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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98)-대한제국 체제광복 투쟁과 청산리의 모병권(募兵卷)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7/21 [14:39]

대한정통사(98)-대한제국 체제광복 투쟁과 청산리의 모병권(募兵卷)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7/21 [14:39]

 

▲ 청산리 봉오동 대승리의 주역 홍범도와 독립군     © 편집부

 

대한제국 체제광복 투쟁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공화주의자들이 광복운동에 있어서 대체로 평화적 해결방식이나 외교적 해결방식 등의 가망성이 희박한 수단에 매달리는 데 주력했던 데 비하여, 태평시대의 옛 제도를 최우선적으로 복구한 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아가기를 희망했던 이른바 보황주의자(保皇主義者=입헌군주론자)’들은 주로 목숨을 건 무력항쟁에 전력투구하였다. 충군애국의 대의명분에 투철한 올곧은 선비인 유인석 의병장을 위시하여, 그의 문인(門人) 내지 제자였던 수많은 선비들이 빼앗긴 대한국의 광복을 위해 총을 들고 나섰던 것이다. 국치 이후 서간도로 망명길을 떠난 그들은 각각 보약사(保約社;유인석 중심)농무계 및 향약계(農務契鄕約契;백삼규, 전덕원 중심)포수단(砲手團;조맹선 중심, 이진룡홍범도윤세복차도선 등 규합) 등을 결성한 후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그들은 항구적인 광복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하다가, 삼일광복투쟁 이후 서간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보다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광복투쟁을 위하여 각 단체들을 통합해 갔다. 4242(1919) 415일에는 각 단체 대표들 및 기타 의병계열인사 약 560여 명이 회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했는데, 그 대부분은 황해도와 평안도의 의병 출신이었다.불과 1년도 안되어 서간도의 9개 현과 황해도평안도 지역 80여 군데에 지단(支團)을 설치하며 활발한 활동에 돌입한 그들은, 군자금 모집독립군 양성무장투쟁의 세 방향으로 광복운동을 전개해 갔다. 그들은 일제의 방해 책동과 일제주구 밀정의 암약 등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대한국 광복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전덕원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보황주의적 광복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유인석 의병장의 제자였던 평안북도 용천군 출신의 전덕원은 스승의 사상을 올곧게 물려받아서 구국항쟁의 뜻을 소싯적부터 굳게 지니고 있었다.광복에 대한 유인석의 생각은 명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즉 그는,

광복의 의로움은 다만 국가를 광복하는 것만 아니라, 국수(國粹=애국혼)를 광복하고, 강상(綱常=유교적 사회질서)의 대륜(大倫)을 광복하여, 그 국치(國治=나라를 다스리는 법도)를 유지하려는 것이므로, 충군애국하는 바을 잊어서는 안 된다.”

는 신념 하나로 일관했던 것이다. 스승의 방침에 완전히 공감한 그는 을사늑약이 알려지자 곧 상경하여 늑약의 파기를 위해서 각국 공사들에게 격문을 발송하는 등 동분서주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4239(1906) 4월에 74세라는 고령과 노환에도 불구하고 의병봉기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리고 의병을 모집하던 최익현의 휘하에서 소모장(召募將) 역할을 맡고 고향에 돌아 왔는데, 이 무렵에 광무황제가 손수 써서 비밀리에 하사한 의병대원증을 받아서 평생토록 소지하게 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향에 돌아온 전덕원은 사재를 몽땅 털어 평북 강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제에 항거했으나 4239(1906)에 평양에서 체포당했다. 같은 해 11월에 국사범으로 15년의 유형을 선고받은 그는 황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었다.위정척사의 대의명분에 투철했던 그는 근황정신(勤皇精神)을 견지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스승인 유인석 의병장의 예를 따라서 상투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 후 강제합방이 일어나자 그는 4245(1912)에 서간도로 망명해서 관전현집안현 등을 전전하며 국내진공작전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광복전쟁을 치루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여러 동지들과 함께 환인현 등지에서 농무계(農務契)와 향약계(鄕約契) 등을 조직했는데, 계는 동포들의 자치기구이면서 또한 광복운동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는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수년간 준비를 다지고 있던 중 삼일광복투쟁이 일어나자 그는 본격적인 광복전쟁을 기획하여 각 지방에 흩어진 채 각자 광복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여러 단체들을 규합해서 4252(1919) 415일에 통합체인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였는데, 그것은 서기 1920년도 초반에 서간도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단체들 중 가장 대표적인 무장투쟁단체였다. 대한독립단은 지속적인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면서 일제기관들과 친일기관 등을 파괴하고 밀정들을 제거하는 등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서기 1920년도 초에 대한독립단도 상해임정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해방 후에 건설할 나라의 청사진에 대해서 두 갈래로 의견이 분열되고 말았다. , 전덕원을 비롯한 보황주의자들로 구성된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단군기원 또는 융희연호 사용)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상해임정에서 정한 대한민국연호 사용)으로 나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단체 간에는 별다른 적대적 행위도 없었음은 물론, 상호 협조 하에 광복투쟁을 전개해 갔다.

 

전덕원은 기원독립단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서간도 지역의 다른 광복운동단체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서기 1920년도 후반에 이르러서 국내진공작전이 활발히 전개되자 왜구들은 간도에 출병해서 대한국인의 마을을 초토화하고 광복운동가들을 마구 학살했으나, 전덕원 등 기원독립단원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환인현에 본부를 두고 계속해서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했다.

 

그러한 정세 하에서 4255(1922) 2월에는 서간도에서 기원독립단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통합해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했는데, 전덕원은 경무감이 되어 만주 한인사회의 치안유지를 위해서 노력했다. 그런데 대한통군부가 4255(1922) 8월에 확대되면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개편되자 그는 참모부 감독에 임명되었으나, 기원독립단의 간부들이 주요 보직에 임명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해임정의 공화제를 옹호하는 양기탁을 지지하는 신진 인사들과 심각한 의견대립이 발생하여 취임을 거절하였다.

 

상해임정의 공화제 노선에 실망하고 분노한 전덕원은 이윽고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통의부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고, 이에 대응하는 공화파와 교전까지 벌인 끝에 전덕원파가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후 다시 공격해 온 공화파와 교전하는 등 동족상잔의 위기가 벌어졌다. 이에 전덕원 등은 4256(1923) 2월에 대한통의부를 탈퇴하고 따로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했고 여전히 융희연호를 사용했다. 그러한 전덕원의 노선을 따르는 동지들이 급격히 늘어 갔으므로 의군부의 세력은 점차 커져서, 나중에는 대한통의부가 관할하던 각 지방까지도 관할하게 되었다. , 적어도 만주지방의 무장투쟁 선구자들에게 있어서 공화제는 별 인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3,000여 명에 이르는 광복군을 거느린 의군부는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히 수행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왜구들과의 전투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공화파들의 습격을 받아서 많은 동지들이 피살당하고 모금했던 군자금 및 무기의 전부를 탈취당함으로써 전덕원은 구금당하고 의군부는 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4253(1920) 가을에 청산리에서 왜구 3개 사단을 상대로 전쟁을치러3,000여 왜구들을 지옥으로 날려 보낸 북로군정서의 총병력이 1,500여 명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전덕원 휘하의 3,000여 병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대한국 회복의 한결같은 염원에 불타서 목숨을 건 국내진공작전에 몰두했던 전덕원 휘하의 의군부를 습격하여 파멸시킨 대한통의부 공화파들의 범죄적 오판은, 그 후 만주지방에서의 광복투쟁이 한 때 중심을 잃고서 지리멸렬해지는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등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실로 상호무력에 의한 대규모 동족상잔의 효시라고나 할 만한 한심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대한통의부에서는 비록 전덕원의 무력적 근거를 모두 접수해 버리기는 했으나, 전덕원의 혁혁한 전공을 참작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서 석방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전덕원은 그동안 목숨을 걸고 쌓았던 광복투쟁의 무력적 기반을 몽땅 잃은 자신의 처지에 실망할 겨를도 없이 그 후에도 계속 광복운동에 전념하다가, 4260(1927) 2월중에 압록강하구에서 왜경에 체포당하여 재판을 받고 12년간 징역을 치렀고, 석방된 후에도 쉬지 않고 광복운동에 전념하다가 다시 체포당하여 끝내 비참하게 옥사당하고 말았다.

 

전덕원은 광복투쟁에 있어서의 사상적 분열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여, 초지일관으로 황제에 의하여 영도되는 대한국의 부활을 염원했던 위대한 광복투사였다. 상해임정이 임의로채택한 공화주의의 여파는 단일화되어야만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광복투쟁노선의 어처구니 없는 분열과 동족상잔마저도 초래하는 부작용을 결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 전덕원 선생. 사진=박환자료실(https://p.kimsaem.net/sajin/5320)     © 편집부

 

 

청산리의 모병권(募兵卷)

 

청산리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던 김좌진 장군은, 일본을 물리칠 광복투사들을 모집하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대단히 특색 있는 모병권을 사용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모병권 내용 : (한겨레신문 서1996.8.15. 3면 참조)

 

통순화기

본호령 재백두산천지남 좌남향 북개설병둔 만한조선장정 훈련 항왜지계 대한제사고자서 불치 신인천관위기

백야 김좌진장군 모병권이라

(通順和記

本號令 在白頭山天池南 坐南向 北開設兵屯 滿漢朝鮮壯丁訓練 抗倭之計 大韓帝 賜顧者庶 不致 愼認天官爲記)

白冶 金佐鎭將軍 募兵卷이라

 

이와 같은 모병권의 내용은 두말할 것도 없이 김좌진 장군의 모병 권한이 대한제(大韓帝)로부터 나온 정통성 있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곧 애초에는 헤이그밀사 일행 중 한 명이었다가 중도에 귀국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는 김좌진 장군이, 시종일관하게 근황정신에 충만하여 광복군을 모집하고 훈련시켰음을 증거하고 있다.또한 황제로부터 명받았음을 알릴 때 더욱 효과적으로 근황정신이 투철한 의병출신자 등을 규합하는 모병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자료라고도 할 수 있다.

 

* 전덕원은 계행건임순채김선팔김두섭장달빈김상욱 등 여러 의사(義士)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선천철산의주 등지로 끌려 다니며 갖은 고생을 하다가 석방되었으나, 다시 임영수임양래 등과 무기를 준비하면서 외국의 구원을 얻어 활발한 대항을 해 보려고 시도하다가 다시 체포당하여 황주의 쇠섬으로 유배당함.

 

* 간도의 독립군은 의병전쟁의 주역이던 유림농민대한국군이 주도하는 가운데 군사적인 승리만이 민족해방의 유일한 길이라 믿었고, 강력한 황정의 회복이야말로 민족해방투쟁에 있어서 노선의 분열과 혼란을 막는 첩경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음. 공화제의 비현실성은 신해혁명으로 혼미를 거듭하던 지나 지방의 정치현실을 보더라도 명백했고, 상해임정의 분열로 미루어도 명약관화한 일이었음. 그 같은 간도독립군의 기본 노선은 당연히 공화제를 내세운 임정노선과 대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 일제의 비호 아래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던 보다 온건한 자치운동과도 상극을 이룸. 일제는 그러한 간도독립군을 가장 위협적인 항일노선으로 간주하고 4253(1920)에 간도대침략을 감행했으니(경신참변 등), 그에 의하여 간도의 교포 3만여 명이 학살당하고 6천여 가구가 소각당함. 그러한 참화를 당하면서도 간도의 독립군은 4258(1925)에 일제와 만주군벌 간에 삼시(三矢:미쯔야)협정이 맺어져서 만주 일대에서의 항일투쟁이 대폭 약화된 이후에도 전덕원의 예에서도 보듯이 생사를 건 치열한 광복투쟁에 몰두함.

 

* 상해임정에 호응했던 대표적 공화주의 독립운동단체 중 하나인 북간도지방의 대한국민회, 4253(1920) 2월에 임정이 독립군을 모집하려고 실시한 군적 등록령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기도 함.

대한국민회장 구춘선은 아 임시정부 군적등록령에 의하여 북간도 재류 동포에게 고한다동포여, 독립을 원하고 또 자유를 원한다면 독립전쟁의 군인이 될 것이며, 군인이 되려면 속히 정부의 군적에 등록할 것이다임시정부 밖에 서 있는 저들 복벽주의 단체 등의 군인이 되어 죽으면 아무 가치도 없고 아무 성공도 없다. 가치 있고 성공 있게 죽으려 하면 공화정부의 군적에 등록하여 공화정부의 군인이 될 것이다실로 독립을 위해 싸우려면 우리들은 일체 군무총장의 명령에 의하여 군적에 등록하고 총사령장관의 명령에 의하여 전장에 출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유인석 의병장으로부터 비롯되는 보황주의 계열 독립군들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복벽주의로 매도해 버리고, 그들에 대하여 대단히 배타적인 입장을 취했던 점은, 광복운동의 정통성 확립과 일관성에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음.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세종대왕님 한글창제 영화 국민 모두 봅시다 적극홍보합시 19/07/27 [15:44] 수정 삭제  
  세종대왕님 한글창제 영화 국민 모두 봅시다 적극홍보합시다 역사에 숨겨진 한글창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천만다행입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의 세종대왕님은 죽기전에 유생들의 반대도 무릎쓰고 유언으로 한글창제에 공이 많은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혜각존라는 긴법호를 내렷다고합니다 세종대왕님은한글창제후 한글활자로 처음 만든책이 불교책인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세종대왕님도 부처님 제자입니다 인터넷과 유튜브에서 신미대사 검색해 공부하고 역사도 영화도 평가바랍니다 세종대왕님 이순신 검색해서 공부하고 애국애민정신 실천합시다 영화 강추합니다 일본 불매운동 실천합시다 세종대왕님 대마도 정벌 이순신장군님 일본전 전승한 구국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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