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92)

황제의 유산(遺産)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5/03 [14:31]

대한정통사(92)

황제의 유산(遺産)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5/03 [14:31]

유인석이상설 등 해외 광복운동의 상징이 된 선구자들이 추구했던 광복된 조국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강제퇴위당한 광무황제를 최고지도자로 다시 추대하여 자주독립을 견고히 다지는 민족국가였다. , 왜족들에 의하여 광무황제가 강제퇴위 당하면서 민족사가 왜곡되기 시작한 바로 그 점으로부터 역사를 다시 바른 방향으로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광복의 진정한 의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거나, 광무황제와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의논했던 많은 의병장들과 밀사들의 광무황제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비록 국내외의 대한국인 사회는 물론이고 궁궐 구석구석까지도 깔린 일제의 밀정들과 감시망에 의하여 광무황제가 시도한 많은 노력들이 아깝게도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무황제는 광복을 위한 노력을 멈춘 적이 없었다.

강제퇴위당한 후에도 광무황제는 신임할 만한 사람들을 골라서 밀지를 내리거나 독려하는 방법으로 의병항쟁이나 광복활동을 항구적으로 추진하는 작업을 멈춘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광무황제의 뜻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던 헤이그밀사 이상설이 주도한 13도 의군이나, 대한광복군정부나, 신한혁명당 등 해외 최대의 광복운동단체들이 항상 광무황제를 최고의 지도자로 추대했던 것이다. 또한 바로 그러한 사실들이야말로 항일운동에 있어서의 광무황제의 상징성을 극도로 증오한 일제가 더욱 악독한 심사로 광무황제를 암살하려는 흉계를 꾸미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기도 했다.

강제합방 후에도 광무황제는 항일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니,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성립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35세의 젊은 나이에 낙안군수를 지냈던 임병찬은 을사늑약 후 최익현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에 유배당했는데, 최익현이 순국한 지 두 달 만에 광무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어 고향 옥구에 돌아와서 구국항쟁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강제합방의 비보를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고 절치부심하던 차에, 국치를 설욕할 마땅한 의병장을 물색하고 있던 광무황제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4245(1912) ()928일에 공주의 유생인 이식을 통해 비밀리에 칙조(勅詔)를 내려, 임병찬을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獨立義軍府 全羅南道 巡撫大將)’으로 임명하고 의병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밀조를 받은 임병찬이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석 달 후인 4246(1912) ()1227(양력 1913 1)에 전 참판이었던 이인순을 통해 재차 전달되었는데, 이번에는 정이품 자헌대부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총장(正二品 資憲大夫 獨立義軍府 陸軍副將 全羅南北道 巡撫總將)’에 임명했다. 이에 임병찬은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아들인 임응철을 상경시켜서 칙명을 완전히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또 다시 밀조를 받음으로써 서둘러서 거사를 결행하게 되었다.

 

 * 상경했던 임응철은 여러 유림들과 상의한 이외에도 이종일 등 천도교 인사들과도 접촉했으나 이종일로부터는 거절당했다고 함.

 

임병찬은 지체 없이 인근 고을들에 격문을 뿌리는 한편, 의군부를 전국조직으로 확대하여 대한독립의군부 편제(編制)’를 만들었으며, 4236(1913) 323일에는 동지들과 상의하여 각 도 및 각 군의 대표들까지 선출하였다. 모의에 주동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림과 의병출신자들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4246(1913) 9월에 임병찬과 그의 동지들은 그 때까지 국내에서 불굴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의병세력들을 총망라해서 독립의군부를 결성했다. 독립의군부에는 전국각지의 각계각층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으므로 중앙에 원수부(元帥府)를 두고, 서울강화수원개성광주 등 경기도 일원에 다섯 개의 영()을 설치했고, 각 도와 각 부와 각 군의 책임자까지 둔 후 면장이장통장까지 두고자 했다.

다음 해인 4247(1914) 2월에 전국적인 편제조직을 완료한 독립의군부는 일제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과 각급 관리들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고, 왜구들에게는 대한국을 강제로 통치하는 행위가 곤란할 것임을 알릴 뿐만 아니라 열강에 대해서도 대한인국들이 왜구들의 통치에 결코 순순히 복종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한편, 국민들에게도 납세거부 및 국권회복의 여론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북부지방에까지 조직을 확대해 가던 중 조직원들이 불행히도 왜구들에게 체포당하여 잔인무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자백을 함으로써, 4247(1914) 5월에 수백 명의 관련자(전부 유생들) 모두가 체포당하는 비운을 맞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임병찬은 거문도로 유배당한 끝에 4249(1916) ()523일에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독립의군부가 주로 전라도와 충청남도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유림의 보황주의적 단체였다면, 독립의군부가 해체당한 이후에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일원에서는 같은 목적으로 민단조합(民團組合)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요인사들이 독립의군부에 연루되어 활동이 불가능해진 탓인지 그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다. 4248(1915)에 문경새재 주변에 거주하던 유생들에 의하여 조직된 민단조합은 이인영이강년 등의 의병장들과 인연이 깊은 이동하이은영김낙문이식재최욱영 등이 조직했으나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에 발각되어 계획단계에서 봉쇄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민단조합의 해체 이후 본토 내에서의 척사유림적 의병조직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임병찬 이외에도 일찍이 광무황제의 칙조를 받고서 의병을 일으켰던 왕산 허위의 막하에서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도리를 배운 바 있던 전직 판사출신의 박상진과 후일의 청산리대첩 영웅인 김좌진 등이 결성한 광복단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악질친일파 지주 장승원을 처단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며 국내 광복운동의 선봉에 섰고, 광복단에서는 다시 김상옥 등 많은 의열운동가들을 배출하여 왜구들과 왜구들의 기관들에 대한 파괴공작을 감행함으로써 왜구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던 것이다. 왜구들은 광무황제야말로 이러한 모든 광복운동의 배후조종자라고 여기고 있었고, 또는 광무황제가 건재하는 한 광복운동이 그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보다 엄중하게 감시하는 한편, 기회가 닿는 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광무황제를 암살해 버리려는 흉악한 음모를 추진해 가고 있었다.

그러한 왜구들의 의구심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실들을 근거로 이루어졌던 것이며, 광무황제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광복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던 사실은 다음과 같은 헐버트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헐버트는 해방 후 자유당 집권 시기에 한국에 보낸 편지에서,

광무황제께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실 때 막대한 내탕금을 해외 독립운동자금으로 본인에게 맡기신 것이 있어서 상해 노중(露中)은행에 예금해 두었는데, 일제가 강제합병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전부 몰수했다. 그리하여 광무황제의 거룩하신 뜻이 수포로 돌아갔는데, 이 사실은 광무황제와 본인만 아는 비밀로서 내가 죽기 전에 꼭 결말을 지어야 하겠다. 그 당시 은행에 맡긴 모든 증서와 관계서류는 지금도 내가 잘 보관하고 있다

라고 언급한 후 얼마 있다가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90 고령의 노구를 이끌고 방한했으나, 무리하게 결행했던 장거리 여행에 노환이 도져서 방한 즉시 병원에 입원한 후 불과 7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한 가족의 여섯 형제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전 재산을 처분한 후 40여 명의 전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이회영의 형제들도 궁중의 시종을 시켜서 광무황제를 북경으로 모셔갈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이회영 일가는 서간도에 망명한 직후부터 신흥학교를 세우고 경학사를 건립하는 등 광복운동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이상설이동녕 등과 함께 러시아의 하바스크에 대한국인들의 사관학교를 세우기로 한 후, 이회영은 다시 귀국하여 비밀리에 광무황제에게 그러한 복안을 상주하고자 하였다.그리하여 4251(1918) 8월 하순경 비밀리에 서울로 잠입한 이회영은 옛 동지이자 교육협의회 회장이던 유진태를 권농동 자택으로 찾아가 은거하면서, 민영환의 형제인 민영달을 통하여 덕수궁에 있던 광무황제와 접선하는 데 성공했다.민영달은 고관대작이었고 또한 만석부자였으나 민영환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대해서는 불타는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던 충신이었다.

이회영이 광무황제께 계획을 알려 드리자 황제는 눈물까지 흘리며 크게 기뻐하고, 50(일설에는 40만 원)이라는 거금을 민영달을 통해서 극비밀리에 하사했다. 10만 원이 없어서 연해주에서의 사관학교 설립이 난관에 봉착했었던 곤경을 치른 적이 있었던 이회영과 광복운동가들에게 있어서 황제의 하사금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이회영은 그 막대한 자금을 숨기고 다시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 하에 놓인 대한국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재건하고 광복군을 재편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노일간의 관계가 대립관계가 아닌 공존관계로 바뀌면서 러시아에서 사관학교를 경영하는 일은 어렵게 되었으며, 4246(1913)에 동북만주의 라자구(羅子溝)에 이동휘와 이종호가 설립했던 대전사관학교(大甸士官學校)도 지속할 수 없었다.그에 따라 이회영은 작전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던 상해로 가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자금 중 일부는 나중에 빠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상해에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은 애국심과 열정만은 열렬했으나 자금조달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해서 그저 독립을 열망하는 말만 무성할 뿐이었으나, 이회영의 자금공급으로 임시정부의 수립이 활성화되고 현실화되었다.

이회영이 추진한 망명정부에서는 광무황제를 비밀리에 망명시킴으로써 광복운동의 총지휘탑으로 하려 했는데(이상설의 관여 여부는 불명), 그에 따라서 이회영은 4250(1917)에 광무황제의 시종인 이교영과 연락하였고, 4251(1918)에는 민 영달이 제공한 자금 중 5만 원을 북경에 망명 중이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여 차후 망명해 올 황제의 거처를 주선하도록 했다.그것은 4252(1919) 1월에 프랑스 빠리에서 열릴 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공신력을 신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무황제가 거미줄 같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여 성공적으로 망명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고, 광무황제를 수반으로 하는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애끓는 열망만을 간직한 채 시간은 안타깝게도 유수처럼 흘러만 갔다.

또한 광무황제는 일찍이 신임하던 내장원경 이용익을 시켜 비밀리에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담아서 비밀장소에 매장해 놓았다고 한다. 황제는 그 지도를 7촌 조카인 이지용에게 맡기며 탈출을 기도했으나, 탈출자금으로 5천 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완용에게 정보가 탐지되었다. 이완용은 그 사실을 총독부에 알리고 왜왕 앞에까지 가서 광무황제를 시해하겠다는 맹서를 하고 귀국한 후, 자신의 사돈 한상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광무황제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 시해음모의 최고주범은 왜왕이었던 것이며, 광무황제의 시해는 완전히 왜구들의 정책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온통 적으로 둘러싸인 채 항일투쟁의 최선봉에서 고군분투하던 황제의 신변에는 서서히 독수가 뻗쳐 오고 있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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