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99) -대동단 결성 '최후의 밀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8/29 [21:28]

대한정통사(99) -대동단 결성 '최후의 밀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8/29 [21:28]

 최후의 밀사

 

 

▲ 독립운동단체 대동단     © 편집부

 

1. 일진회의 반역아

친일매국노 송병준과 이용구가 주동해 설립한 일진회에는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모여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진회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의 목표는 단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왜구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출세하고 이익을 얻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목표한 부귀영화를 획득하려고 이미 국가나 민족 같은 것은 깨끗이 무시해버리기로 한 일진회원들은 철저히 왜구들의 주구배 노릇을 하는 매국노로서의 악업을 쌓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처럼 철저하게 매국노로 체질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일말의 민족적 양심이라도 남아 있던 사람은 자신이 잘못 선택했던 인생행로에 대해서 남모르게 가슴을 치며 후회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협(全協)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일제강점기 대동단장으로 활동한 전협선생께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때. 자료사진     © 편집부

 

단기4209(서기1876)에 서울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소싯적부터 준수한 용모와 총명한 자질로 장래가 촉망되었던 전협은, 그러나 난세에서 청운의 꿈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를 절감하며 자랐다. 그는 한 때는 동학에 입도하기도 했고, 관직으로 진출하려고 부단한 노력도 해서 20세에 농상공부의 주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뛰어난 시문(詩文)과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호방한 성격과 건장한 체격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매국노 간신배들이 설치면서 부정부패가 심했던 당시의 세태에서 정상적 방법으로 출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광무황제가 독립제국을 선포하고 시정개혁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었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 이후 수십 년간 쌓여왔던 폐단은 10년에 걸친 대원군의 단호한 세도척결에도 불구하고 그 뿌리가 뽑히지 않은데다가, 강화늑약 이후 왜구들의 무력을 바탕으로 커져 온 매국노들의 전횡은 더욱 대한국사회를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진회만 해도 처음 발족 당시에는 겉으로나마 동학의 한 지파로서의 순수성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곧 매국노집단으로 화해 버렸던 것이다.

 

동학에 입도했던 전협은 같은 동학 출신 이용구가 주도했던 초창기의 일진회에 가입하여 그 세력을 밑바탕으로 입신양명을 이루고자 했다. 일단 일진회에 가입하자 그의 능력은 곧 드러났고, 송병준과 이용구의 눈에 들게 된 그는 어렵지 않게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되었다. 그는 4237(1904)에 제주 군수로 발탁되었다가 다시 다음 해인 4238(1905)에는 부평 군수로 전임되는 등 탄탄한 출세대로를 보장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진회는 매국노집단으로 화해갔으므로 번민이 깊어 갔다. 그는 마침내 일진회에서도 송병준이용구 다음 가는 지위에 올랐고 일진회에서 낸 소위 한일합병청원서에 세 번째로 그의 이름이 서명되기도 하는 등 자신의 청운의 꿈과는 다르게 어느새 매국노 중의 매국노로 싫건 좋건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번민으로 날을 지새우던 전협에게도 같은 이유로 번민을 하고 있던 최익환이라는 후배가 있어서 어느덧 서로 마음을 통하고 있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최익환은 경성 사립 광무일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4240(1907) 5월부터 통역관으로 취직하고 있었으며, 그 또한 송병준과 이용구로부터 곧 실력을 인정받고 출세의 길을 달렸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매국노들과 한 패가 되어 매국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민족 앞에 속죄의 길을 모색하자는 데 뜻이 일치하고 있었다. 일진회의 주도로 강제합방이 추진되어 가자 더욱 그들의 잘못된 인생을 속죄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 광복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하게 되었고, 4244(1911)에 전협은 가족들을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의 망명 자금은 부평에 있던 윤치호 소유의 공한지(空閑地) 수만 평을 횡령하는 수법으로 마련했다. 최익환도 공금을 횡령하는 수법으로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왜경의 수사망에 걸려서 감옥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간도로 옮겨 간 전협은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광복운동단체가 아직 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땅한 활동방향을 찾아 헤매다가 차라리 본토에서 활동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 하에 4245(1912)에 혼자 서울로 잠입했으나 곧 왜경에 체포당했다. 그는 사기죄 등으로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거기서 동지 최익환을 다시 만나 함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단기4248(1915)에 최익환은 형기를 마치고 1년 먼저 출감한 전협과 서간도에서 재회했고 함께 상해와 서울을 오가면서 속죄의 방법을 강구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1차 대전이 끝나고 광무황제가 왜구들에게 독살당한 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전협은 그 추이를 예의 관찰하고 있었으나, 평화적인 만세운동의 방법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국적인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인 광복운동에 헌신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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