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105) - 대동단결선언의 문젯점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12/17 [18:36]

대한정통사(105) - 대동단결선언의 문젯점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12/17 [18:36]

 

▲ 친일성향의 독립신문과 메국노 필립 제이슨(서재필)     © 편집부

 

대동단결선언

 

대한국인들에게 공화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갑신왜란 주역 중 하나였던 서재필이 미국인 의사인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환국하여 다분히 친일적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독립협회를 이끌던 무렵부터다. 대역죄를 범하고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망명한 후, 미국문화에 완전히 매료되어 이름까지 아예 미국식으로 창씨개명함으로써 한민족의 전통적 문화감각과 이미 결별을 고한 필립 제이슨이 미국식 공화제를 대한국에서 추진해 보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군주의 존재를 폐기해 버릴 때 대한국에서 설 땅이 없었던 현실을 고려하여 그 중간 과정으로서 우선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추진코자 했던 것이다. 당시 광무황제는 독립협회에서 제시한 바 있던 영국식 입헌군주제에 대해서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군신상하가 노력하기 여하에 따라서는 입군민주제(立君民主制)’와 같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훌륭한 정치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필립 등 일부 지도자들의 두드러진 친일행각으로 인하여 결국 일제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던 광무황제의 반격을 받고 침몰했고, 따라서 독립협회가 주장하던 입헌민주제까지 불순한 음모를 위장한 것으로 인식되어 당분간 논의의 대상이 되지를 못했다. 친외세적 간신들이 우글거리던 내각도 믿을 수가 없고, 제법 시정개혁을 위하여 매진한다 싶던 독립협회마저 믿을 수 없게 되자, 광무황제는 차라리 황권을 강화함으로써 일관된 자주적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한편, 이준 등 진실한 애국지사들의 여론 활동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등, 여전히 조선시대의 보편적인 정치 형태였던 민본적 입헌군주제를 보다 더 발전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광무황제의 방침을 두려워 한 일제가 헤이그 밀사파견을 빌미로 삼아서 광무황제를 강제폐위시킨 후에는 친일매국노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따라서 헤이그밀사 이상설을 정점으로 하는 모든 해외광복운동의 점은 일단 광무황제를 최고지도자로 다시 옹립함으로써 민족사적 정통성에 입각한 광복전선의 힘찬 통일을 기약코자 하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 정작 공화제가 활발하게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강제합방당한 지 7년이 지난 4250(1917), 소위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이 등장한 후부터였다.

 

대동단결선언(이하 선언’)은 신규식조소앙신석우박용만박은식신채호윤세복김규식 등 저명한 민족운동가 14명이 발기하였다.선언이 채택된 시기는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연합국 측의 승세가 확실하게 굳어져 가고 있던 때였고, 따라서 연합국 측의 호의에 힘입어서라도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인식이 민족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퍼져가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또한 4248(1915 ; 유인석 서거)4250(1917 ; 봄에 이상설 서거)에는 광복투쟁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던 두 위대한 지도자들이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광복투쟁노선에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 광무황제의 옹립을 통한 광복투쟁 효과의 극대화를 시종일관하게 추진하던 두 거목이 일시에 서거한 후에, 서양계몽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세대지도자들이 망국을 기정사실화하고, ‘국권을 양여한황실에 더 이상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여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남은 것은 국민주권론에 의한 새로운 정통성의 창출밖에없게 된 것이다.

 

선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아한(我韓)은 무시(無始) 이래로 한인의 한이요 비한인(非韓人)의 한이 아니라, 한인간의 주권수수는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國憲)이요, 비한인에게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요, 한국 민성(民性)의 절대 불허하는 바이다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는 즉 아() 국민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이니, 아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유하도다. 고로 2천만의 생령과 3천리의 구강과 4천년의 주권은 오인(吾人)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요, 상속할 터이니, 오인 동지는 차()에 대하여 불가분의 무한책임이 중대하도다

 

, 선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주권불멸론(고유주권론)에 의한 국민주권설 : 주권이란 민족 고유한 것이며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 양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권행사의 의무와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데, 국내 동포들은 일제에 구속되어 있으므로 그 책임을 해외의 동지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 이는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를 무리하게 단정함으로써 대한국황실이 신국가 건설에 끼어들 여지를 완전히 봉쇄해 버리려 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유인석과 이상설 등이 꾸준히 추구해 온 민족사적 정통성의 확립을 위한 보황주의(保皇主義)를 포기하는 것을 뜻했다.

 

2) 국가적 행동의 가능성 : 주권을 상속한 후 국가적 행동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대동단결이 요망된다. , 해외 동포를 대략 100만 명으로 잡고 매년 1인당 반원(半圓)씩 모금하여(, 세금) 임시적 국가기구를 운영할 자금으로 삼는다. 그리하면 1급의 국가적 권위가 드러나서 규모는 방대하고 직권은 분명하고 실력은 충족하야 대내외적인 신용이 확립된다고 주장했다.

 

3) 신국가건설의 삼단계 요령 : 그러한 국가적 행동을 성취하기 위해 통일기관- 통일국가 - 원만한 국가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 ‘원만한 국가독립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우선 통일국가임시정부등의 조직을 만들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기관민족대회의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4) 국제환경의 변화에 대처 : 삼단계 요령은 당시 국제사회의 변화로 볼 때도 당연하고 유리한 것으로 파악되었던 것 같다. , 쏘련의 2월 혁명, 핀란드유태폴란드의 독립선언 및 아일랜드리비아모로코인도티베트 등의 독립운동 기운고조, 미국의 참전 등 연합국의 승세, 민권운동(2인터내셔날 등?)의 고조,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 등의 여건이 독립운동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 국제환경 자체가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에 유리하게 변화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그러한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여 주권상속의 대의와 대동단결의 문제를 드러내어 우선 각계각층의 현명한 지도자들의 찬동을 구하며, 이어서 일반 국민을 일깨우고, 그와 함께 세계의 여론을 환기하고하였다. 그리하여 선언에서 제의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 해외 각지에 있는 모든 단체들을 통합하여 민족대회의나 임시의정원 같은 최고기관을 조직하고, 행정조직을 구성하며, 헌법을 제정하여 법치사회를 만들고, ‘독립평등의 성권(聖權)을 주장하야 동화(同化)의 마력과 자치의 열근(劣根)을 방제(防除)할 것등을 제의하고, 우리나라의 실정을 세계에 공개해서 국민외교를 실행하고, 영구히 통일적 유기체로서의 존립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동지들 간의 애정을 쌓는 등 일체의 독립운동사업을, 모든 단체와 덕망가들의 회의를 통하여 일사불란한 국가적 조직을 구성하여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고 그를 위하여 민족대동의 회의를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 민족주체성이 대단히 박약해진 오늘날의 현상에 비추어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선언문에 단기연호(檀帝紀元 4250)를 사용한 점인데, 민족주체성에 입각한 광복운동을 전개하던 광복투쟁기에는 단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미주에서 간행되던 신한민보에도 단기를 사용했으며, 해외동포가 망명한 각처에서 103일에는 개국절기원절개천절이라는 이름으로 축하행사가 열렸고, 그 행사는 교회에서 개최되기도 하는 등 어떠한 종교와 관계없이 민족의 제전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단기가 정작 배척당하기 시작한 것은 8.15 이후 각종 공화주의자들의 소원대로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이 넘쳐 들어오고 민족적 전통이 마멸되어 가던 때부터였다. 특히 5.16쿠데타로 집권한 비주체적인 정권이 서양 외세(특히 미국)의 비위를 맞춰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단기를 완전히 폐기처분하고 서기를 공식연호로 채택한 후 민족정기는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 옛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북한 공산주의정권이 일찌감치 단기를 포기한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별 수 없었다 해도, 민족사의 정통성을 밑천삼아 수립된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단기를 없애버리고 서기를 채택한 것은 크게 잘못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

 

 ‘선언의 문제점

 

물론 방만하게 전개되고 있던 독립운동의 통일을 기하자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름대로 당시의 세계정세를 분석하여 그에 적절히 대처하자는 것도 대단히 현실적인 좋은 제안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통일의 구심점을 무엇으로 하고 세계정세를 본질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고려가 부족하여 오히려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난맥상을 초래할 소지가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유인석을 비롯한 만주와 노령의 대부분의 광복투사들이 광복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국가적 독립을 넘어서 강제해체되어 버린 우리 사회제도의 복구였던 점에 좀 더 유의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연해주에서 선을 보인 바 있던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의 이념을 본받아서 진행되어 오던 대부분의 광복운동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선언은 이윽고 민족해방투쟁노선에 있어서의 혼선을 초래하는 한 큰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선언의 합리성을 지탱해 주는 근본 논리는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했다는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이미 4239(1906)에 프랑스 국제법학자 프란시스 레이에 의하여 성립될 수 없는 조약(, 무효조약)’으로 증명된 이후 세계인들의 조소거리가 되어 왜족들을 당황케 한 사실이 있고 보면, 그러한 엉터리 늑약을 근거로 하여 을사늑약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합방늑약 또한 무효조약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융희황제는 주권을 포기한 적도 없고, 대한국은 왜구들에게 국권을 넘겨준 적도 없다. 그처럼 융희황제가 주권을 양여한 사실이 없으니 융희황제는 여전히 엄연한 대한국의 주권자인 것이며, 왜구들의 망동으로 주권을 직접 행사하기 어려운 곤경에 놓여 있었다고는 해도 주권자로서의 상징성은 여전히 융희황제께 있는 것이다.

 

가령 어느 집안의 가장이 납치공갈단들에게 잡혀 가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머지 가족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가장을 구출하여 다시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게 아닌가? 설령 구출이 어려워서 가장을 대신할 사람을 임시로 선출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장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언제라도 가장의 역할을 돌려주는 기본전제를 깔고 하는 대리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돌아 온 가장의 심신이 박약해서 도저히 가정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고 판단될 때는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다른 적임자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적의 포로이긴 하지만 가장이 엄연히 존재해 있고, 그 가장은 강도질당한 주권을 되찾고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장이 가장노릇을 못한다고 가장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처사가 과연 온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물론 생사여탈권이 적의 수중에 놓인 채 포로가 된 가장을 대신해서 집안을 어떻게든 일으켜 보겠다는 의욕은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나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장을 없는 것으로 하고(, 포기하고)’ 집안을 일으키겠다면 패륜이외의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럴 경우, 여전히 그 가장을 정통적인 가장으로 알고, 여하한 경우에도 그 가장을 상징적 중심으로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다른 가족구성원들로부터는 커다란 반발을 일으킴으로써, 호시탐탐 나머지 가족들마저 처치해버리고 가산을 송두리째 탈취하려고 기회만 잔뜩 노리고 있는 적 앞에서 집안 내분을 일으키는 자중지란을 연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국으로 말하자면 그 가장의 정통성이 광무황제 - 융희황제 - ()왕으로 엄연히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으니, 만일 집안의 불행을 틈타서 가장을 바꿔 치우려는 불순한 동기가 없었다면 가장이 포로생활에서 풀려 난 8.15 이후에라도 다시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했어야만 했다.

 

만일 영왕이 왜왕녀와 강제로 결혼당한 사실이 국민적 반발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어서 가장으로서의 자질에 손상이 갔다면, 조선시대에 반드시 적자가 아니더라도 능력이 뛰어난 후계자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한 예에 따라서 영왕 다음 가는 정통성 계승자인 의()왕을 가장, 즉 지도자로 추대했어야만 국가적 정통성이 바로 설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리하여 광무개혁에서 미처 다 추진하지 못했던 제반 개혁을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활발하고도 일사불란하게 시행해감으로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평화적 입군민주제의 전통을 확립해야만 하지 않았겠는가?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점은 선언이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던 공산주의 혁명의 영향을 너무나 깊이 받은 점이다.

,

슬라브의 혁명은 반한(半韓)의 복이니, 분란(芬蘭;핀란드)유태(猶太)파란(波蘭)은 기() 선진(先進)이오, 연합국의 산환(散渙)은 전세(全世)의 복이니, () 애이란(愛爾蘭;아일), 약 특리파리(特里波利;트리폴리), 약 마락가(摩洛哥;말라카), 약 인도, 약 서장(西藏;티베트), 약 고려는 그 부활의 소리가 날로 높고, 그 해방의 논의가 날로 긴밀해지고 있도다. 이런 것에만 비할 뿐 아니라 민권연합회는 강권타파와 민권신장의 대운동에 착수하여 나라의 구별과 종족의 구별이 없고, 만국사회당은 계절존망(繼絶存亡;잇고끊고존재하고망하고)하는 대의를 선포하여 인류화복을 재정(裁定;판결하고 정함)하는 현상이니, 이 날이 복일(福日)이라

하여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만국사회당의 대의 선포를 피압박민족의 독립회복 계기로 파악했던 것인데, 그것은 곧 사회주의식 전망으로 국제적 연대까지 전망하면서 그를 위한 민족 단결을 강조한 것이었으며, 그 단결의 기반이 된 논리는 대동사상이었다.

 

그러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은 노령 중심으로 더욱 크고 명확하게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4238(1905)의 혁명 이후 노령의 독립운동은 러시아 혁명과 어떤 형태로든지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이동휘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동휘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단지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동맹세력으로 공산주의자(볼셰비키)들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특히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극도로 파행적인 국제적 배신으로 점철된 민족사의 또 하나의 커다란 비극을 남겼을 뿐이었으니

 

러시아 혁명에의 동경은 머지않아 볼셰비키들의 기회주의적이고도 교활한 공산제국주의 추진에 의하여 한낱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나게 되었고(자유시참변 등), 그러한 볼셰비키들의 노선을 대폭 환영했던 공화주의자들의 단견은 또 하나의 이념적 사대주의였다는 평을 면키 힘들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주로 대종교의 지도자들이 주장하고 나섰던 이 선언및 공화제 추진자들이, 대다수가 유림출신자들로 구성되었던 공교도(孔敎徒;유교인) 계열의 보황주의자들로부터 공산주의자들로 오인받게 됨으로써, 무장투쟁노선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아무리 광복이 급했어도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분석한 후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노선을 확정하고 추진했어야만 단합된 힘으로 힘차게 광복투쟁에 매진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허구적인 공산주의사회보다 훨씬 고차원의 이상세계인 대동사회를 지향한다는 목적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를 게 없었던 유교와 대종교였건만

 

참고 1 ; 제3자인 외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도,

통치자(대한국황제)가 자신의 뜻에 의하여 그 자신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여 외국 왕조(일제)에 양도했다는 것은 그 어느 나라의 근대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라고 하여,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에 의해 대한국이 멸망했다는 식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함.(Karoly Fendler : 일본의 한국병합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對韓觀)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학의 과제와 전망 제1분과’,1988.

또한 융희황제는 ()426일 붕어 직전에 시종이었던 전 궁내부대신 조정구에게 남긴 유조(遺詔)에서,

지난날의 한일병합 인준은 역신의 무리가 제멋대로 선포한 것으로 내가 한 바가 아니다조약 체결 당시 일제는 나를 유폐하고 협박했다이른바 병합 인준을 비롯한 한일 간 여러 조칙들은 파기해야 마땅하다민족의 광복 노력에 혼백으로라도 돕겠다.”

고 밝힌 사실이 동년 78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한 교포신문 신한민보에 실렸었음이 알려짐. 당시 엄중한 일제의 감시망 때문에 황제의 유조가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못한 채, 밀사를 통하여 극비밀리에 미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임.(한겨레 43301114일자 보도).

 

참고 2 ; 

민족해방을 구호로 내건 쏘련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일부 대한국인들의 간절한 여망과는 달리, 쏘련 당국자들은 4258(1925) 120일에 -일 상호관계의 기본 원칙에 관한 협약을 맺어서 두 나라는 대립이 아닌 정상적 외교의 국면에 들어갔고, 대한국의 독립문제는 논의조차 될 수 없었음. 이 협약에 있어서의 쏘련 측 의무조항은 다음과 같음.

(1) 쏘련 영토 내에서 어떠한 반식민지반일운동의 출현도 허용되지 않는다.

(2) 일본의 식민정책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떠한 정치군사 협상에도 응하지 않는다.

(3) 쏘련 영토 내에서 반일조직과 반일조직을 위한 활동을 하는 외국인의 존속을 허용치 않는다

4271(1938) 경에는 그나마 코민테른과 여타 국제 반제국주의조직뿐 아니라 쏘련의 당과 국가요직에 단 한 명의 대한국인도 남아 있지 못했는데, 그들 모두는 일본 정보기관의 앞잡이나 민중의 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됨. 연해주 동포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도 그러한 배경에서 강행됨.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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