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93) -무오독립선언과 황제 폭붕(暴崩)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5/20 [09:22]

대한정통사(93) -무오독립선언과 황제 폭붕(暴崩)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5/20 [09:22]

 

[플러스코리아타임즈=안재세] 유인석 선생과 이상설선생의 서거 후에도 그들의 뜻을 이어 받은 광복운동가들의 활약은 더욱 증폭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의군부광복단 등의 항일운동이 죽 끓듯 도를 더했고, 목숨을 건 의열투쟁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져서 왜구들을 당황하게 했다. 무리한 강제합방을 시도했던 왜족들은 자업자득으로 선린 이웃을 잃는 대신, 대한국인들의 끊임없는 적대행위에 시달리게 되는 진퇴양난의 곤경을 자초하였던 것이다.

 

또한 노령과 만주지방에서도 점차 독립운동기지의 골격이 갖추어져 감에 따라서 본격적인 본토수복작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볼셰비키 혁명의 바람을 타고 볼셰비키들의 지원을 받아서 광복운동을 펼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게 되었고, 이윽고 4251(1918) 122일에는 시베리아 바이칼호반의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대한국인 교포들에 의하여 공산당 한국지부가 창립되었다. 그들은 차후에 이르쿠츠크파로 불게 되었다.

 

▲ 이루크츠크 공산당 한국지부 터     © 편집부

 

유서 깊은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가를 말살하고 들어선 레닌의 반()군주제적 공산주의 정권에게 깊은 영향을 받는 집단의 등장으로 인하여, 민족역사적 정통성의 상징인 광무황제를 중심으로 뭉쳐야만 할 광복운동전선의 통일에 문자 그대로 적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식 공화제의 영향을 받은 자들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자들에 의하여 차후에 각종의 임시정부적 기구들이 제멋대로 난립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광무황제를 의식한 모든 광복운동은 무장항쟁의 성격을 띠었으며, 실제로 왜구들을 몰아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직 무장투쟁밖에는 없었으니,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무장항쟁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모든 참된 애국지사들은 사상이나 주의주장을 떠나서 오로지 조국광복의 한 뜻만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던 것이다.

 

꾸준히 광복운동의 기반을 다지던 간도지방에서는 4251(1918) 1113일에 애국지사대표 39명이 주동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채택하고 세계 만방에 발표했고, 이로써 대한광복군 총진군의 나팔이 울려 퍼졌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왜구들이 스스로 물러갈 때까지 오직 무력투쟁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였고, 왜구들과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대한국인들에게 다시 한 번 확신시켰으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戊午獨立宣言書     © 편집부

 

우리 대한은 유사 이래 우리 대한의 한()으로 이민족의 한이 아니다. 반만년 역사의 내치외교는 한왕 한제(韓王韓帝)의 고유한 권리로서, 삼천리 방방곡곡의 높은 산과 맑은 물은 한남 한녀(韓男韓女)의 공유재산이며, 기개와 뼈대와 글과 말이 세계에서 빼어난 우리 민족은 능히 우리나라를 옹호하고 만방과 조화로이 협력하여 세계에 더불어 나아갈 하늘이 내리신 백성이다. ()의 일부의 권리일지라도 이족(異族)에게 양보할 의()없으며, 한의 한 자의 땅일지라도 이족이 점거할 권리없으며, 한의 일개의 백성일지라도 이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므로 우리 대한국은 완전한 한인의 한이다.

 

슬프도다! 일본 쪽발이들의 임진(壬辰)이래 반도에서의 적악(積惡)은 만세에 감추지 못하며, 갑오(甲午)이후 대륙에서의 작죄(作罪)는 만국에 허용치 못할 바이다슬프도다! 일본 쪽발이들이여! 징벌함이 적고 깨우쳐줌이 큰 것은 너희의 복이니 섬은 섬에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에 돌아가고 대륙은 대륙에 돌아가게 하라우리, 같은 마음 같은 덕망의 이천만 형제자매여! 단군대황조(大皇祖)는 상제(上帝)에 좌우로 하명하고 우리들에게 기운(機運)을 내리셨다. 세계와 시대는 우리에게 복리를 내리려 한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에 하늘에 거스르는 마귀와 도국(盜國)의 적()을 한손에 도결(屠決)하라! 이로써 사천년 조종(祖宗)의 광휘를 드높이고, 이로써 이천만 적자(赤子)의 운명을 개척하라!

 

독립군아 일제히 봉기하라! 독립군은 천지를 휩쓸라!

한 번 죽음은 인간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돼지와 같은 일생을 누가 구차히 도모하겠는가? 살신성인하면 이천만 동포는 마음과 몸을 부활하니 어찌 일신을 아끼며, 집을 기우려 나라에 갚으면 삼천리 옥토는 자가의 소유이니 어찌 일가(一家)를 아끼랴황천(皇天)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일체의 못된 굴레에서 해탈하는 건국임을 확신하여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

 

김좌진유동열김동삼신팔균서일여준김규식이동녕 등 광복운동단체인 중광단의 간부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이 선언문은 그대로 모든 광복운동가들의 신념이 되었고, 따라서 일체의 타협을 배제하고 오로지 광복전쟁을 통해서만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만주와 노령 일대의 대한국인 사회에 팽배해 갔다.

 

그리하여 박쥐같은 밀정들을 제외한 대한국인 교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열성적으로 광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에 동참하였고, 젊은이들은 신성한 국권회복투쟁의 전선에 나서기 위하여 앞을 다투어 광복군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광무황폭붕(暴崩제 )

광무황제는 일찍이 명성황후가 왜구들에 의하여 시해당한 후 왜구들에 대한 원한이 깊은데다가, 강제양위를 당하고 나라마저 강제병합당하여 통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왜구들에게 철저히 감금당하고 있었어도 기회가 닿는 대로 설원하려는 염원은 하루도 잊지 않았다. 왜구들 또한 광무황제를 가리켜서 배일파(排日派)의 두목이라 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제거하려고 틈만 노리고 있는 가운데, 1차 대전이 끝나고 각국대표들이 빠리에 모여서 강화회의를 열게 되었다. 왜구들은 그 기회에 저들의 강제합방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4241(1908)에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강제로 데려갔던 황태자 영()왕과 왜왕족인 방자(芳子:마사꼬)4252(1919) 125일에 결혼시킨 후, 신혼여행이라는 명분으로 유럽지방 여러 나라들을 친선방문토록 하다가 강화회의가 개최될 때 참석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각국대표들에게 한일 두 나라가 동화(同化)되었다는 증거로서 두 사람을 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왜구들은 영왕의 결혼을 추진하는 동시에 한일합방이 양국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문서를 작성해서 매국노 윤덕영을 시켜 광무황제의 어새를 누르도록 핍박하려 하였으나 광무황제는 깨끗이 거절했다. 특히 영왕의 결혼문제를 꺼내자 광무황제는 크게 진노하며,

원수나라 왕족의 딸을 어찌 며느리로 삼을 수 있느냐? 짐이 생존해 있는 한 이 혼사는 성취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대갈일성했다. 광무황제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왜구들은 전직 고관들과 전국 각 단체들을 강박하여 억지로 한일합방찬성 서명을 받아내려 하였으므로 전국의 민심은 몹시 흉흉해졌다.

 

한편 왜구들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빠리평화회의에 지극히 큰 관심을 가졌던 광무황제는 헤이그밀사에 이어 빠리에도 밀사를 파견하려는 뜻을 품고 계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밀사를 엄밀하게 선정해야 할 뿐 아니라 거사자금이 필요했는데, 헤이그사건과 강제합방이후로 왜구들이 궁중의 예산을 바짝 줄이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으므로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태황제는 고심 끝에 가장 신임하는 충신 김황진 시종과 방법을 의논한 결과 10만 원을 총독부로부터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끝까지 의심한 왜구들은 김황진을 불법으로 체포하여 갖은 고문을 다하며 추궁했으나 김황진이 끝내 자백을 않고 버텼으므로 할 수 없이 한 달 만에 풀어주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김황진을 강제로 사직시키고 다시는 태황제와 만날 수 없게 만들었으며, 태황제에게는 한층 더 감시를 강화했으므로 수족 같던 충신을 잃은 태황제로서는 더 이상 일을 추진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4252(1919) 121일 오후 3시에 광무황제는 궁녀들이 가져 온 식혜를 마신 후 곧 절명하고 말았으니, 당시의 정황을 손병희 선생은 다음과 같이 국민들에게 알렸다.

 

< 의암 손병희 선생의 격고문(檄告文) >

 

슬프고 쓰리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우리 황제폐하의 서거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평소 건강하시옵고 또 병환의 소식이 없었는데 평일 밤 궁전에서 갑자기 서거하시니 이 어찌 상식적인 이치이겠습니까?

 

또 목하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제출함에 반대하여 저 교활한 일본인의 간사한 계략이 한국민족은 일본의 어진 정치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여 갈라져서 따로 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증명서를 제출하였는 바, 그에 의하면 이완용은 귀족대표요, 김윤식은 유림대표요, 윤택영은 종족대표요, 조중응과 송병준은 사회대표요, 신흥우는 교육종교계 대표라 꾸며 만들어 서명 날인하여 이를 황제폐하에게 승인하도록 억지로 청탁함으로써 엄한 기강을 망극하게 하자 크게 진노하셔서 엄격히 끊어 준척하시니 나갈 바를 꾀함이 없었소이다.

 

또한 다른 변고를 두려워하여 마침내 완전히 반역할 것을 부탁하고 독주를 들게 하여 시해할 것을 행할 때 윤덕영한상학의 두 명 적신으로 하여금 황제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에게 부탁하고 밤에 황제가 드시는 식혜에 독약을 섞어 잡수시게 드리니 이를 드신 황제의 옥체가 갑자기 물과 같이 연하게 되고 뇌가 함께 파열하셨으며 피가 용솟음치더니 곧 세상을 떠나셨소이다.

 

이에 마음이 쓰라리고 슬말할 곳을 알지 못하겠소이다. 곧 두 명의 궁녀도 위협으로 나머지 독약을 먹여 처참히 죽게 하고 입을 틀어막았으니 저 왜적의 마음이 점점 더 우쭐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을미년 가을에 있었던 명성황후 시해도 이를 갈고 골수에 사무쳐 기어코 한번 보복할 것을 꾀하고 있는 때인데 옛날 원수도 아직 갚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변고가 또한 거듭 일어나고 있으니 이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또 미국대통령 윌슨 씨가 14개조의 성명을 발표하여 민족자결의 음성이 일세를 뒤흔들어 폴란드 등 12개국이 아울러 독립이 되었는데 우리 한민족이 어찌 이 기회를 잃어버리겠습니까?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가 이 기회를 타서 국권회복을 널리 소리쳐 울음으로 호소하나 국내동포가 편안히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성원이 떨치지 못하고 대의가 아직 정해지지 아니하니 궐기합시다. 우리 2천만동포여, 오늘은 세계가 개조하고 망한 나라가 부활함에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이미 잃은 국권도 가히 돌아올 것이고 이미 망한 민족도 가히 구할 수가 있습니다. 황제폐하와 황후폐하의 큰 원수도 가히 씻을 수 있으니 봉기하고 궐기합시다. 우리 2천만 동포여! ”

 

융희황제는 처음에는 단순히 태황제께서 급사하신 것으로 보고를 받으셨으나, 어떤 사람이 사건의 진상을 몰래 알려 드리자 황태자인 영()왕에게 진상조사를 명했다. 그러자 왜구들은 재빨리 영왕을 강제로 다시 일본에 데려가 버렸고, 따라서 시해 진상에 대한 어떠한 공식적인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구들은 시해사실을 감춘 채 서둘러 영왕을 결혼시켜 빠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했으나, 시해소식은 시해당일부터 궁중에서부터 흘러나와 곧 전국으로 퍼져 갔다.

 

광무황제의 폭붕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남녀노소들은 7일간이나 곡소리를 그치지 않았고, 지방에서도 일제히 서울 쪽을 바라보며 망곡(望哭)하였으며,어떤 이들은 자결까지 하여 광무황제의 뒤를 따름으로써, 국민들의 원한 맺힌 기운이 하늘에 닿았다. 그러나 일제는 관공서와 학교를 하루도 휴업하지 않았고, 극장에서는 가극공연 등을 그대로 했고, 외국인 거류자도 조기를 달았건만 일제는 조기를 달지 않았다. 대한국의 애국적인 남녀학생들은 일인직원들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흑색 완장과 검은 댕기로 상장(喪章)을 달고 3일간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에 대하여 왜구들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213일자 고시(告示), ‘황제의 장례일자는 33, 능의 위치는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로 정한다고 공포하고 장례위원으로 일제고관 20명과 이완용송병준윤덕영 셋을 임명했다. 그리고는 정동에 있는 중추원에 사무소를 둔 장의위원회가 인산일(因山日)31일부터 37일까지로 정하고 완전한 왜식 장례절차를 발표하였다. 이에 국권을 강탈당한 대한국인들의 슬픔과 분노는 더욱 충천하였고, 서울은 물론 지방 각지에서 몰려드는 조문인파로 서울시내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지방에서 몰려 든 선비들과 일반 민중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덕수궁 앞과 창덕궁 앞거리에 있는 여관 등에 묵으면서,

이 악독한 왜놈들이 민황후를 참살하고 나라를 빼앗고 이제 또 태상황제까지 독살했구나!”

하면서 방성통곡을 하였고, 서울시내는 울음의 도가니가 되어 버렸다.광무황제의 투철한 항일정신을 알고 있던 대다수 국민들은 황제의 억울한 죽음을 더욱 애통해하며, 황제의 못 다하신 유업을 이어서 기필코 왜구들을 대한국 강토에서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이룰 것을 다짐했다.

 

일찍이 독립협회 음모사건에 관련되어 큰 고초를 겪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광무황제의 영명함과 깊은 애국열정을 익히 알고 있던 월남 이상재는, 한을 품고 붕어하신 광무황제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만가(輓歌)를 읊으며 마지막 떠나가는 길에서 애도하였다.

 

목놓아 울고 또 목놓아 우나이다.

이때를 당하여 어찌 도적들을 참고 볼 수 있으리요.

산하는 의구히 옛 모양이로되,

초목들까지도 슬픔을 머금고 있나이다.

산릉(山陵)으로 용어(龍馭)가 멀어져 가시니,

슬픈 생각이 끝이 없나이다.

달리는 바닷물이 진동하며 밀어 닥쳐

천지가 한꺼번에 무너지나이다.

사랑홉게 받들기 48년여에,

은택이 이 몸에 배이옵기 흡족하였나이다.

저 하늘이 어찌 끝이 있사오리까마는,

뽕밭과 푸른 바다는 영영 바뀌고 말았나이다.

깊은 골 먼 물가에서,

백발 늙은 몸이 피눈물로 종횡하나이다.

임금님의 상여는 옛 예법에 따라 모시오며,

장의절차는 유훈에 따라 봉행하옵거니와,

금곡의 구름은 멀고 멀었사옵고,

청문(靑門)의 날빛은 더디고 더디나이다.

천고의 한을 가지고

감히 한편의 글월로 올리옵나이다.”

 

그처럼 처절했던 이상재의 피맺힌 심정은 그대로 일부 악질적인 매국노친일분자들을 제외한 전 대한인들의 애통하는 마음이었으리라!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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