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97)- 상해임정, 잘못 끼운 첫 단추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7/05 [08:40]

대한정통사(97)- 상해임정, 잘못 끼운 첫 단추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7/05 [08:40]

임시의정원에서 공화제가 채택된 것은 4250(1917)에 소위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어 많은 논란이 활성화되고 있던 계몽주의적 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볼 때 이미 예고되고 있었던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분위기에다가 광무황제께서 독살당한 후 일어난 삼일광복투쟁의 여파로 해외 임시정부가 추진되면서, 비록 국권을 강탈당하기는 했으나 광무황제의 정통을 이어 받은 융희황제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새나라의 국체로서의 민주공화제가 정면에서 거론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정치체제를 공화제도로 하자고 처음 동의(動意)한 인물은 상당한 재산가로도 널리 알려 졌던 신석우였다. 신석우는 그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요인들의 인선 과정에 있어서도 상당한 발언권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한국 민중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을 공화제를 주장한 속사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경유학생 출신으로서 유학 당시 접했던 서양문물에 탐닉한 때문이 아닌가 - 하는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또 일차대전이 연합국 측의 승리로 끝난 당시의 국제정세 하에서, 미국프랑스영국 등 민주주의를 표방한(실제로는 식민제국주의) 국가들이 승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외 광복운동가들과 광무황제까지도 철석같이 믿었던 독일이 패전하면서 공화국으로 탈바꿈되어 갔고, 러시아에서도 공산혁명에 의하여 이미 제정이 파괴된 상태였던 점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연합국 중에서도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과 아시아의 최강자이던 일본은 여전히 입헌군주제를 표방하고 있었던 점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일본이 군주제니까 우리는 미국 등 공화제적 열강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도 공화제를 채택하는 게 낫겠다는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누가 그들에게 유구한 역사민족국가의 정체를 단 한 번의 회의에서 멋대로 바꾸어 버릴 권한을 주었단 말인가? 한일합방에 의하여 나라가 없어졌다는 주장이나 융희황제가 황제자리를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일제가 시종일관 주장했던 것이지, 대한국인들은 그러한 왜구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줄곧 항일투쟁을 전개해 왔던 것이며, 삼일광복투쟁 자체도 대한국이 여전히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독립만세운동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대한국은 여전히 유효한 나라이며 대한국의 황제도 여전히 대한국의 실질적인 대표주권자이므로, 정체를 바꾸려면 전체 국민의 의사를 묻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융희황제의 밀지라도 받았어야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삼일광복투쟁을 계기로 새로운 주체 세력임을 자부한 망명인사들에 의하여 수립된 상해임정은, 경술국치 당시에 대한국의 정부요인들이 망명해서 만든 노령의 대한광복군정부와 같은 정통성 있는 망명정부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국치 후 9년이나 지난 시기에 전통적인 군주제가 아닌 낯선 외래 문물로서의 공화제를 채택한 신생 대한민국정부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비록 일제의 강점 하에 놓여 있기는 해도 엄연히 대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주권자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를 깨끗이 무시해 버리고 서양인들 자신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민주공화제를 하겠다고 정체를 바꾸어 버림으로써, 광복운동 전선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성립 초기부터 이미 보이지 않는 균열이 커다랗게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광복의 진정한 의미가 강탈당한 옛 민족사회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있다면, 유구한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군주제를 일거에 포기함으로써 임정의 민족해방운동은 광복운동이 아닌 단순한 민족독립운동의 범위를 벗어나기가 어렵게 되었다. , 구체제를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체제로 탈바꿈한 새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해방투쟁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정통성 계승에 있어서의 심각한 문제점은 국제법상의 점을 노출하고 말았고, 그 후 상해임정은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한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과 2, 3개국으로부터 형식적인 승인밖에 받지 못함으로써, 차후의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할 소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여하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상해임정은 413일자로 내외에 독립정부의 성립을 선언하고 빠리에 가 있던 김규식에게도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의 신임장을 발송하였다. 김규식은 512일에 장문(長文)으로 된 독립청원서를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족과 국민을 통합한 대표신한청년당 정식대표 김규식의 서명으로 빠리강화회의에 제출함으로써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한 상해임정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는 묘하게도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레닌영도 하의 쏘비에트 연방이었다.

 

임정요인들의 간절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서구국가들과 미국은 일제와의 관계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계속 인식하고 있었던 탓인지 임정승인에 대단히 인색하였다. 이미 그들이 잘 소화시킬 수도 없는 공화제를 표방한 임정 중심의 광복운동가들 중 많은 인재들이, 공화제와 마찬가지로 그 본질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공산주의를 표방한 레닌에게 기울어졌던 것도, 그러한 냉혹하기만 한 국제 정세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시작에서부터 그처럼 광복운동의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 상해임정은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주의 주장이 난무할 소지가 마련되어 파란만장한 앞날이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역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오세창 교수(영남대학교 문과대학), “엄밀한 국제법상 견지에서 볼 때 임시정부는 동일한 국가(, 대한국)의 계속이 아니므로 망명정부는 될 수 없다고 함.

  또한 사전적(辭典的) 정의에 따르면 임시정부란

  ‘국내헌법에 따른 적법(適法)한 정부가 아니며 국제적으로도 국가를 정당하게 대표할 자격이 없는 사실상의 정부 또는 가정부(假政府)’

로 되어 있음(동아출판사,새국어사전;1989.1.10).

   이처럼 기묘한 임시정부의 위상은 결국 2차대전 종료 때까지 어떠한 우방으로부터도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빚음.

 

* 상해임정은 국내인사들에게 가정부(假政府)’로 인식되기도 함.

() 군정부(軍政府)는 노령에 있어서 상해 가정부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정부의 통일 상 불편함이 적지 않으므로 영구히 이 상태로 둘 수는 없다. 조만간 가정부는 노령으로 이전하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온화한 수단으로써 도저히 독립의 소지를 관철할 수 없게 되었다. 무력으로 해결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고로 가정부의 해산과 같은 것은 오인의 운동에 하등의 장해를 주지 않는다.

   종래 가정부의 일부에는 온화파가 있어서 무력운동이 불가하다 하고 가정부의 노령 이전(移轉)에 반대하는 자 있었지만, 이번의 해산 명령에 의해 온건파도 크게 깨달은 바가 있을 것이므로 노령 이전의 시기를 앞당기고 금후에는 무력적 활동에 의하여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19191024일자로 프랑스조계 관헌의 명령에 의하여 상해임정이 해산되었다는 소문에 대한 국내 지식인의 반응)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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