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日本 神이 된 고구려 보장태왕 子'약광'

고구려인들은 일본의 철제.제지기술.기마문화 보급한 주역

윤복현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0/06/19 [00:06]

日本 神이 된 고구려 보장태왕 子'약광'

고구려인들은 일본의 철제.제지기술.기마문화 보급한 주역

윤복현 역사칼럼 | 입력 : 2010/06/19 [00:06]
<KBS역사 스폐셜> 제작진이 고구려 보장태왕의 아들 약광이 일본에서 신이 된 배경을 추적했다. 일본의 무사시 고마(高麗)는 1,300년전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태왕의 아들 약광(若光)이 1799명을 이끌고 와서 마을을 시작했다고 한다.그래서 고마현은 아직도 고구려의 이름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도시 이름부터 역이름, 학교이름, 신사 이름까지 고마(고구려)를 그대로 지키며, 아직도 매년 약광왕을 기리는 축제를 열고 있다고 한다. 일제 명치유신이후 고구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고마를 히타카시로 바꾸었으나 그 흔적은 아직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한다.
 

666년 일본에 건너간 약광(若光)은 716년 일본 무사시국 주변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던 1799명의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고려(고구려)군’을 건립하였다.
 

일본 사이타마현 히타카시(市)에 살고 있는 고구려 후손들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의 자손들로 당시 일본천황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716년 무사시(武藏)지방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고 약광을 초대 군수로 임명해 같이 망명한 1799명을 옮겨 살도록 했다.
 
 
이들 후손들은 26대까지는 고구려 자손끼리 혼인해 혈통을 이어 오다가 그 뒤 일본인들과 혼인해 지금은 거의 다 일본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다고 전통이 단절된 것은 아니다. 약광의 60대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는 아버지 '고마 스미오'씨의 뒤를 이어 '고마(고구려의 일본식 표기) 신사(高麗神社)'의 궁사(宮司)로 대(代)를 이어 오고 있다.

14세기 무로마치 바쿠후(幕府) 때 정권의 반대편에 가담했다 해서 박해를 받아온 고구려 후손들은 명치유신 뒤부터 한층 더 고난을 겪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을 없애버리기로 하고 고마군을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시켜 히타카마치로 부르게 했고 약광에 대한 제사도 금지시켜 '천황신'에게 제사지내게 했다. 히타카마치는1991년 사이타마현 히타카시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마 신사는 최근 일본 각계의 거물들이 이 신사를 참배를 하고 난 다음에 출세했다고 해, 일본인들에게는 출세 신사(出世神社)로 더 알려져 있으며 해마다 40만 명 이상의 참배객들이 찾아와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1799명의 고구려인 들은 세공, 직물, 철제 등 기술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철제 농기구를 도입하여 농작물 수확을 극대화시켰다. 고구려인들은 철제 도입뿐 아니라,일본인들에게 종이제조기술까지 전파했다. 물론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최초로 종이제조기술을 전해 주었지만 이를 일본지역에 대중화시킨 사람들은 고구려인들이였다.
 
관동지방으로 건너간 고구려인들을 중심으로 무사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무사집단의 시초이다. 무사집단의 형성이유는 고구려인의 철제기술과 말이었다. 장군산고분에서는 동완, 장식대도, 철제마주, 철제무기 등 많은 뛰어난 유물이 출토됐다.
 
 
이 유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들은 철갑무기와 말을 사용한 철갑기마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관동지역에 터를 잡은 고구려인들은 말을 길러냈고 이 곳은 준마의 명산지가 되었다. 훗날 발견되는 말등자, 철제마주, 고구려벽화에 등장하는 말의 깃대 등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일본의 기마문화 또한 유라시아 최강의 기마국가인 고구려인들에 의해 대중화된 것이다.
 

고마악(고려악高麗樂)은 고구려음악으로 550년에 일본으로 전해졌다. 고려악은 지나지역의 당나라 음악과 함께 일본 아악의 축이다. 30년 동안 일본 궁내청에서 활동하던 연주자 ‘시바 스케야스’ 씨는 최근에 자신이 고구려 제22대 왕인 안장왕의 후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직계후손 ‘고려 게이코’ 씨는 NPO(민간 비영리 단체)를 조직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고구려의 자부심을 길러준 아버지의 영향으로 마음속에 고구려를 품고 살아온 그녀는 <빛의 아들로 태어난 고추모는 평화의 세상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고구려 전설에 대한 콘서트를 전 세계적으로 열고 있다. ‘고려(고구려) 게이코’ 씨는 고구려가 자신의 운명이자 인생 자체라고 말한다. 또한 고려(고구려)사진공방의 대표 ‘아타라시 다스야’. 그도 고구려의 후손이다. 조상 때부터 1300년을 고려(고구려)에 거주한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방의 이름도 ‘고려사진공방’ 이라고 짓고 고려(고구려)를 지키고 있다. 그에게 고구려는 소중한 자신의 뿌리이자 자긍심이다.
 
이렇게 일본은 국가주의를 넘어서 한민족사속으로 들어 가면 핏줄을 통하여 한민족의 갈래로 만나게 된다.그리고 고대 마한과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4국 문화를 이해하려면 일본열도에서 찾으면 된다. 현재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일본문자를 만들어 준 사람은 백제의 왕인박사다. 한자에서 부수만 취해서 사용하고 있는 문자가 일본문자인 것이다.백제의 왕인박사는 일본인들에게 일본어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으며, 고구려어와 유사한 일본어의 뿌리는 부어언어다. 일본문명이나 정치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백제가 부여인들인 만큼 당연히 부여언어일 수 밖에 없고, 부여세력인 고구려언어와도 유사할 수 밖에 없다.

 
한반도와 연결되는 일본(니뽄)은 고대 한반도세력이 융합된 복합국가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백제(부여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일본이란 국호는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담로지역이였던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정한 국호다. 일본에게 있어 백제는 22개의 담로지역을 거느리고 아시아 해상무역을 독점하며 부국강병을 실현한 '큰 나라'라는 의미의 '구다라'로 문화를 전파해 주는 모국이요 정치적 상국이였다. 일본열도는 백제 성황이 일본천황을 겸임했듯이 백제황제들이 일본천황을 겸임하였고 백제황제들의 자제들이나 친척들이 일본황실의 주인노릇을 했다.그러나 일본은 멸망당한 모국 백제와의 모든 태(胎)를 끊고 비로서 독자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백제계 천무천황은 천황에 등극하자 마자 일본이라는 국호사용과 함께 담로로부터 일본역사가 시작되고 기술하고 있는[일본서기] 등 일본열도중심의 역사 편찬 작업을 한다 .
 
 
  ▲ [KBS영상자료]고대 일본이 구다라(큰 나라=대백제)라 추앙했던 백제 22담로의 비밀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서기』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日本書紀』「齊明天皇」).”라고 적고 있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 서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  
 
▲  전북 익산 입점리 백제 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왼쪽 위)과 일본 규슈 에타후나야마 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 기본 디자인이 거의 같다. 경북 현풍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지는 신라산 말안장(오른쪽 위)과 일본 오사카 후콘타고뵤야마 배총 고분에서 출토된 신라산 말안장 

현재 일본황실의 혈통은 백제황실이라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시절 고구려에 의해 백제가 항복을 당한 후 백제세력이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여 가야계를 몰아내고 일본왕실의 주인이 된다. 바로 야마토 왕조를 수립한 백제계 오우진 천황이다. 백제계이전에 일본왕실의 주인은 가야계다.가야계이전에는 아이누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일본열도를 지배한 마한계다. 일본의 태양을 주관하는 여신이 바로 마한계이고,'아주매'하면서 경상도사투리로 제사지내는 왕실이 가야계 왕실인 것이다.
 
일본열도로 이주한 신라계는 제사를 주관하는 신사문화를 주관하고, 가야계는 일본의 정치을 주관한다.신라.가야의 무사계급의 실체는 경주.김해에 적석목곽분을 남긴 북방초원세력은 모용씨를 시조로 삼는 선비족이다.
 
▲ 북방초원세력(선비족)의 머리풍습을 하고 있는 왜구
 
머리가운데 부분만 남기고 머리전체를 중처럼 다 밀어버린 일본무사들의 머리형태는 바로 북방초원세력의 풍습이다.일본열도로 이주한 선비족들에 의해서 그대로 전승된 풍습이다.보통 그런 일본무사들이 왜구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열도의 지배세력은 아이누족=>조선유민.부여.선비 등 북방의 기마세력들의 한반도남부유입으로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한 마한계=>가야.신라계=>백제계라 정리될 수 있다. 고구려 보장태왕의 아들 약광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처럼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유민들도 많이 이주하게 되었다.
 
▲  3신1체를 상징하는 한민족의 3태극과 고구려 삼족오
일본열도세력은 한반도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상실한 세력들로 한반도에 대한 원한이 강했으며, 백제계가 기록한 [일본서기]에도 기록하고 있듯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계가 한반도남부지역을 통합한 신라에 적대감을 극명하게 드러내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일본의 한반도침략 배경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한일관계는 결국 과거-현재-미래로 연결되어 있는 역사적 접근을 통하여 악순환을 단절하고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국가주의를 탈피하여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는 일본역사의 진실에 대해 겸허해야 할 것이며, 과거 조상의 무덤들이 존재하는 한반도침탈과 지배에 대해 사죄하고 피해배상을 해야 할 것이며, 한반도평화와 통일에 적극 협력하고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의 유지를 따르기 위해서도 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침략야욕을 버리고 미래지향적인 공존공생관계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이라면 통 크게 북한과 일본을 포용하여 공존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미국과 지나국,그리고 러시아는 한반도평화와 통일에 적극 협력하고 전쟁과 갈등을 종식하고 상호 공존번영하면서 간도.연해주를 강탈해 간 국제법적 부당성과 우리의 역사적 정당성을 통하여 우리의 고토를 회복할 수 있는 평화.다물외교노선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태양의 나라 통치자의 진정한 자격조건이다.
111 10/06/19 [12:05] 수정 삭제  
  서양인이 최초로 그린 조선(고려)인 그림. 미지의 조선인. 프랑스 화가 셍 쏘베의 1806년판 채색 판화로 '아시아 왕국의 민족들'이란 시리즈 테마가 첨부되어 있음.

이 모습은 진짜 조선인의 모습이다. 왼쪽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의상의 아라비아인, 오른쪽은 시베리아,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습이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선인의 참증거이다. 정말 어이없게도 서양인이 이웃국의 아라비아인을 몰라 조선(고려)인이라 제목을 붙였을까?

벌써 조선은 서양의 코앞에서 그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조선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동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바로 조선인들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 조선인은 corean, 즉 조선(고려_)인이라 표현했다.

1806년당시 나폴레옹이 있던 유럽의 건너편에 조선이 있었는데, 조선은 지중해연안의 오스만제국에서부터 인도의 무굴제국, 시베리아에서 동부로 진출하는 러시아제국,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였는데, 그곳 미국은 동부에서부터 서부로 개척을 시작하려는 시점이었다.

미지의 세계 조선이 아니라, 그당시 현존하는 강대국 대조선국이었다. 조선에 있는 조선인은 서쪽의 아랍인에서부터, 인도인, 중국본토의 조선인, 한반도의 조선인, 시베리아의 원주민, 아메리카의 인디언을 모두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조선인에는 아랍인, 아프리카인, 일본인이 있었다.?

KOREA Middle Class Woman Boy &Coolie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는 1930년대 WPA의 한국 소개 포스터이다. WPA( Works Projects Administrtion: 공사기획청)은 1930년대 미 행정부 산하기관으로 1939년 까지 존속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인네의 모습은 아라비아인들이 덮고 다니는 흰옷에 붉은 외출복을 입었다. 히잡, 차도르는 분명 이것의 변형으로 보인다. 독을 이고 가는 지게꾼은 흑인이다. 머리도 약간 곱슬거리고.. 아프리카, 인도, 아랍인이 아닐까?. 어린이의 신발은 나막신이다. 왠지 일본과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조선의 영역을 상상케한다.

조선이란 나라는 과거에 아랍인들이 사는 중동을 포함하고, 흑인이 많이 살고 있는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나막신을 신는 제주도, 동남아시아, 일본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암시한다.

3) 만리장성이야기 - 만리장성은 조선의 장성이다.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실록 62권 15년 (1433년 癸丑계축) 10월 26일 을혜에 이렇게 나온다.

" 짐 역시 이로서 옛 선조들이 (천하의) 만리장성을 건축하여 오랑캐 적을 방비함으로서 오히려 (나라의) 난이 없었는데, 이런이유로 적들이 출입하는 요해에 수목이 많다하여 어찌 벌채하기가 어렵겠는뇨? 만약 에 풀이 마르기를 기다려 풀과 병행하여 태운다면, 어찌 길 닦는 일이 어려울 것인가?"

만리장성은 세종황제에게는 중요한 국토의 방비수단이었고, 항상 오랑캐의 습격에 대비하는 방파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서 만리장성은 조선의 장성임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언어와 역사 10/06/19 [13:00] 수정 삭제  
  '담.탐'자가 들어간 지명은 모두 백제 22담로지역으로 보면 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대륙과 해양을 나누어 아시아을 경영한 대국이였다.
사람이고 나라고 통 큰 그릇을 가져야 대인.대국이 될 수 있다.
111 10/06/22 [18:15] 수정 삭제  
  역사는 바로 잡힐거야 .

역사는 그간 힘있는자들로 인해

조작 왜곡 축소 되었다

딱 100년만에 반환받는 옥쇄 ..

순종이 마지막 황제 였나

융노족은 우리민족의 한갈래
동이족도 우리민족의 한갈래
선비족도 우리민족의 한갈래
몽골적도 우리민족의 한갈래
여진족도 우리민족의 한갈래
말갈족도 우리민족의 한갈래
거란족도 우리민족의 한갈래
쭈욱이어져 나간다

같은 핏줄이다

당시가 교통수단이 잘발달되지 않았고 통신이 잘 발달되지 않아서
화상전화 손전화도 자주 못하고 인터넷도 자주못하고
떨어져 살다보니 환경 기후 언어의 단절로 변하지

말을 잘타고 활을 잘쏘는걸로 고유풍습와 설화가 유사하다로

조선인이 연해주에 모여살다가 시베리아 살다가 동유럽 어디지 로
강제 이송되어 저기 아디냐 로 쫓겨나서
지금은 고려인으로 불리며 언어도 다르게 사용하고 있지
이들도 같은 핏줄로 우리민족이지

고려도 대제국이었다
한민족공동체 10/06/23 [16:42] 수정 삭제  
  지나국도 따지고 보면 한민족의 한 갈래란다...역사란 결국 인류는 서로 공존공생해야 한다는 공동체라는 사실도 말해 준다.
spring 10/11/26 [06:17] 수정 삭제  
  소설은 아무나 쓸수있다. 윤가는 소설을 희한하게 쓴다.지금은 과학의 시대이지 소설의 시대가 아니다는걸 아시길, 그리고 남의 성씨는 없던 상놈 집안 만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윤씨만 잘됐었던걸로 만들면 된다는 그마음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미식 여행지 고흥, ‘녹동항 포차’에서 추억을 쌓아요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