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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친일논란기사 유죄확정 판결

'슬픈 조국의 노래' 민족정기 구현위해 법원에 재심 신청 예정

리복재 칼럼 | 기사입력 2011/10/08 [00:42]

대법원, 친일논란기사 유죄확정 판결

'슬픈 조국의 노래' 민족정기 구현위해 법원에 재심 신청 예정

리복재 칼럼 | 입력 : 2011/10/08 [00:42]
▲ 1976년 9월25일 사사카와 료이치와 박정희의 청와대 환담을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 [출처] [펌] 사사카와의 두 얼굴, '극우전범' 대 '박애주의자'|    
연세대, 일 극우자금 100억 유입 재논란

고려대-연세대에 유입된 일본 극우자금  
(A급전범)사사카와의 두 얼굴, '극우전범' 대 '박애주의자'   
 
[연세대가 일본 극우단체인 '일본재단'의 자금 1백억원을 받아 10년 간 연구기금으로 운영해 물의를 빚고 있는 가운데 고려대도 한때 상당기간 이 재단의 돈을 받아 장학재단을 조성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사카와 료이치는 2차대전이 끝난 후 3년간 복역한 A급전범 출신.
경기도 의왕에서 열린 나병연구원 준공식에서 박근혜를 만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적고 있다.


사사카와 : 한국에 올 때마다 발전하고 모두가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한쪽(북한을 지칭 : 필자 주)에서는 나쁜 생각을 갖고있어 잘 안되는 것이지요.
박근혜 : 동양의 격언에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북한이 하늘의 뜻을 거역하니 잘 될리가 없지요. 공산당도 언젠가는 종말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의 도움에 감동한 박 대통령은 그해 9월 25일 그를 청와대로 불러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는데, 그는 '반공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호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75년 9월28일 사사카와를 만난 허문도 당시 <조선일보> 기자는 30일자 기사에서 "북괴 김일성이 적화통일을 하자고 날뛰고 있으나 이번에 박 대통령을 직접 뵙고 보니 김일성의 이러한 야욕은 들어갈 틈도 없음을 확신했다. 훌륭한 대통령을 모시고 있으니 자랑스럽겠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사사카와 재단은 95년 수해를 겪은 북한에도 약 2만 달러를 지원했고, 아들 사사카와 료헤이 일본재단 이사장이 98년 6월 평양을 방문해 북·일 수교예비회담을 중재했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료헤이 이사장은 95년 12월 한일협력기금 조인식에서 연세대 출신의 민족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하며 "일제의 박해에 쓰러진 그의 학문과 정신을 이 기금은 이어가겠다"고 말했지만, 생전의 료이치가 군국주의에 경도된 과거를 뉘우쳤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오마이뉴스 손병관 기자]
기사 제목과 기사 내용 중 옮긴 것입니다.

▲  서울 중앙고법에서 벌금형 유죄를 선고 받고 촬영된 사진    © 플러스코리아
본지는 이런류의 자금과 일본측으로부터 자료를 받고 썼다는 의혹을 제기 했다. 책을 쓴 저자에게 일본고정간첩일 것이며 저자의 실명을 공개한 것은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서린 울분에 삽입했다. 실정법상으로는 법원으로부터 확정받지 않는 상태에서 삽입한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아야만 하는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일본측으로부터 자료를 받았고, 일본 자금을 받아 책을 집필했다면 민족적 차원에서 당연히 질타와 비난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일본간첩이라며 저자를 맹 비난하는 기사를 보도했다가 이 사건에서만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저자로부터 5차례나 출판물에 의한 정보통신망이용촉진 위반이라는 명예훼손으로 피소되었다.

상대방은 처음부터 변호사 4명을 선임해 대응했으나 필자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대응했다. 왜냐하면 식민지국가가 아닌 주권국가에서 과거 40년 가까이 이 땅과 민족을 짓밟고 전통과 문화, 역사를 왜곡하다 못해 말살하고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게 식민지배를 했던 철천지 원수인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자들 중 으뜸인 이등박문을 찬양하는 그러한 자들을 비판했다고 해서 검찰이 받아 주고 더욱이 재판까지 받아 주는 이 나라 사법부가 과연 어떠한 판결을 내릴까 궁금해서이고, 이들의 변론에 대해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기각시켜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민족의 자존심과 주권이 중요한가이기 때문에 혼자서 대응했다.

침략을 통해서 민족과 국가를 지배하려는 이러한 군국주의자들을 위해, 그것도 동양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등박문이 지은 자서전이나 다름 없는 자화자찬의 자료를 받아 훌륭한 위인처럼 각색을 한 책을 출간할 수 있단 말인가. 일제에게 강점당하고 식민지배를 당해왔던 북한을 비롯한 동서양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류의 책은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출간되는 이유가 뭘까. 상식적으로도 이러한 친일서적이 어떻게 나온 단 말인가.

그러나 친일파를 위해 구성된 4명의 변호사들의 변론 덕분인지 재판부는 '저자의 실명 공개와 일본간첩이라고 막연히 추정하였고, 일본자금을 받고 썼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며 2차례나 유죄로 판시했다. 200과 500만원의 벌금형 유죄를 받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일본인으로부터 자료를 받고 책을 썼다는 것은 밝혀 졌다. 일본자금을 받고 썼다는 것에 대해서 저자의 계좌를 추적해 달라는 요청은 묵살 되었으며, 저자에게 자료를 건네 준 일본인을 취재 및 증인으로 출석시켜 달라는 요청도 묵살 되었다. 이후 2008년 10월 대법원에서는 하심에서 필자가 위법성 조각을 하지 않았다며 형을 확정지었다. 
 
이후 네티즌들이 필자의 글을 다른 곳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저자로부터 고발을 당했으며, 필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게시판 등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추가 고소가 이어져 3건은 증거불충분, 이유 없음으로 기각 되었으나 검사가 바뀌면서 마지막 한 건은 기소되어 2011년 4월 최종적으로 유죄를 받았으며, 지난 8월에는 수배까지 받았고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민사적으로도 그자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으며, 당시 수백만명이 기사를 접하고 울분을 터트리며 수많은 댓글이 달렸던 본보와 네이버 포털사도 함께 피소당해 수천만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민족정기를 위해 기사를 허용한 네이버 포럴사측에 대해서 미안하고 고맙다.

그러나 대법원은 1~2심에서 위법성조각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판시했는데, 검찰조사때부터 사회적 공기와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며 민의를 대변했다고 위법성조각을 주장해 조서로 남겼고, 1~2심 모두 위법성조각을 주장했었다. 대법원은 이를 무시하고 기각해 버린 것이다.

그동안 격었던 아픈 기억을 되살리자면 회한도 따른다. 정말이지 이쯤해서 그만 두고도 싶다는 생각도 골백번은 더 했다. 하지만 필자에게 닥친 고통은 참을 수 있어도 우리 민족이 당해야하는 수모와 고통은 참을 수 없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니 독립이 되었니 하고 외치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 아직도 우리 강토와 민족 그리고 국민은 완전한 독립이나 자주국가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고 자기들끼리 기득권을 형성해 국민을 무시하고 배딱지 두드리며 떵떵거리고 살려는 친일민족반역자와 미국을 등에 업고 미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살기를 바라는 숭미 사대주의자들의 세상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부터 허리띠를 졸라매며 마음을 다진다. 그래서 시기가 되면 이러한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해 법원에 '재심'을 요청해,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이 나라에 기생하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친일기득권 층에 반성과 경종을 울릴 예정이다.

그래서 뚝뚝 떨쳐 버리고 일어서고자 한다. 그리고 <슬픈 조국의 노래>라는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마음의 결정을 한다. 애국지사 조문기 선생이 임종하시기 전까지 찾아가 말씀을 듣고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요약해 옮겨 본다.

“엄밀히 말하면 8·15는 민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슬픈조국의 노래> 중에서)


▲ 임종하시기 전 선생을 찾아 인터뷰한 사진. 신독립군임을 자처하는 일행에게 선생은 "당신들이 있어 기쁘다. 우리나라를 반듯하게 세워달라"고 말씀하셨다.     © 플러스코리아


부일민족반역자인 친일행위매국노에 대해 강력 저항했던 故 조문기 선생

과거 식민시대 친일파 문제 하면 입 다물고는 못 배기는 것은 아마도 조문기 선생을 빼놓아선 안 될 것이다. 가끔은 어차피 될 대로 다된 나라라는 생각에 민족이니 역사니 지껄여서 뭘 하랴 싶으면서도, 조문기 선생같이 평생을 변함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고초를 이겨내며 사셨던 일생을 보면서 다시금 필자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곤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새싹을 냄과 같이, 내가 암살되어 나와 같은 애국자들을 많이 낼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겠다." (30여 년간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여정을 끝내고 환국한 백범이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제보 받을 때마다 남겼던 유언이다.)

'20세기 가장 존경할 만한 민족지도자'를 선정함은 물론, 분단시대 북한의 주민들마저도 백범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백범정신 실천'을 위해 투신해 온 분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선생이 유언한 대로 선생을 닮은 애국자들이 사시사철 우리 조국의 강산에서 꽃처럼 피어난 가운데서 우뚝선 분이 조문기 선생이시다.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자리인 '부민관'에서 광복을 3주일 앞둔 1945년 7월 24일, 일제는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패망 뒤 예기되는 후환을 미리 싹쓸이하기 위해 이 땅의 독립운동자와 민족지식인 2, 30만 명의 명단을 만들었는데 그 살인 하수인으로 뽑힌 자가 바로 박춘금이다. 친일 매국노 박춘금 주도로 부민관에서 일제 패망 직전의 마지막 발악으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집회를 열고 있었다.

조문기 선생은 강윤국, 유만수 동지와 함께 식장에 잠입해서 사제 시한폭탄 두 발을 설치, 폭발시켰다. 이 의거로 19세인 청년 조문기를 김구선생을 위시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총애 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야인시대 방송 드라마에는 김두환의 승인과 협조로 한 것으로 묘사 됐는데, 이것은 거짓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청년 조문기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일제로부터 독립이 아닌 다시 친일민족반역자들이 나라를 차지하는 꼴을 보고는 산속 깊은 곳(설악산 등)으로 은거하였고, 친일정권이 들어서자 ‘제2의 부민관 폭파 사건(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항의)’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격은 뒤 다시 경기도 화성의 고향으로 돌아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초근목피의 세월을 살았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사회를 대변하는 책 <슬픈 조국의 노래>

▲ 지난 2003년 12월 29일 국회 예결위에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자료 조사에 책정된 예산 5억원 전부를 폐기한 상태에서, 지난 2004년 1월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달성 기념 행사에서의 조문기 선생
<슬픈 조국의 노래> 책에 나와 있는 내용 요점을 좀 더 열거하겠다. 남한만의 ‘단정(단독정부)’을 반대한 인민청년단 사건, 이승만 암살 정부전복 음모 조작사건, 성시백 사건을 비롯한 각종 사건에서 1948년 청년 조문기는 미군정과 이승만이 친일경찰을 내세워 남북협상파에 대해 체포,·고문을 자행하며 단정 수립을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경고’하려 했다.

옛 독립운동 동지들을 모아 북한산 6개소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키로 했다. 동시에 봉화를 올리고 서울 시내 고층빌딩 수십 곳에 “통일정부 이룩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같은 글이 적힌 펼침막 내건 뒤, 공중에 총 몇 발을 쏘는 평화적 무력시위를 계획한 사건이었다.

단정수립 반대 무장세력이 있는 것처럼 시위를 벌여 이승만과 미군정의 노골적인 남북협상 방해를 견제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조직에 숨어든 ‘프락치’ 때문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체포된 청년 조문기는 경찰서 취조실에서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당했다고 한다. ‘해방’이 됐다는 조국 땅에서 또다시 악랄한 친일 경찰한테 대못 박힌 각목으로 맞았다. 못이 몸속으로 쑥쑥 들어오는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하며 청년 조문기는 피눈물을 삼켰다. 선생은 고초를 당한 후, “분통 터지고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슬픈 조국의 노래 중에서)

우리나라에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계시지만 평생을 독립운동 하는 올곧은 마음으로 사신 분은 정말 흔치 않다. <슬픈 조국의 노래>를 출간해 뜻있는 후손들과 애국동지들의 심금을 울렸다.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찾으려했던 것은 분단된 조국이나 친일파 천국이 아니라고요. 친일파가 청산된 조국을 찾으려 한 건데, 이건 독립운동해서 나라 찾아 친일파한테 진상한 꼴이 된 거예요. 거기다가 나라도 분단되고···, 그러기에 남북통일과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올해도 광복절날 기념식장에 가지 않을 겁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기념식장에 초대되어 참석하고 청와대로도 초청받아 만찬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초라하지만 올곧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은 언제나 그런 자리를 피하셨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간다.”(<슬픈 조국의 노래> 중에서)

투데이김성태 11/10/09 [17:52] 수정 삭제  
  리복재회장님 어떻게 된일이입니까?
2008년대법원앞에서 통곡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전화드려도 받지 않으시니 더더욱 애가탑니다..
식민지배를 받았으면서도 정신을 못차린 야바위꾼들만 드득실거리니 님같은 분들이 그많은 고초를 받게 되는군요.
재판받으실때 전화라도 주시지 않구요.....
혼자서 그통을 감내하시니 안쓰러워 미치겠습니다
우리 언론인이라도 뭉쳐야 하지 않나요?
플러스코리아 대표님도 바뀌셨군요.
훌륭하신 분들이 많아졌으면 바랄게 없겠는데요...
몸추스리시고 조만간 연락 주세요.
애쓰셨습니다.
바다사랑 11/10/13 [16:40] 수정 삭제  
  리회장님의 곧은성정을 이용하는세력이 많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럽게 이세[상을 사시는지 알만한사람다 안답니다..
일제식민시대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
바다사랑 11/10/13 [16:40] 수정 삭제  
  그들릉 단죄하지 못한 현실에서 마냥 울먹이며 서있는 민중들이 원망스러울테지요
힘내세여
한숨 내쉬고 긴 호홉가다쉬며 미래를 위해 가셨으면 합니다...]
연락드릴께여
의정부아줌마 11/10/16 [10:39] 수정 삭제  
  정의를 세우시는 님이 계셔서 그나마도 좀 사는이유가 잇지요..
2005년도부터 알게된 이복재 기자님...
가진자보다는 소외되고 어려운사람을 위해 뛰셨던 기자님.
알만한사람은 다압니다...
심신이 고단하고 마음고생이 많으십니다..
넷상에 올려 많은분이 보게 할 것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언제나제대로된나라가 될까? 11/10/21 [10:01] 수정 삭제  
  기가차 말이안 나오네
어떻게 이런 나라 사법부 정의가 있나
이현령비현령의 나라
]그래서 못같은 나라 이 사회가되었지
속이 끓어 죽겠다 정말이지
j. hdsaer 11/10/24 [09:49] 수정 삭제  
  한국말은 잘못하지만 아름다운분이세요
그리고 페이스북서 이복재 당신 생일 축하도 했어요
Your Happy Birthday! Card
I Created a Special Birthday Card for You!
Happy Birthday!..
만정 11/10/29 [09:58] 수정 삭제  
  도와 드리지도 못하고 참으로 세상이다 식민지란 나라가 ==
백동 11/10/31 [14:37] 수정 삭제  
  얼마전에 모 매국노의 유산을 국가가 환수함은 위법이라는 판결이 나왔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법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몇푼의 돈에 침략의 원흉들을 미화한다면 민족의 자존감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법, 오호라. 가슴 아픈 법이여-.
민의 11/11/01 [06:08] 수정 삭제  
  우리는 친일파들이 보수의 탈을 뒤집어서고 벌이고 있는 저주의 굿판을 목도 하고 있다..



친일파를 일거에 숙청할 기회는 해방 후에 있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통일민족국가 수립과 함께 민족적 과업이자 역사적 당위였다.
그러나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친일파는 우리들 사이에 시퍼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 안타까운 현실은 해방 후 우리역사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결과이다.
상해임시정부와 김구선생이 염원이던 우리 손으로의 광복이 아닌 외세에 의한 광복의 결과물인 것이다.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민족해방운동세력이 집권하게 마련인데,
한국은 미국의 입맛에 맞는 이승만이 친일파들과 손잡고 정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근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고 본다.
점령군으로 온 미국은 한국민의 염원 따위는 관심이 없었고 치안유지와 대소반공기지로써의
한국의 역할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일제시대 관료, 경찰, 군인들을 고스란히 그 자리에 두었고
친일파들은 재빠르게 반공주의자로 얼굴을 바꾸고 그들의 생존은 물론 나라를 팔아 이룬 부귀영화를 계속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친일파들이 숭미와 반공에 목을 맬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수있다.
그들의 반공은 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닌 해방후 친일파를 일소한 공산정부에 대한 심연 깊숙한 곳으로 부터 스물스물 흘러나오는 원초적인 두려움때문이리라....
이런 맥락에서 숭미 또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할 필수조건인것이다.
미국이 절대선이 아니라는 것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다 아는 사실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이 시치미 뚝떼고 미국의 신민이 되기를 즐거이 하는 것은 그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그들이 진정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건전한 보수우익이라면 지금과 같은 무조건적인 숭미가 아닌
이나라를 위해 미국을 적당히 이용할줄 아는 용미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친일파문제는 한국사회의 원죄이다.
해결없이는 한국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친일파가 분단주의자가 되고 반북, 반평화, 반통일주의자가 되었다.
그것이 그들 생존의 필수조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파 결코 옛 이야기가 아니다.
그 후예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민족의 목을 조이고 민족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민족 최대의 현안인 것이다
민족반역 행위가 실정법으로 다스리기 어렵다면 역사적 징벌을 통해서
친일파를 모체로 한 냉전, 반통일주의자가 더 이상 생산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친일파 청산을 오늘의 우리마저 허지부지 지나쳐 버린다면
선열에 대한 큰죄를 짓는 건 물론이고 민족의 정신문화를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하는 것일 것이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이후 또 국란이 온다면 그 누가 나라를 위해 선열들이 그러했듯이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조국과 민족의 뼈와살,피를 팔아 이룬 친일파들의 영달과 부가 60년 넘게 온전히 보전되고 또 세습되고 있다. 조국의 심장부에 위치한 저 견고한 친일의성을 허물지 않고는 우리에게 완전한 광복절은 없다.

척결 11/11/01 [22:03] 수정 삭제  
  친일파매국역적들이 떵떵거리고 매번 이기는 이유는?

답은 *돈*!!!!!!!!이 있기때문이다........

또 그들이 이길수 밖에 없는 이유?
정치권에 속속들이 친일파의 후손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승만시대의 정치인은 거의 모두 친일파였다.

그러나 결국 리복재선생이 이기는 이유?
돈은 없어도 양심과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의 역사를 알린다는 사실이다.
너무 서러워 마시라
훗날 당신은 위대할테니...
건강하시고 힘내시지요?
리복재기자님 시인님 선생님 언론협회장님
정동진 11/11/12 [11:24] 수정 삭제  
  어찌 아프다하지 않겠는가~
돕지 못한 제자신을 책망해 봅니다.
리복재님같은 분들을 모르고 사는 세태가 비웃기라도하듯이 버젖히 떵떵거리고 사는 친일파들 미국파들
정말이지 가슴아픈 민족이 되었소이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간다.”
뉴스 11/11/17 [15:26] 수정 삭제  
  '광복절이 부끄럽다'국립묘지 안장 친일파 명단






오늘은 66주년 광복절입니다.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억압과 고통을 받던 세월에서 독립된 날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오점 중의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같은 동포를 괴롭히며, 일본에 충성을 다했던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해방되었지만, 오히려 친일파들은 권력과 부를 형성하여, 대한민국을 잘못된 가치관과 역사의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친일파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살다가 죽으면 다행인데, 이들의 후손은 친일의 대가로 받은 엄청난 재산을 다시 물려받고,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숭고한 애국지사와 함께 버젓이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애국지사 '김산'은 님 웨일즈의 주인공으로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으로 격찬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어 일본 스파이 명목으로 중국에서 처형되었지만, 그동안 사회주의 혁명가라는 이유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도 못했었습니다.

'김산' 같은 애국지사는 수십 년 동안 훈장하나 받지 못했지만, 친일파들은 떳떳하게 훈장도 받고 국립묘지에 당당하게 안장되어 있습니다. 오늘 광복절을 맞이해서 이런 비통하고도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내 나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친일파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백낙준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 예일대학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활동하며, 조선장로교 신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 부회장으로 친일에 적극적이었던 종교인 친일파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임전보국단'이 도대체 어떤 단체인지 알아야 합니다.

1941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친일 단체가 모여 만든 조직
이들이 내세운 사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침략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충성 그 자체였습니다.
▷ 국민생활 쇄신: 철저한 황국신민주의 생활
▷ 근로보국에 의한 국민개로(國民皆勞) 완수: 일본 침략 전쟁을 돕기 위한 노동력 착취
▷ 국방사상 보급:일본 침략전쟁을 대동아 전쟁으로 미화
▷ 전시하의 국책협력: 일본 전쟁을 위한 모든 물자 및 노동력 동원 협력

'조선임전보국단'은 일제 침략전쟁을 위해,일본군 강제 위안부와 학도병,강제 노역을 미화하는 시국 강연회는 물론이고,돈을 모아 일본 군용기 헌납 같은 모금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악랄한 친일단체였습니다.
이종욱은 친일승려로 3.1 운동 당시에는 만세운동에도 참가했지만, 그 후 변절하여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인물입니다. 특히 일제 군용기를 위해 전국 사찰에 모금액수를 할당하여 징수하거나,일본의 승리를 위해 전국사찰에서 승리기원 법회를 여는 등 조직적인 친일행적을 벌였습니다.

친일파 중에서 종교인의 타락은 일반인보다 더 치밀하고 무섭습니다. 이들은 종교라는 특성을 활용해서 조직적으로 모금 운동을 전개하고, 법회와 예배 시간에 적극적으로 일본을 찬양하며 자신들의 제자와 신도들을 일본을 위해 희생시켰습니다.

백낙준은 1950년 이승만에 의해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친일 행적으로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재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백낙준은 전두환 국정자문위원과 문교부 장관이었다는 자격으로 국가유공자 묘역에,이종욱은 초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애국지사 묘역에 지금도 누워 있습니다.




친일파를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 시대에 친일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냐? 그 당시 조선인은 모두 친일파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이나 반민특위에서는 명확하게 친일을 규정짓고 있습니다.

특히 공무원의 경우, 말단 면사무소 서기나 주사 같은 하위직을 친일파라고 규정하지 않고 직급을 정확하고 세심하게 명기해서 고위급 이상으로 친일 행적이 뚜렷한 자를 친일파라고 칭합니다.






일제강점기 공무원은 말 그대로 일본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 친일파라고 규정해도 무방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서는 고등문관 이상 고위직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엄민영은 일제강점기 고위공무원이 되는 엘리트코스인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조선총독부 임명으로 임실군수와 무주군수를 역임했던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당연히 친일파였지만, 주일대사로 죽었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황종률은 일본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일본에 충성하는 인재를 양성기관인 대동학원 출신이었으며, 단순 대동학원 출신이 아닌 만주국 경제부 금융과 사무관으로 일본의 태평양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종률도 충청북도 도지사와 체신부 장관을 거쳐 국회의원 재임중 사망했다고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선근이라는 인물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선근은 조선일보 입사 한 달 만에 사설을 쓰는 등 사실상의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 만주로 갔던 인물입니다. 이선근은 만주에서 만주국 협화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항일단체를 토벌하는 관동군을 지원하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에서 일본에 적극적으로 충성하였습니다.

만몽산업 주식회사 상무이사로 재직하던 이선근은 관동군에 군량미를 보급하면서 일본전쟁에 적극 참여한 친일파규정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입니다.

이토록 이선근은 친일파로 살았지만, 해방 후에는 정치적 아부 수준을 넘어, 정권에 기생하는 지독히도 뻔뻔하고도 몰염치한 삶을 살았습니다.

○ 일제강점기
“……대동아공영권의 가장 건실한 신(新)질서를 건설해야만 될 것은 유구한 인류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중대 사명으로 …… 좀더 솔직하고 좀더 용감하게 신체제 건설에 희생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 특히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활동은 ……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신흥제국(新興帝國, 만주제국 지칭)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자기반성으로 이 운동의 광휘 있는 실천은 장래 선계(鮮系, 조선인)국민에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반드시 좋은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봅니다……”―『삼천리』 1940년 12월호




○ 이승만 정권
1947년 8월 대동청년단을 창단하여 이승만 총재로 추대,이선근 본인은 부단장 겸 기획위원장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학생처장으로 국대안 파동 수습
1956년 문교부 장관으로 정,부통령 부정 선거에 적극 개입

○ 박정희 정권
“…민족,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유신(維新)정신, 새마을정신으로 우리 동대(東大, 동국대)의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동대신문(東大新聞)』, 1974년 7월 30일
1978년 정신문화연구원 설립 ‘유신이념의 한국 사상사적 체계화’ 설파

○ 전두환 정권
“전두환 장군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된다는 데 국민의 여망이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서울신문』, 1980년 8월 20일

이선근은 친일파가 그대로 살아남아 어떻게 이 나라에서 살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라는 책을 저술하여, 친일파들이 어떻게 친일을 은폐하고, 대한민국 역사를 왜곡시켰는지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인은 대한민국의 적군이었습니다. 독립군과 전쟁을 하는 군인 중에서 특히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친일파로 규정지어도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

이응준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활약한 지청청과는 달리 일본군 장교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항일조직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조선에 와서는 배속장교로 학생들의 군사 훈련 교관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으로 19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징병제를 선전하며 지원병제도와 학도병으로의 참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이응준은 일본으로부터 훈4등 서보장,훈3등 서보장의 훈장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미군정 고문으로 대한민국 국군 창설을 주도했습니다.

김창룡은 계급으로 보면 친일파가 될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헌병보조원 출신으로 얼마나 지독하게 항일조직을 토벌하고 적발하고 다녔는지 헌병오장까지 특진했던 그의 성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지독한 친일행각은 아랫 글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韓國/시사] - 김창룡,일본과 독재의 앞잡이가 아직도 국립묘지에 있다니

정일권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복무했습니다. 이 당시 헌병대는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간도헌병대 대장은 실질적인 그 지역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든 존재였습니다. 그 당시 정일권을 기억하는 중국인은 이런 친일파 인물이 어떻게 한국에서 버젓이 육군 대장까지 출세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일권은 자신의 모교인 광명중학교에서 '앞으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길이다'라고 연설하며, 조선인들의 군입대를 독려했습니다. 그는 일본인도 가기 어려운 만주국 육군대학을 거쳤는데, 이 과정은 일본군 현역장교가 장군이 되는 최상의 엘리트 코스였습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자신의 권력과 출세를 위해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이런 사람이, 해방되고도 승승장구하여 대한민국 육군대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은, 나라가 망해도 목숨을 바쳐 구태여 독립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증거를 우리 후손에게 알려주는 결과입니다.

일본군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친일파라고 매도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조선의 독립을 막아냈던 이들이 과연 '해방 후에 한번이라도 민족을 향해 사죄 했는가?'라는 질문에 떳떳하게 답을 할 수 있는가의 명제입니다.

[韓國/정치] - 일본특수부대출신 백선엽 장군이 한국의 영웅?

백선엽은 죽기도 전에 현충원 안장이 결정되었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방해하고 탄압했던 이들이 친일파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수장들이 되어서 민족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역사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공을 말하는 자에게 왜 그들이 적으로 규정했던 애국지사 독립 투사에게 한마디 사과도 없이 그들 옆에 떳떳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있는지, 어쩌면 이 사실을 아는 애국지사들은 무덤에서 하루빨리 도망가고 싶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립묘지는 신성한 민족의 성지입니다. 친일파가 당당하게 들어 올 자리가 절대 아닙니다. 광복절에 돌아가신 애국지사를 추모하기 보다,민족의 반역자들을 독립 투사 옆에서 하루빨리 이장해야 할 것입니다."

자료 및 참고 문헌: 구양근 (반민족문제연구소),정운현(오마이뉴스),민족문제연구소,,위키백과,국가정부기록원,반민족문제연구소,국립서울현충원 안장기록시스템,반민족연구소,문화재보존연구소.





제가 조사한 친일파의 국립묘지 안장 취소는 보훈처 자체가 친일파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쯤 이장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서훈을 취소한 친일파는 이장을 추진해야 하지만 아직도 그대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애국지사 묘역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희생한 영령을 모셔야 하는 숭고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일본의 성전을 위해 조선인들은 영혼까지 천황폐하에게 바쳐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조선인을 죽음으로 내몬 친일파 인물들이 묻혀 있습니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일제강점기에 가서 고문과 투옥으로 고생하는 독립군과 애국지사에게 외치고 싶습니다.

"먼 훗날 지금 당신을 고문하고 있는 자가 애국지사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냥 편하게 친일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당신의 후손을 위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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