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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00)- 김가진과 의왕 리강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9/12 [08:36]

대한정통사(100)- 김가진과 의왕 리강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9/12 [08:36]

 

▲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 리강(李堈) 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 휘는 강(堈),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자료사진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으며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의왕에 책봉되었으며 1899년 미국에 유학하고, 그 해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경술 한일 합방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 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 편집부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은 예조판서를 역임한 전직 고관 김응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소싯적부터 두뇌가 명민했던 그는 5세에 학업을 시작하여 16세 때는 이미 경사백가(經史百家:유교의 모든 주요 서적)에 통달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4210(1877) 11월에 안동부사로 있던 부친의 슬하를 떠나 상경하여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생활을 하면서, 규장각 참서관통정대부장례원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 등 요직을 거쳐 4220(1887) 7월에는 동경주차판리공사(東京駐箚瓣理公使)가 되었다. 그 후 다시 주일공사안동부사농상공부대신중추원 일등의관황해도관찰사중추원 의장을 거쳐 4235(1902)에는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도 충청도관찰사규장각제학을 역임했으며, 강제 합방되던 당시에는 대한협회의 고문자격으로 합방반대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 순간의 오판으로 강제합방과 동시에 일제가 억지로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절하지 못하여, 필생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친일파라는 오명을 듣게 된 그는 실의와 회한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한 김가진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를 대동단 총재로 추대하기로 한 대동단 간부들은 곧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교섭을 맡은 전협이 4252(1919) 4월초에 가세가 기울어 낡아빠진 김가진의 집을 찾아가 설득작업을 벌이자 김가진은 자신에게 큰 허물이 있음을 들어서 정중하게 사양하였으나, 전협의 꾸준한 설득에 마침내 감복하여 총재직을 수락함으로써 70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협과 함께 독립대동단 임시규칙대동단 임시규칙세칙등을 작성하고 국내에서 임시정부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대조직으로의 성장을 기도하였다.

 

대동단의 역할 중 가장 비중이 큰 상해임정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일은 전직 선전관 민병호의 아들 민강이 주로 담당했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동화약방을 경영하면서 부채표 활명수를 만들어 내어 제약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중국과의 무역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의 기업 조직은 그대로 독립운동 자금의 전달로가 되는 한편, 상해임정과의 연락망으로서도 매우 큰 기능을 발휘했다.

 

김가진은 예전에 광무황제가 크게 신임하여 황제의 생존 시에 이미 해외 임시정부의 설립을 염두에 두고 김가진에게 국외로 망명토록 밀명을 내린 바가 있었다. 황제의 계획은 김가진을 먼저 망명시킨 후 의()왕도 망명시켜서 함께 임시정부를 주도해 나아가도록 함으로써 광복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황제는 김가진이 남작의 작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성스러운 본심을 꿰뚫어 보았고, 그리하여 김가진의 아들과 의왕의 고모를 혼인시켜서 김가진에 대한 자신의 신임을 확인시키고 의왕을 통해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으나, 불행히 임시정부의 설립을 못 보고 독살당하고 말았다.

 

김가진은 황제가 마지막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걸려고 준비하고 있던 최후의 밀사 예정자였다. 그러한 광무황제의 깊은 뜻을 알고 있던 김가진은, 마침 총재교섭이 들어온 대동단의 비밀조직을 통해 상해임정에 망명하겠다는 뜻을 임정에 몰래 전하여 붕어하신 황제의 뜻을 이으려 하였다.김가진으로부터 망명의사를 전달받은 상해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는 임정의 연통제(聯通制)요원인 이종욱을 서울로 밀파하여 작업을 추진했다. 원래 오대산 월정사의 승려였던 이종욱은 같은 승려인 도리사(桃李寺) 승녀 송세호를 만났고, 또 대동단 요원으로서 송세호와 같은 승려 출신인 정남용은 이종욱을 전협에게 소개했다. 전협을 만난 이종욱은 김가진의 상해탈출을 위한 준비를 부탁했고, 전협은 그 부탁을 기꺼이 응낙하고 우선 김가진의 탈출자금을 마련하면서 이종욱과 함께 세부계획을 세웠다.

 

승려인 이종욱은 신분을 숨기기가 비교적 쉬웠으나 사람들에게 그 얼굴이 잘 알려져 있던 김가진을 탈출시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들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우선 김가진이 자신의 의치(義齒)를 모두 빼고 허름한 촌사람으로 변장한 후, 장남 김의한 및 소실인 금화와 동행하기로 했으며 이종욱이 길안내를 맡았다. 의왕도 상해에 망명시킬 복안을 이미 가지고 있던 김가진은 망명 직전에 아들 김의한을 시켜서,

소인은 이제 상해로 떠나오나 장차 전하도 함께 모시기를 도모하나이다. (小人今往上海 計殿下從枉賀)”

라는 쪽지를 전했다. 그리하여 단기4252(1919) 1010일에 마침내 일행은 일산역을 출발하는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를 거쳐서 압록강 건너편인 안동으로 향했다. 노신 김가진은 안동행 열차 안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자신의 회한을 달랬다.

 

 

▲ 사동궁(寺洞宮)​ -의친왕부(義親王府)     © 편집부

 

국파군망사직경 포수인사지금생 노신상유충소지 일거웅비만리행 민국존망감고신 라지망탈여신 수지삼등차중객 파립녹의구대신

國破君亡社稷傾 包羞忍死至今生 老身尙有沖霄志 一擧雄飛萬里行 民國存亡敢顧身 天羅地網脫如神 誰知三等車中客 破笠簏衣舊大臣

 

왜적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마침내 안동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김가진의 일행은 안동역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상해까지 갈 수 있었다. 김가진의 상해망명은 왜구들을 크게 경악시켰으니, 전직 고관이며 합방당시에는 남작의 작위까지 받았던 인물이 상해임정에 가담함으로써 임정의 대외적인 위상을 크게 높여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왜구들은 김가진을 다시 회유하려고 김의한의 처종형(妻從兄)인 정필화를 상해로 밀파했으나 임정의 경무국장이었던 김구선생이 주도하고 있던 정보망에 의하여 즉시 적발되었고, 정필화는 임정 요인들에게 자신이 왜총독부로부터 밀파된 자초지종을 자백한 다음에 처형되었다. 망명 당시 이미 75세의 고령에 이른 김가진은 다음 순서로 의왕의 망명을 서둘러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한국의 황족혈통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부친 광무황제의 뜻을 바로 이어 자주독립과 광복을 이루고자 노력한 사람은 의왕 이 강(李堈)이었다. 4210(1877)에 귀인(貴人) 장씨에게서 광무황제의 다섯 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대단히 명민하고 준수한 풍모를 지녔으나, 그러한 그가 황태자로 책봉될까봐 크게 우려했던 민황후와 귀비 엄씨로부터 음양으로 박대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14세 때 의화군(義和君)에 책봉되었고, 17세 때는 보빙사(報聘使)로 일본에 건너가서 청일전쟁의 전승을 축하하는 마음에도 없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민황후는 그 기회에 그의 귀국을 계속 허락하지 않았고, 그러다가 민황후가 시해당하자 이번에는 영왕의 생모인 엄귀비가 그의 귀국을 방해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일본 땅을 여행 삼아 두루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는데, 다음 해인 4228(1895)부터는 특파대사라는 명분을 띠고서 서양각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4230(1897)에는 미국을 방문하고 10월경에 귀국했다. 당시 풍전등화와도 같던 조국의 모습은 세계 열강들을 견문하고 온 그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의지를 굳혀 주었고, 그는 겉으로는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광무황제의 오른팔이 되어 나름대로의 부국강병 계책을 실천에 옮겨 갔다.

 

22세 때인 4232(1899)에 의왕에 책봉된 그는 황제에게 부탁드려 4244(1901)부터 미국유학을 떠났다. 의왕은 미국에 건너가서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언 대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다시 버지니아 주의 로아나크 대학으로 전학했다. 그는 5년 동안의 유학생활 중 많은 지식을 습득했고, 폭넓은 교제로 많은 미국인들과 사귀기도 했다. 그는 술판을 자주 벌이는 가운데 교제 범위를 넓혀 갔으나 매일같이 영어로 일기를 꼬박꼬박 쓸 정도로 나름대로 엄격히 절제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유학생활에 쪼들리고 있던 대한국 유학생들의 학비를 도와주기도 하면서 겉으로는 술꾼을 가장했는데, 그것은 당시 똑똑하게 보이는 황족들이 차례로 암살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익힌 그 나름대로의 생존수단이었던 것이다. 마치 그의 할아버지인 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 술망나니로 떠돌면서 척족세도가들로부터 생명을 보존했던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5년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버린 고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일본까지 왔을 때, 엄귀비는 의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300만 원을 전하면서 계속 일본에 머물러 있기를 종용했다. 그런 묘한 상황을 눈치 챈 이등은 의왕을 돕는 척하면서 대한국황실 내부에 내분을 일으키려고 그의 직권으로 의왕을 귀국시키고, 광무황제에게 상주하여 의왕에게 육군부장의 직위에 임명하고 많은 재산을 의왕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등은 엄귀비의 아들인 영왕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동의하는 등 황실의 갈등을 부채질하기에 바빴다.

 

의왕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임명되었지만 망국전야의 울분에 못이긴 그는 완전히 술독에 빠져서, 육혈포를 허리에 차고 서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게 일과가 되다시피 했으며, 술 취한 것을 빙자하여 이등에게도 육혈포를 겨누며 가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점잔빼는 황족과 대신들에게는 갖은 건방을 떨던 간교한 이등도 그러한 잡을 수 없는 의왕의 행동에는 나중엔 질려서 의왕을 달래보려고 애썼다.

 

강제합방이 이루어지자 그의 주벽은 더욱 심해져서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망국의 한을 술로 달래고 주정을 해댔는데,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독사 같은 왜구들은 의왕의 숨은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겉으로는 비웃으면서도 민완형사로 하여금 항상 감시하도록 조처하고 있었다. 왜구들은 심지어 의왕을 강제퇴위당한 융희황제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의왕과 왜구들 사이에 일종의 생존경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의왕은 미친 척하고 사내(데라우찌) 총독에게 육혈포를 겨누며 협박을 하기도 했고, 더욱 주색에 빠진 의왕의 가장된 낭비벽에 의해 명월관을 비롯한 각 처의 요정들로부터 술값계산서가 쌓이자 이왕직 사무관인 흑기(黑崎:구로자끼)는 그 계산에 애를 먹기도 했다. 예의 감시하는 데도 불구하고 의왕이 수년간이나 주색을 밝히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지 않자, 왜구들은 차라리 의왕의 주색잡기를 조장하는 쪽으로 몰아갔다. , 제한 없이 마음껏 술독에 빠져 버리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기발한 계책으로 의왕은 어느 정도 왜구들의 감시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는데 의왕은 바로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삼일운동의 기폭제가 된 손병희의 격고문이 의왕과 손병희의 합작품인 것도 알려지고 있는데,삼일운동 자체는 왜구들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무장항쟁의 기운은 더욱 무르익어 갔고, 의왕은 의왕대로 가장 신임할 만한 전직고관 김가진과 함께 망명정부를 세울 계획을 추진했다. 의왕은 4252(1919) 79일에 신뢰할 수 있는 인편을 통해 상해임정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친서를 보내어, 자신이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기회를 엿보던 중 황제가 시해당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망명 이유를 들어 확고한 망명 의사를 전달했다.

 

지난해에 선제(先帝:태황제폐하)의 밀지를 받들어 곧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 실행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를 숨기고 아직 수행하지 못하였더니, 희세의 대흉한(大凶漢)은 선제를 그 독수(毒手)로 시해하였다

 

“ 1. 일본은 몇몇 간적들과 함께 명성황후와 선제를 시해하였나니 이 원통한 심정을 세계 모든 나라에 호소할 일

 

2. 31일 이래 국민이 적수공권으로 독립을 부르짖는데 일본은 시종일관하여 정의와 인도를 무시하고 학살을 자행하나, 인민은 백절불굴의 자세로 독립을 요구하는 열정이 갈수록 비등하니 우리 국민의 정신은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 아니할 것을 선포할 일

 

3.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10년 전후에 여러 조약으로 국토를 병탄함이 간적을 이용하여 협박 체결한 것이고 결코 선제의 승낙하심이 아닌 것을 나는 확실히 아는 지라 이것을 세계에 공포할 일

4. 나는 한국민의 하나인지라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한 일본의 귀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지라. 우리 임시정부가 성립된 곳에 나아가 정부의원으로 손을 맞잡고 생사를 같이 하야 우리나라 완전독립에 노력하야 동포의 고심을 만분의 일이라도 도웁고자 하노니, 나의 이와 같은 결심은 한편 복수를 위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국민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로다.”

 

그리고 김가진이 상해로의 망명에 성공하자 의왕은 망명을 위한 모든 사전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시켰는데, 드디어 상해임정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이종욱이 다시 서울에 돌아왔던 것이다. 이종욱은 다시 대동단의 전협과 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곧 실행에 들어갔다. 전협 거사를 위해 의왕의 주위를 살펴 본 결과 의왕에게 정운복이라는 심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운복은 반일단체인 대한협회 회장을 지낸 적이 있었고 당시 대한협회 고문이던 김가진과도 잘 알고 지냈던 동지였다. 그리고 대동단원 중에서 정운복과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이재호를 통해 마침내 4252(1919) 119일에 의왕과의 접선이 가능하게 되었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처음 보는 전협의 사람됨을 알아본 의왕이 탈출계획에 동의하여 모든 계획은 신속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의왕은 모든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망명을 결행하기 전에 대한국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남겼다.

 

- 국민에게 고하는 글 -

통곡하며 우리 2천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오호라, 이번의 만주행은 무슨 이유인가? 하늘과 땅 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요, 뼈가 부서지고 창자가 찢어지는 큰 수치를 씻으려 할 따름이라. 지난 날 선제(先帝)폐하의 밀지를 받들어 바로 일어나려 하였으나 무수한 가시밭에서 만신창이가 될 것을 생각하여 이를 숨기고 아직 수행하지 못하였더니, 희세(稀世)의 대흉한(大兇漢)은 선제를 그 독수로 시해하였도다.

슬프다. 생명을 보존하여 무슨 일이 있으리. 오직 스스로 죽지 못함이 한이었도다. 이때를 당하매 개인적인 잘됨을 꾀하는 바가 없으며, 우리 이천만 민족의 생사가 중대한 시기를 맞이하여 앞의 함정도 뒤의 채찍도 돌보지 아니하고 궐연(蹶然)히 나는 궐기하였노라. 오로지 민중은 한 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고 분발 전진하여 삼천리의 식민지화를 극복함으로써 이천만의 치욕을 씻고 공통적 세운(世運)의 도래를 맞이함에 후퇴하지 말라.

오호 만세

건국 4252119일 의왕 이 강

 

4. 대동단의 통한

국민에게 고하는 글을 다 쓴 의왕은 전협이 미리 준비해 간 옷가지들로 재빨리 변장하여, 헙수룩한 양복에 중절모를 눌러쓰고 노란 수염까지 단 한 명의 초라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꾸민 후 인력거를 타고 밤길을 달려 자하문을 빠져나갔고 새벽 3시쯤에는 세검정에 이르렀다. 왜구들의 철통같은 감시망을 뚫고 서울을 탈출한 후 잠시 숨을 돌린 일행은 수색역으로 가서 전협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이 함께 압록강 건너 안동행 열차에 올랐다. 의왕을 상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은 이을규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도 각각 사전 모의에 따라서 중도에서 내릴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안동에 도착하면 아일랜드인 쇼오가 경영하는 이륭 양행의 선편으로 상해까지 항해할 수 있게끔 모든 계획이 빈틈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의왕은 망명할 때 광무황제 소유의 상해 덕화은행 비밀구좌 통장을 가지고 있었다. , 완전한 망명계획을 수립한 후 행동에 옮겼던 것이며, 대동단은 의왕의 망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 의왕의 망명은 이미 광무황제의 밀명에 의하여 계획되었던 것이었다.

의왕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안동으로 향하고 있는 동안 왜구들은 이미 비상이 걸려 있었다. 의왕을 꾸준히 미행했던 삼륜(三輪:미와)경부도 최종적으로 망명을 결심한 의왕의 신출귀몰한 따돌리기 작전에 말려들어 의왕의 종적을 놓친 채, 다음 날 아침 10시에 이왕직 사무관으로부터 의왕이 부재중이라는 보고를 받고는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왜구들의 철저한 정보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왕이 수색역을 떠났음을 알아냈고, 신의주경찰서에 전보를 쳐서 탈출을 막도록 지시했다. 신의주에서는 미산(米山:요네야마) 경부가 전보를 받고 그 열차에 올라탈 수 있었으나, 워낙 만원이라 안동역에 이를 때까지도 임검이 끝나지 않았다.

미산은 급히 개찰구로 뛰어 나가서 길목을 지켰는데, 일전에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며 창덕궁을 드나들었던 까닭에 의왕의 면모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미산의 시야에 변장을 한 의왕의 모습이 들어 왔다. 이상한 예감을 느낀 의왕도 얼른 역구내에 있는 찻집으로 피신했으나, 미산은 곧 경찰병력을 대동하고 찻집에 들이 닥쳐 의왕을 검거했다. 망명에 실패한 의왕은 일본으로 연행되어 동경 제국호텔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민족사학자로서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역임한 바도 있는 박은식은 의왕의 망명기도에 대하여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황자 의친왕 이강은 평소 주색에 빠져서 허송세월하였으므로 저들은 전혀 아무런 사상도 없는 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대동단에 투신하여 원수를 갚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운동에 결연히 나섰으니, 이러한 모든 사례는 저들로서는 뜻밖의 일이었으리라

의왕의 검거에 뒤이어 대동단의 활동도 왜구들에게 탐지되어 전협을 비롯한 대부분의 단원들이 체포되어 왜구들의 보복적인 악독한 고문 끝에 죽거나 불구의 폐질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애국애족하는 의기는 모든 대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광복투사들의 항쟁의지를 더욱 북돋아 주었으니, 전협 등 대동단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은식은 그들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역사에 기록한 바가 있다.

! 전협최익환 등은 일진회의 회원이 아니었던가? 일진회는 또한 매국노 이용구의 무리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이 은인자중하면서 뜻을 세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변화를 관찰하여 오늘날에 와서 이와 같은 비상한 활동을 보였으니, 그 용기와 담력은 저들로 하여금 다만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이 거사는 다만 개인이 당장에 성불하려함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심리(心理)가 일치하여 근본에 돌아갔으므로 더욱 뚜렷해진 것이다. 저들이 길러 낸 일진회가 오늘날 독립당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동화(同化)를 몽상하는 자들은 더욱 망령된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의왕을 추대하여 광복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움직임은 4252(1919) 11월에 대한독립단에 의해서도 추진되었다. , 보황주의자인 대한독립단의 도총재 박장호는 단원 김기한과 강시형 등으로 하여금 본토 내에 대한독립단의 분치 기관(分置機關)을 설치코자 하여, 두 사람은 본토로 잠입하여 동지들을 포섭하면서 비밀리에 인쇄시설까지 확보하고 항일문서 등을 제작배포하며 각 도 단위로 분치 기관을 설립해 갔다. 그러나 왜적의 감시가 심해서 조직의 활성화가 난관에 부딪치자 그들은 의왕을 추대해서 조직을 확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의왕의 탈출사건 이후 의왕에 대한 왜적의 감시가 더욱 심해져서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힘들었으므로 의왕의 부속 무관으로 있던 어담 대좌(大佐)를 통해서 접근하려 했는데, 그 이유는 강 시형의 부친이 일찍이 어담의 한문교사였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담을 설득시키려고 어담의 집을 방문했으나 외출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밀봉한 관계문서만 맡기고 돌아 왔는데, 나중에 귀가한 어담은 그 문서를 보고 놀라서 오히려 왜경에게 알렸고, 그에 따라 관계된 사람들이 대부분 체포당해서 의왕을 정점으로 하는 분치 기관 설립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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