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임시정부의 초창기 파란은 어디서 기인된 것인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6/29 [14:00]

상해임시정부의 초창기 파란은 어디서 기인된 것인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6/29 [14:00]

[플러스코리아=안재세 역사전문위원]전 민족적인 항일만세운동으로 독립을 표방한 이후 급속히 결속된 민족독립의 의지는 크게 강화되었고, 그러한 정세에 힘입어서 빨리 임시로라도 민족을 대표하는 정통성 있는 정부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미 전 민족적 의지를 모아서 세계만방에 독립을 선언한 이상 독립된 민족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차 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제에 대해서, 같은 연합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같은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나 공산혁명이 일어났다는 러시아조차도 일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눈치만 살피는 판이었기 때문에, 대한국인들의 임시정부는 설 자리조차 마땅치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임시정부의 설립을 추진한 것은 이미 이상설이 주도하여 최초의 망명정부 역할을 했던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한 경험이 있었던 연해주의 애국지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후를 이어서 서울과 상해에서도 각각 임시정부 수립이 발표되었다. 만주와 노령의 애국지사들은 317일에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박영효를 부통령으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임시정부조직을 발표하였는데, 박영효를 부통령으로 추대한 사실로 볼 때 갑신정변 등으로 친일파로 낙인찍혔던 박영효가 나중에 광무황제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보인 애국적 활동이 대한국인들로부터 크게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 박영효를 다시 기용한 광무황제의 판단력에 가히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48일에 상해에 전달된 서울임시정부(한성임시정부)의 조직은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하고, 국무총리총장 이동휘, 내무부총장 이동녕, 외무부총장 박용만, 기타 노백린이시영신규식김규식문창범안창호유동열박은식현상건신채호현순조성환박찬익이범윤 등 쟁쟁한 광복운동가들이 거의 망라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삼일광복투쟁 이전에 국외에 망명했던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집결했던 곳이 상해였고, 그 후로도 애국지사들이 빠른 속도로 상해로 모여들었으므로, 임시정부 수립의 실제적인 절차와 외교선전 활동은 자연스럽게 상해중심으로 되어 갔다. 안창호와 여운형 두 사람은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것보다는 일단 당() 조직으로 끝내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신중하게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빨리 독립된 정부를 만들고자 하는 열기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대세는 임시정부 수립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상해에서는 410일 오전 10시에 프랑스조계에 있는 임시 청사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를 의결하고 그에 의하여 국무원을 선거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였고 임시헌장을 정했다. 그 조직은 해외광복운동가들을 총망라하다시피 한 것이었으나 대체로 한성임시정부에서 정했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임시헌장 제1조에서는 정체를 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제로 채택하는 큰 이변이 일어났다. 1회 임시의정원의 회의기록 중에서 국체결정에 관여된 주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본원(本院) 명칭의 결정 : 410일 개회 벽두에 본회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 칭하기로 조소앙의 동의와 신석우의 재청으로 가결되니라.

 

임시정부에 대한 결의 : 410일에 임시정부에 대한 토의를 개시하기로 최근우의 특청(特請)이 가결되어 토의를 개시할 새, ‘본국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는 부인하자는 백남칠의 동의와 이한근의 재청이 유()하였으나 차()는 부결되고 본 문제의 토의가 장시간을 긍()하다가, 임시정부의 소재만 표명하고 관제(官制)와 국무원은 별()로히 의결하자는 조소앙의 동의와 재청이 가결되니라.

 

국호관제국무원에 관한 결의와 인선 : 411일에 국호관제국무원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자는 현순의 동의와 조소앙의 재청이 가결되어 토의에 입()할 새, ()히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칭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이한근의 재청이 가결되니라. ()에 관제에 입하여 집정관제를 총리제로 개()하자는 최근우의 동의와 이한근의 재청이 가결되고, 법무부와 군무부를 증설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백남칠의 재청이 가결되니라. 차에 국무원에 입하야 좌와 여()히 결정되니라.

 

. 국무총리는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승만으로 선거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조완구의 재청이 유한 후에, 신채호가 이승만은 전자에 위임통치 급() 자치 문제를 제창하던 자이니 기() 이유로 새 국무총리로 신임(信任)키 불능하다는 변론이 유한 후에, 국무총리도 별()로이 선거하자는 신채호의 개의와 한 진교의 재청이 가결된 후에, 이승만과 기외(其外)에 후보자 3인을 천()하야 투표하자는 조소앙의 동의와 이한근의 재청이 유하매 후보자 3인을 천하되, 방법은 구두 호천(呼薦)하여 이출석원(理出席員) 2/3의 가결로써 피천(被薦)케 하자는 최근우의 개의와 여운형의 재청이 가결되어 후보자를 호천할 새,

조소앙은 박영효를 천하여 부결되고신석우는 이동녕을 천하여 가결되고호천을 중지하고 기()히 피천된 인중(人中)에서 정식 국무총리를 선거하되 선거방식은 무기명 단기(單記)식 투표로 행하자는 조소앙의 특청이 가결되어 투표를 행한 결과로 이승만이 당선되니라.

 

. 내무총장은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선거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조 완구의 재청이 가결되니라.

 

. 외무총장은 김규식을 선거하자는 조소앙의 동의가 가결되니라.

 

. 재무총장은 후보자 3인을 공천하여 투표선거하자는 최근우의 동의와 여운홍의 재청이 가결되어 후보자를 호천할 새 신석우는 남형우를 천하여 가결되고 여운홍은 이대형을 천하여 부결되고 최근우는 김정호를 천하여 가결되고 손 정도는 최재형을 천하여 가결된 후에 투표를 행한 결과로 최 재형이 당선되니라.

 

. 교통총장은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인 문창범으로 선거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한 진교의 재청이 가결되니라.

 

. 군무법무 양부 총장의 선거방법은 재무총장 선거방법과 동일한 방법을 취하자는 신석우의 특청이 가결되어 선()히 군무총장을 호천할 새 신석우는 이동휘를 천하여 가결되고 조성환은 유동열을 천하여 가결되고 여운홍은 박용만을 천하여 가결된 후에 투표를 행한 결과로 이동휘가 당선되니라.

 

. 법무총장을 호천할 새 신석우는 이시영을 천하여 가결되고 한진교는 남형우를 천하여 가결되고 여운홍은 조소앙을 천하여 가결된 후에 투표를 행한 결과로 이시영이 당선되니라.

 

국무원 비서장의 설치결의와 급() 인선 : 411일에 국무원에 비서장의 직을 설()하고 인원을 선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현순의 재청이 가결된 후에 선거방식은 2인을 공천하여 투표 선거하자는 신석우의 특청이 가결되어, 신석우는 조 완구를 천하여 가결되고 현 순은 조소앙을 천하여 가결된 후에 투표한 결과로 조소앙이 당선되니라...

 

임시헌장의 의결: 411일에 임시헌장을 기초 토의할 새 심사위원으로 신익희이광수조소앙 3인을 천하고 심사안을 30분 이내로 보고케 하자는 현순의 동의와 신석우의 재청이 가결되어 30분 후에 심사보고가 유한 후에 좌()와 여()한 개정(改定)이 유()하니라.

 

6조에 병역을 첨가하기로 한 신석우의 동의와 현순의 재청으로 가결되고, 8조에 구황실우대조건에 대하여는 일생이라는 기간을 삭제하기로 조완구의 동의와 조소앙의 재청으로 가결되니라. 우와 여히 개정이 유한 후에 임시헌장을 전부 통과하기로 가결되니, () 전문은 여좌(如左)하더라.

 

대한민국임시헌장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임시헌장의 채택과정에서 제1조와 제8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많은 논란이 오갔으며, 특히 일찍이 청년기부터 동생 여운홍과 함께 기독교에 심취하고 당시 크게 대두되고 있던 세계적인 사회주의 조류에 공감하고 있던 중년의 여운형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크게 이의를 제기했다.임시헌장의 제정에 앞서서 410일 밤 10시에는 우선 조직의 명칭문제가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이었으나 여운형은 을 조직하자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정부라면 체면을 유지해야 할 텐데 현재 형편으로는 체면을 유지하기가 곤란하고, 또한 정부라면 명의가 크고 무거워 운영이 곤란하다는 것으로 매우 현실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정부를 조직해야 민심강화와 항일명분이 크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정부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 다음 문제로 등장한 것이 바로 국호 문제였다.

 

여운형은 대한이라는 국호를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대한은 우리나라에서 오래 쓴 역사가 없고, 조선말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하여 대한국호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것이었고, 다수결에 의하여 대한이 채택되었다. 또한 대한은 대한국의 대한’, 즉 일제에 빼앗긴 국호(일제는 강제합병 후 조선으로 국호를 변경시킴)이므로 다시 찾아 독립하겠다는 의의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감정이었던 것이다. ‘민국명칭에 대해서는 대체로 중국이 혁명 후에 새롭고 혁신적인 뜻으로 민국을 쓰고 있으니 이를 따르자는 의견이 다수결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한국을 광복하겠다는 명분을 더욱 확고히 하려면 이민족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신해혁명의 기본적 성향과는 그 본질이 다른 우리 민족의 혁명여건을 참조해서, 차라리 신한혁명당이 시도했듯이 국체를 입헌군주제로 보존하고 발전시켜 가는 것이 더욱 타당성이 있었을 것이나, 임시정부가 위치한 상해의 입지여건상 중화민국 측의 정세를 참작해야만 하는 필요성(, 물심양면의 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에서 중화민국의 예를 따르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여튼 친중파친소파친미파 또는 계몽주의자들이 절대 다수였던 임시의정원의 성격상, 입헌군주제 아닌 공화제로 의견이 쏠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운형은 또한 황실우대 조항에 대해서도 반대했는데, 그에 대해서 황실우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광무황제께서 돌아가신 후에 대한문 앞에 백성들의 곡성이 창일(漲溢)하였으니 아직도 민심은 황실에 뭉쳐 있다.”

는 현실적 근거를 제시했으나, 이미 모든 군주제를 타도해야 할 봉건잔재 정도로 경멸하고 있던 그는,

동지들은 대한문 앞 곡성을 잘못 들었다. 망국의 울음을 아무 때나 울면 잡혀 갈 처지였기에 참고 있다가 핑계 김에 기회를 얻어 운 것이요, 황실 그 자체를 생각한 울음이 아니었다.”

고 강변하며 황실우대를 끝끝내 반대했다.

그러나 아직은 황실을 폐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황실우대 조항만은 형식상으로나마 간신히 남게 되었다. , 대부분 계몽주의운동 출신자들로 구성되었던 임시의정원 구성원들의 성격상 임시정부의 국체가 제국이 아닌 민국으로 낙착되기는 했으나, 본토에서 벌어진 삼일광복투쟁의 대중적 정서가 여전히 제정의 대한국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당시 임정추진자들의 보편적 인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대표자를 선임하는 사항이었는데, 신석우가 이승만이 적임자라는 의견을 내 놓자 신채호는,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하고 통박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사실 여부를 잘 알아보기도 전에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지 않은가?”

하고 말하자 신채호는 크게 노하여,

너희 같은 더러운 자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

고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몇 가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결국은 미국 정부에 위임통치를 청원하고 다니던 외교제일론자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에 취임함으로써 임정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워지게 되었다.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여러 애국자들 중에서도 끝까지 광무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망명정부 수립을 추진했던 이회영은,

정부라는 조직을 만들 경우 그 구성원들 사이에 허영과 지배욕으로 말미암아 권력다툼 등이 일어나므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아가는 데 적합하지 않다

고 상해임정의 앞날을 예언하는 듯한 주장을 했는데, 그의 주장과 무관하게 상해임정이 성립되고 말자 그는 같은 해 5월 중순에 북경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인 이정규이을규신채호정현섭 등과 자주 회합을 가진 후, 4256(1923) 말엽부터는 무정부주의 이론에 따른 새로운 대한국의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 안창호는 미국에서 삼일운동에 관한 보도를 접한 후 만주와 노령의 교포들을 조직하고 산업과 교육을 장려하여 다음 기회에 확실하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운동을 하려 함. 그가 홍콩을 거쳐서 상해로 간 것은 이미 상해임정의 조직이 발표된 직후인 4월 중순이었는데, 당시 상해임정에서 국제정세를 낙관적으로 판단한 것과는 달리 그는,

빠리평화회의와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호기가 아님은 아니다. 그러나 첫째로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을 물리칠 실력이 미비하고, 둘째로 일본은 이번 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민족자결원칙 적용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운동(삼일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자주독립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세계에 표시하는 데 그칠 것이다. 독립의 목적을 이번에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처음에는 임정에 참여하기를 극구 사양함.

 

* 이승만은 미션스쿨인 배재학당에서 수학한 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4232(1899)에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독립협회의 공화국건설 음모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4236(1903)예수교가 대한(大韓) 장래의 기초라는 글을 신학 월보에 투고함. 다음 해에 광무황제의 특사로 풀려난 후 미국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그는 미국에 남아서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여 장로교 세례를 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유학동기를,

짐승 같은 저열상태에 빠져 있는 대한국인의 도덕수준을 기독교에 바탕한 국민교육을 통해 향상시키는 데 있다.”

고 고백하고 평생을 기독교 선교 교육에 헌신할 것을 다짐함으로써, 유구하고도 주체적인 민족사 및 민족전통과의 결별을 시사함. 민족사 및 민족전통에 대한 자긍심이 결여되어 있던 그가 외교제일론자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음.

그는 4252(1919) 74일에 미국에서 발표한 대통령선언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기도 함.

슬프다. 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는 곧 저맨(German) 황제의 일패도지한 근원이라. 유럽과 아메리카 열국이 이 만습(蠻習)을 타파하고 공화 신세계를 성립키 위하여 고금에 처음 있는 대혈전으로 저맨 군사를 꺾어 뉘고 평화를 강구하는 중이라. 이 고대 유습을 유럽에서 저처럼 몰아내었거늘 아시아 주에서만 횡포를 방종하리오. 이는 거세가 허락지 않을 지며, 공리가 용납지 않으리라.”

 

, 미국이야말로 야만을 타파하는 최선진적 정치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미화하고, 미국도 깊이 관련되어 있던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는 등, 그의 전공이었던 국제법이나 정치학에서 이미 익혔을 국제정치학의 마키아벨리즘적인 현실에는 한쪽 눈을 감고서, 흡사 미국의 골수파 국수주의자와 다를 바 없는 성향을 보임. 이처럼 역사적 정통성 있는 민족정서와는 담을 쌓기 시작한 이승만이 그와는 정반대로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대종교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하고 있던 상해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된 것은 대단히 기묘한 사건이 아닐 수 없으나, 당시 대종교 지도층의 다수 또한 공화제를 선호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짐.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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