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척살·민주화 초석 ‘10.26 의인들 39주기 공동추모행사’ 열려사형집행 전 김재규장군,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 하십시오"
[플러스코리아 타임즈= 이형주 기자] "나는 혁명은 결행하였으나 혁명과업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하여 수행될 것이며,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 하십시오" 1980년 5월24일 54세였던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전 마지막 한말이다.
1979년 10월 26일 김 장군에 의해 독재자 박정희의 유신의 심장을 쏘는 혁명거사는 실행되었고 핵을 잃은 유신체제는 붕괴되었고 ‘10.26 의인들'에 의해 한국민주화의 초석이 다저진 날이기도 하다.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집행위원장 김범태, 공동대표 강신옥·김상근·안동일·청화·함세웅)’ 주최로 ‘10.26 의인들 37주기 공동 추모행사’가 24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내빈으로 참석한 인사는 이길재 전 의원, 임수경 전 의원, 이철 전 철도청장, 명진스님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행사에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강신옥 변호사와 함세웅 공동대표 등이 참석, 김재규 전 중정부장과 그의 부하 박흥주,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 등 10.26 관련 6인의 인사들을 추모했다. 행사를 주관한 추모위원회측은 40주년인 내년에는 추모행사를 확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공동대표 안동일 변호사는 추모사에서 “김재규 장군의 진정성, 과연 10·26의거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추모식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처럼 대한민국 헌법전문은 두 가지를 명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정신이 3.1운동정신과 4.19혁명정신이라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것입니다. 저는 4.19때 대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하여 당시 경무대까지 달려가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왜 저희들은 4.19혁명을 일으켰습니까? 자유당독재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전제하고 “김재규 장군은 왜 10·26거사를 하였나요?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40년 전 김 장군은 법정에서 시종일관 10·26사건을 일컬어 ‘민주회복국민혁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 만약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민주주의, 자유, 인권, 심지어 자유로운 선거가 언제쯤이나 가능했을까요? 그럼에도 아직도 10·26과 김재규 장군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10·26영령들에 대한 합당한 명예회복이 주어지지 않고 있음은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장군의 말대로 10·26의 결행은 성공했습니다만 열망했던 혁명과업수행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김 장군은 5·16이후 18년 동안 들어찬 쓰레기를 설거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10·26이후의 혼란을 염려하셨습니다. 김 장군의 걱정대로 10·26사건 재판도중에 12·12쿠데타가 일어나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지 못한 채 자유민주주의는 다시 동토에 묻혔던 것입니다”면서 “지금 대한민국 현실을 보면 김 장군이 원력보살로 거듭나 이 땅을 지켜줘야 합니다. 박정희 시대의 18년을 청소하기는커녕 12·12쿠데타로 그 후 전두환, 노태우 시대의 14년을 더하여 32년간 소위 군사문화가가 이 땅을 경작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아직도 3공은 물론 5·6공의 부라퀴들이 이 나라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고 지적했다.
안 변호사는 추모사의 결론 부분에서 “김 장군과 저는 같은 불자입니다. 접견 시마다 많은 불교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통일삼국시대의 시대정신인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에 관해서도 토론했습니다. 자기의 견해만이 맞는다고 하는 아만과 집착에서 벗어나 부정과 긍정의 극단을 버릴 때 자유자재한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소통부재의 혼돈, 혼란의 시대에 ‘화쟁사상’이야말로 ‘더불어 살고 나누며 사는’ 이 시대를 꿰뚫는 진정한 화두(話頭)입니다. 사랑하는 10·26영령이시어! 우리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켜내고 북녘에도 자유와 민주와 박애의 깃발이 휘날릴 때 김 장군이하 영령들은 하늘에서도 기뻐하며 한반도의 호국영령으로 길이 빛날 것입니다”고 덧붙였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 장군이야말로 확실하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가져오게 한 장본인”이라며, “민주정부에서 김장군을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게 안타깝다”고 추모사를 했다.
김재규 장군은 옥중수기에서, "이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저항이며, 정보판단에 의하면 곧 전국 5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보고해도 대통령은 믿지 않았다", "대통령은 부마사태는 신민당의 조작에 의하여 그런 것이며, 좀 더 정확히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을 죽여도 까닥 없는데, 데모대원 1-2백만 정도 죽여도 걱정 없다’는 말에는 솔깃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을 목전에 두고 더 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었습니다."라며 독재자 박정희를 척살해야 했던 이유를 밝혔다.
다음은 10.26 재평가와 김재규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가 정리-발표한 '10.26 의인들'의 약력’이다.
▲박 흥 주 • 1938년 출생 평남 평원군 출생 •서울고등학교, 육사18기 • 1978년 육군대령진급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 1980년 3월 16일 순국
▲박 선 호 • 1934년 출생 경북 청도 출생 • 대구 대륜고등학교, 해병간부16기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유 성 옥 • 1943년출생 고양중 71년 궁정동 차량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김 태 원 • 1947년 출생 강문고등학교 졸업 • 1976년 궁정동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이 기 주 • 1948년 출생 부천 범박동 출생 시온고등학교 졸업 • 1975년 궁정동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다음은 안동일 변호사의 추모사 전문이다.
-10·26의거의 참 뜻, 역사의 재평가를 기다리는 의인 김재규와 그 부하들
먼저 39주기를 맞는 김재규 장군을 비롯한 여섯 분의 10·26영령들을 추모하며,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뜻있는 여러분께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10·26 사건 재판에서 1심은 김재규·이기주·유성옥의 국선변호인으로, 2·3심에서는 강신옥 변호사등과 함께 사선변호인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지인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10·26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은 변호사로서 해야 할 일이겠지만, 왜 지금까지도 그 사람들의 추모식에 참석해서 추모사를 하느냐?” 특히 최근에는 주위에서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옥중에 있는 마당에 김재규의 추모에 왜 나서느냐?”는 말을 건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10·26 의거의 진정성을 나는 믿는다. 10·26이후 신군부 쿠데타정권아래서 10·26의 참 뜻이 훼손되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김재규 장군과 그 부하들의 10·26의거가 재평가되고 명예회복이 되어야 한다.”
제가 40년 전인 1979년 12월 11일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된 후 재판부의 허락을 받아 그 날 늦은 밤에 육군교도소에 가서 김재규 장군을 처음 접견하기 전까지는 저 역시 일반인들처럼 중정부장을 유신정권의 제2인자로서 유신독재와 인권탄압의 괴수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민주주의회복을 위해 의거를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대면해서 만나보고 나서야 그의 애국충정과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김장군의 진정성, 과연 10·26의거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추모식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처럼 대한민국 헌법전문은 두 가지를 명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정신이 3.1운동정신과 4.19혁명정신이라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것입니다. 저는 4.19때 대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하여 당시 경무대까지 달려가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왜 저희들은 4.19혁명을 일으켰습니까? 자유당독재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재규 장군은 왜 10·26거사를 하였나요?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40년 전 김 장군은 법정에서 시종일관 10·26사건을 일컬어 ‘민주회복국민혁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 만약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민주주의, 자유, 인권, 심지어 자유로운 선거가 언제쯤이나 가능했을까요? 그럼에도 아직도 10·26과 김재규 장군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10·26영령들에 대한 합당한 명예회복이 주어지지 않고 있음은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재규 장군을 비롯한 여섯 분의 영령이 가신지 39년.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대한민국은 아직도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 정파 간, 남북 간의 갈등과 대립이 날로 심화되면서 혼돈, 카오스 그 자체입니다. 이 혼돈을 바로 잡는 유일한 처방은 이 나라 국시인 자유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길뿐이라고 이미 40년 전에 김 장군이 법정에서 외쳤던 것입니다.
1979년 12월 18일 김 장군은 1심 최후진술에서 ‘10·26민주혁명’의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 첫째는,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입니다. 둘째는, 국민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셋째는, 궁극적으로는 적화방지에 목적이 있습니다. 넷째는, 혈맹이요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국제적으로 독재국가라는 나쁜 이미지를 씻고 국제사회에 이바 지하여 이 나라 국민과 국가의 국제사회에서의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입니 다. 그런데 이 모두가 10·26혁명의 결행으로 해결이 보장되었습니다. ”
김 장군이 이렇게 10·26의 참 뜻을 밝혔음에도 일부 진영에서 이를 잘못 오도하거나 왜곡하는 행태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래 전에 문영심 작가님이 ‘김재규 장군 평전’을 집필하실 때 제 사무실에 오셔서 인터뷰하는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10.26이후 양김 등 대부분 정치인들은 김재규 구명운동에 나서지 않았는데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정치인들은 당시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선거에 대비해서 박정희 추종세력의 표를 의식한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김재규 장군의 재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이러한 연유가 아닐까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문재인 정부 아래서도 2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재평가에 대한 아무런 기색이 없어 보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10·26의 재평가와 김 장군 등 의인들의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뜻에서 노무현 정부시절인 2005년에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를 발간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재작년에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라는 책자를 다시 출간했음에도 아직도 재평가에 대한 소식은 묘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년 추모집회를 하고 백방으로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재평가의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사육신(死六臣)의 신원(伸寃)도 200년을 넘어서 이루어진 역사를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김 장군의 말대로 10·26의 결행은 성공했습니다만 열망했던 혁명과업수행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김 장군은 5·16이후 18년 동안 들어찬 쓰레기를 설거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10·26이후의 혼란을 염려하셨습니다. 김 장군의 걱정대로 10·26사건 재판도중에 12·12쿠데타가 일어나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지 못한 채 자유민주주의는 다시 동토에 묻혔던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현실을 보면 김 장군이 원력보살로 거듭나 이 땅을 지켜줘야 합니다. 박정희 시대의 18년을 청소하기는커녕 12·12쿠데타로 그 후 전두환, 노태우 시대의 14년을 더하여 32년간 소위 군사문화가가 이 땅을 경작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아직도 3공은 물론 5·6공의 부라퀴들이 이 나라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3당합당’과 김대중 정부의 ‘DJP연합’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도 여기에서 비켜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일제 36년의 잔재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어 여태껏 과거사 청산의 이슈로 떠올라 있는 것처럼 군사문화 32년의 유산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더욱이 북한의 핵개발과 3대 세습독재, 인권탄압은 세계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남북정상회담, 북미회담을 통하여 한반도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지만 최근 북의 태도를 보면 성과가 이루어지려면 요원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의 분발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39년 전 오늘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김 장군을 비롯하여 다섯 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여기 이 자리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있었습니다.(박흥주는 군인신분이어서 군법회의법상 단심으로 끝나 대법원판결이 확정되기 전인 1980. 3. 6. 총살형으로 집행됨.)
김 장군은 사형집행당시 모든 의전절차를 고사하고 짧게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간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두 마디만을 말했으나 그 전 날 육군교도소에서 녹음기로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사건으로 1심에서 3심까지 재판을 받았지만, 또 한 차례 재판이 남아있다. 이것은 하늘이 하는 재판이다.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없다. 하늘의 심판인 역사의 4심에서는 나는 이미 승리자이다. 내가 목적했던 민주회복국민혁명은 성공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회복되고, 보장된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김 장군과 저는 같은 불자입니다. 접견 시마다 많은 불교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통일삼국시대의 시대정신인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에 관해서도 토론했습니다. 자기의 견해만이 맞는다고 하는 아만과 집착에서 벗어나 부정과 긍정의 극단을 버릴 때 자유자재한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소통부재의 혼돈, 혼란의 시대에 ‘화쟁사상’이야말로 ‘더불어 살고 나누며 사는’ 이 시대를 꿰뚫는 진정한 화두(話頭)입니다.
사랑하는 10·26영령이시어! 우리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켜내고 북녘에도 자유와 민주와 박애의 깃발이 휘날릴 때 김 장군이하 영령들은 하늘에서도 기뻐하며 한반도의 호국영령으로 길이 빛날 것입니다.
39주기를 맞아 10·26영령들의 뜨거운 충절과 고귀한 뜻을 추모하며 극락왕생을 축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2019년 5월 24일 안동일(홍익법무법인 고문변호사, 동산불교대학 명예이사장)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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