西農場)으로 위장한 채 간신히 유지해가는 형편이었다.그러나 그러한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대한국인의 광복투쟁 의지는 오히려 더욱 불타올랐다.

 

일차대전은 동맹국인 독일오스트리아터키의 세 나라와 연합국인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쟁패전이었다. 일단 유럽지방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자 유럽 열강은 동아시아 정책을 원활히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영국의 도움을 크게 받았던 일제는 그 틈을 타서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4247(1914) 823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후 곧 독일군이 조차(租借)하고 있던 산동반도의 교주만(膠州灣)을 공격했다. 교주만의 청도(靑島)에는 독일군 5,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29,000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투입하여 마침내 다음 달에는 독일의 조차지를 점령하고 말았다. 기고만장해진 일제는 4248(1915) 118일에 중국 측에 산동지방은 물론 남만주내몽고 등지에 대해서도 저들의 이권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의 21개에 달하는 요구조건을 강요하여 59일에는 중국 측의 수락을 받아내었다.

 

청국을 대신해서 4245(1912) 11일에 남경에서 수립된 후 줄곧 심각한 내분에 휩싸여 있던 중화민국 측으로서는 막강한 일제의 무력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일찍이 유인석 의병장이 청국이 대총통제를 행하면서로 다투어외국이 이를 기회로 그들의 욕심을 꾀해도 막을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갈파했던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대총통 원세개는 그러한 사태에 처해서 권력집중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강력한 황권(皇權)을 세우고자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럽지방에서는 동맹국과 연합국사이에 막상막하의 공방전이 끝 모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4248(1915) 초에 권업회의 중요임원이었던 이상설 및 상해의 박은식신규식 등과 청도에서 활동하던 조성환,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유동열, 국내에서 간 유홍열 등은 상해에 설립된 배달학원에서 회합하여 제1차대전의 경과를 검토하였다.그들은 그 회합에서 일단 당시에 승승장구하고 있던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따른 광복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그 결론은 국내와 국외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면서 독립군의 무장과 독립전쟁의 결행을 주도할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자는 것으로 모아졌다. 외교분야를 담당키로 한 성낙형의 주장은 이러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이 승리할 것이고, 일제의 지나친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인들도 독일과 결탁해서 일제와 결전하게 될 것이고, 러시아와 영국과 미국도 합세하면 일본이 고립될 것이므로, 이를 독립회복의 적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하여 해외에 있는 사람들은 외세를 이용하고, 국내에 있는 사람들은 실력으로 응하여, 비밀정부를 조직하고 군비조달을 확보하고, 각국의 원조를 획득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중국과 중한 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되, 그 내용은 대한국에 혁명전쟁이 일어날 때 중국이 군수물자와 병기 등을 공급하며 독일이 이를 보증하고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내정간섭은 배제하고, 실패할 경우에는 주도자를 보존해 준다는 것으로 해야 한다.”

 

, 무적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독일이 유럽전선에서 승리할 경우 일제와도 전쟁에 돌입할 것이며, 그럴 경우 일제에 침략당하고 있는 중국도 반드시 독일과 연맹해서 일제와 전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므로, 그러한 시기에 맞추어 그간 준비해 온 광복전쟁을 선언하고 일제와 싸우자는 의도였다. 광복전쟁은 대한광복군정부의 군대조직과 라자구의 사관학교 출신자들을 동원하여 국내로 진공한 후, 왜군의 운반 요새지를 공격하고 신의주안동봉천 등지의 철도를 장악하고 왜적을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일단 그러한 취지의 목표를 정한 신한혁명당은 곧 본부를 북경에 두고 이상설을 본부장에 선임했다. 각 지부들은 만주에는 봉천장춘안동연길에 두고, 지나 쪽에는 상해한구에 두고, 국내에는 서울원산평양회령나남 등에 두었으며 지부장들도 선임했다. 외교부장에는 성낙형, 교통부장에는 유동열, 재무부장에는 이춘일, 감독에는 박은식, 상해 지부장에는 신규식, 장춘 지부장에는 이동휘, 연길 지부장에는 이동춘, 회령 지부장에는 박정래, 나남 지부장에는 강재후가 각각 선임되었고, 박은식이 취지서와 규칙 등을 작성했고, 군자금 모금의 방법은 중국혁명단의 방법을 따라서 국내외에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신한혁명당의 당수로는 강제퇴위당한 광무황제가 추대되었다. 그 이유는 독립전쟁을 성공리에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모든 대한인들이 일체 단합해서, 민족역사 정통성의 상징이며 투철한 반일정신의 소유자로서 여전히 대한국인들의 지지도가 가장 높은 태황제를 구심점으로 하는 공고한 망명정부를 건설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힘을 모아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무황제의 복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대다수 국내 동포들이 물심양면으로 광복운동을 뒷받침해 주어야만 조국의 광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데다가, 중국지방에서도 대총통 원세개가 세력의 확장을 기회삼아 황제로 즉위하려 시도하고 있었으며, 1차 대전에서 승리할 것으로 여겨지던 독일도 제정(帝政)이었으므로 그 나라들의 후원을 얻으려면 공화정보다는 제정이 일단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독일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광무황제와 신한혁명당의 의도는, 1차 대전 발생 이후 그동안 많은 의지처를 제공했던 러시아가 국익 우선 방침에 따라서 일제와 동맹을 맺고 대한인들의 광복운동을 엄격히 규제한 데서 발단되었다. 즉 러시아가 일제와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된 이상 항일운동에 있어서 더 이상 러시아를 믿고 의지할 수는 없었고, 영국이나 미국 등도 여전히 일제를 옹호하는 정책을 취하고 같은 연합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대한국인들의 광복운동에 관한 한 오히려 그처럼 믿을 수 없는 태도만을 취해 온 연합국에 맞선 독일이 승리하는 때야말로 대한국인들을 얽어매고 있던 모든 악질적인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대한국인들이 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던 것이다. 설령 대한국인들이 독일의 실력을 너무나 낙관적으로 과대평가했던 일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민족해방이 빨리 이루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광무황제를 비롯한 대한국의 애국지사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러한 국제정세를 파악했던 광무황제는 이미 4247(1914) 12월에 삼엄한 밀정들의 경계망을 피해 극비밀리에 밀사를 통해 북경주재 독일공사 힌체(Hintze)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냈다.

 

우리의 선의의 동지, 존귀하신 대독일제국의 위대한 황제각하께

각하께서 폭력을 앞세우는 세 나라의 적들을 제압하는데, 올바른 노여움을 행사하신 후에, 한편으로는 우호국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각하를 우러러 보는 동안, 전 세계는 각하의 승리의 깃발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귀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벌써부터 맺고 있는 우호관계와 우리 국가가 귀국에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우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의 방해물이 이런 우리의 우호관계 사이에 끼어들어 저를 수심에 잠기게 하고 있습니다저는 유별나게 악질적이고 교활한 강대국인 이웃 일본이 선동적인 내 나라의 반역자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데리고 와서 나를 위협해서 그러한 속박상태에 처하게 만들고, 포기해야만 하는 운명이 되게 했습니다.

저의 지위와 계급을 빼앗고, 군주인 저의 옥새(Herrscher -Insignien)를 빼앗고, 저의 황후를 시해했으며 지금까지도 같은 방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줄곧 앉아서 모욕을 당해야 합니다. 나의 백성들은 밤낮으로 이를 갈며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부자유보다는 죽음을 택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생각은 전국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각하의 힘만이 나를 도울 수 있으며 나는 새로운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독일제국의 도움은 나에게만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각하의 제국에도 새로운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전에는 제가 사용할 의무가 있었던 국새(Reichssiegel)가 이제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서신의 증명을 위해서 단지 제가 일상적으로 쓰는 인장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나라가 세워진 후 523년째 되는 해, 1222

 

번역 : Krebs

Hintze ”

밀사를 통하여 광무황제의 친서를 접수한 힌체 공사는 이를 번역하였고, 4248(1915) 62일에는 독일외무성에 보고된 문건 가운데 첨부되었다. 이 친서에서 광무황제는 일제가 이미 황제의 고유 권한이어야 할 옥새와 국새 모두를 탈취해 버린 사실을 밝혔고, 일제의 불법 행위들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독일 측과의 연합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북경에 파견되었던 밀사가 누구인지 밝혀진 바 없으나, 아마도 그는 곧바로 해삼위로 가서 이상설 등 대한광복군 정부의 지도자들에게 광무황제의 의도를 알리고, 그러한 광무황제의 의도를 신호탄으로 삼아서 신한혁명당의 활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임) 이처럼 광무황제와 애국지사들의 뜻이 일치되어 가는 가운데 혁명당의 활동은 지체 없이 시작되었다.

 

  혁명당의 명멸

 

광복군정부 수뇌들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일사불란한 활동방침을 정한 신한혁명당은 곧 실행에 들어갔다. 본부장 이상설과 교통부장 유동열은 북경에 가서 김자순이라는 동포의 집에 본부를 차렸고, 조성환은 만주지방의 조직강화를 위하여 서간도로 출발했고, 외교부장 성낙형 등은 광무황제와의 연락을 취하고 또한 광무황제로부터 중국정부와의 한중의방조약(韓中誼邦條約)의 체결에 필수적인 신임장을 받아 오기 위하여 국내에 잠입했다. 한중의방조약의 내용은 독일 정부의 보증 하에 중국 정부와 신한혁명당이 대한국 망명정부 사이에 사전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광복전쟁에 대비한다. 한국인이 광복전쟁을 감행하면 중국 정부는 즉시 군대와 무기를 후원하며, 중일전쟁이 일어 날 경우 대한국 광복군은 중국을 도와서 일제의 안봉철도(안동에서 봉천까지의 남만주철도)를 파괴하고 한중공동의 항일전선을 구축한다는 대단히 구체적이고도 희망적인 것이었다.

 

수십 개 조에 달하는 조약안에는 그 외에도 대한국을 광복한 후 대한국은 30년간 중국의 원조에 대한 배상을 실시할 것이며, 중국이 배상을 구실로 대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한다는 사후적 문제까지도 주도면밀하게 명기해 놓았으며, 광복전쟁 시 중국 측에서 군관을 파견해 주는 문제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약의 체결은 중국 원수와 대한국 망명정부 원수 및 독일황제의 인준까지 거쳐서 하도록 하고, 대한국이 광복될 때까지는 서로가 비밀을 지킬 것을 명시하기도 했다.

 

계획에 따라서 국내에 잠입한 혁명당 간부들은 많은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4248(1915) 726일에는 충직한 내관(內官) 염 덕신을 통해서 마침내 덕수궁의 함령전에서 이상설과 성낙형 등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추진하는 신한혁명당의 활동내용이 담긴 서찰과 관계서류 등을 광무황제에게 전했으며,이에 크게 기뻐한 광무황제는 외교부장 성낙형을 직접 만나기 위한 알현 허가까지 내렸다.한편 중국지방에서는 이상설 등 간부들이 원세개 총통 및 조병균장훈장작림단지귀전능훈양사기 등 중요한 정객들과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제와 매국적 밀정들의 감시망을 피할 수가 없어서, 광무황제는 물론 의()왕 이강에게까지 연락하면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성낙형염덕신 등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는데, 그것이 4248(1915)의 소위 보안법위반 사건이었다.

 

또한 제1차 대전에서는 간부들의 염원과는 달리 독일이 승리하지 못하였고 일제가 오히려 연합군 측에 가담함으로써 국제적 지위가 높아지고 말았다. 중국에서도 자체내부의 치열한 정쟁(政爭)이 전개되어 일제와의 전쟁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막판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해버렸고, 러시아 측도 전시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광복운동가들의 활동을 전면 규제해 버렸으므로,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기대했던 만큼의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한혁명당은 방만하게 흩어졌던 광복투쟁전선을 단일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애국자들은 광복투쟁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조직적 활동에 더욱 매진했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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