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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조차 삭제당한 백정기의사-1

대한민국은 아나키스트 삼의사 중 왜 백정기의사만 내다 버렸나?

리복재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6/13 [10:40]

교과서에조차 삭제당한 백정기의사-1

대한민국은 아나키스트 삼의사 중 왜 백정기의사만 내다 버렸나?

리복재 칼럼니스트 | 입력 : 2013/06/13 [10:40]
[민족 역사 통일=플러스코리아]리복재 칼럼= 일제에게 식민지배를 당할 때,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분은 많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요 항일투사요 애국지사 중 가장 큰 공적이 있는 백정기,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삼의사'로 선정했다. 
 
▲ 1946년 7월 문효세자 묘 터였던 곳에 조성된 왼쪽부터 안중근의사 가묘,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     © 리복재 칼럼니스트

서울 효창공원에 가면 안중근 의사(장군)의 가묘(假墓)가 있고 그 옆으로 대한민국의 삼의사 이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가 있다. 대한민국 '3의사'에 들 분이라면 일제에 대한 항일투쟁이나 독립활동이 얼마나 폭넓고 대단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3의사’ 중 이봉창, 윤봉길 의사 두 분은 잘 알려져 있는데, 백정기 의사는 왜 알려지 않았을까하고 의구심이 든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왜 교과서에 삭제 당했을까?
 
독립운동가 및 항일투쟁을 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거대한 항일투쟁조직으로 만들고, 일제 1만톤급 군수송선을 파괴하고,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와 함께 결행한 폭탄투척, 일왕척살계획 등, 일제로서는 항일투쟁하는 인물중에서 가장 극악무도하고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인물이었겠지만, 대한민국으로선 독립을 위해 혁혁한 활동과 눈부신 의거로 모든 정열과 목숨까지 바쳤던 백정기를 모신 나라다. 중국인 10만명이 백 의사를 따랐던 근거에서도 그가 얼마만큼의 독립활동을 했는지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교과서에서까지 삭제당해버린 통한를 간직한 조국독립운동가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1896.1.19~1934.6.5) 의사가 되고 말았다. 백정기의사 순국 79주기를 통해 생애와 업적 그리고 왜 대한민국 교과서에서조차 삭제당해야 했는지 연재를 통해 진실을 밝힌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에서 백남일씨의 2남 2녀중 맏아들로 태어나 7세때 정읍 영원면 은선리로 이주하여 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백 의사가 태어나기 2년전인 1894년(고종 31) 고부에서 반외세, 반봉건, 민족자강의 기치를 내걸고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다.

흔히들 동학농민혁명이 종교적 발흥을 위해 동학교도가 일으킨 것으로 호도하고 있지만, 이때 동학은 종교가 아닌 우리 민족이 태고부터 믿고 찾은 '한아님' 또는 '한으님'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동학교도'로 호도하고 종교적으로 몰아붙여 왜곡하기에 바쁘다. 당시는 유교, 불교, 카톨릭교이 종교로서 존치되고 있었던 것이지, 종교에 찌들은 학자들의 학설은 양심을 저버리고 친일사관 내지 종교사관론적으로 접근해 종교적 외피로 따돌려 순수한 농민혁명을 과소평가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 하에서 백정기 의사를 논해야 맞다. 1894년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19세기 후반 조선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 및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사회는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있었던데 따른 자발적으로 일어난 순수한 봉기였다. 다만 한아님, 한으님의 사상을 따르는 동학의 조직력과 함께한 것이다. 당시 동학인은 80%이상이었다고 판단한다.(아래 후술 참조)

결국 삼십만명이라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일제군대와 일제에 협력한 세력과 봉건왕조세력에게 처참하게 살륙당하고 미완으로 끝났지만, 농민들의 지향은 일련의 봉기와 투쟁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오리의 제거,  봉건제도의 폐지, 친일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 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이로인해 농민대중에게 봉건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세력으로 강화시켰다는 의의를 갖고 있는 동학혁명이었다.

백정기가 배우고 자란 것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진정한 '민주주의'

백산은 전북 부안군 백산면에 위치해 있으며 1894년 4월26일 혁명군이 전북 부안군 백산면에 위치한 백산성터에서 죽도(竹刀)를 가지고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 장소로서, 혁명군이 일어서면 하얀 옷만 보인다 해서 백산(白山)이며, 혁명군이 앉으면 대나무창만 보인다 해서 죽산(竹山)이라 애칭이 붙은 곳이다.

백정기는 백산에 자주올라가 놀았다. 당시 혁명군의 함성을 듣게 되고 주위에 널부러져 있는 혁명군의 유물을 들고 놀았다. 자연스레 그때 당시와 접하게 되고 기운을 받았다. 동네 어른들의 당시 혁명군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수근거림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듣게 된다. 그리고 그때 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야만 했는 지 어렴풋이나마 알아가게 된다.

7세가 되던 해 정읍 영원면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그는 영원면 소재지의 지척에 있는 천태산(天太山)에  자주 올랐다 한다.  천태산 주변은 ‘백제고분군(돌방무덤)’이 많이 산재해 있어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역사에 대해 알게 해주는 곳이다. 민족이 무엇이고 역사가 무엇인지 어른들의 말과 함께 자연에서 터득한 백정기였다. 그리고 사서삼경 등 한문과 언문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동네에서는 이런 백정기를 두고 신동이라 불렀다.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일제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고, 또 그의 나이 13살이 되던 해, 정읍군 영원면 앵성리의 창년 조씨 문중 조숙경의 장녀 팔락 낭자와 혼인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일본의 식민지국가로 전락한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 1910년 경술년에 병탄이 되고 나라잃은 치욕스런 경술국치를 당한 통탄에 빠진 우리민족. 어릴때부터 주위환경과 스스로 터득한 민족과 역사를 배우던 백정기는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아야 했다. 결혼한 의사는 앵성리에 새로 집을 짓고 사랑하는 아내와 잠시 미래를 꿈꾸며 살았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여운, 특히 하늘과 세상은 자율정부를 지지하고 강제권력을 배격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꿈꾸던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예 백정기에게 그저 평범하게 살지 못하게 만들고 만다. 이 혁명으로 인해 민족과 역사 그리고 조국이 무엇인지를 일찌감치 깨달았던 탓 때문 이었다. 의사는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동학이 '천도교'로 명명되고 종교로서의 가치를 띄운 시점이기도 했다. 
 
▲ 삼각산 우이동 봉황각에서 천도교종학대학원생들의 지도자 수련과정. 앞줄 왼쪽에서 3번째가 박충남 의창수도원장, 그 옆은 이정희(공주대 교수) 종학대학원장, 임운길 전 교령. 사진=2009년도 1월     © 리복재 칼럼니스트

(참조: 동학에서 1905년 을사늑약 후 종교화한 천도교. 식민지배를 받던 시기인 1931년 월간지 '혜성'의 종교전선종횡기(김병순 기자)에 따르면, 식민지인 당시의 이 나라 종교인 현황을 알 수가 있는데, 기독교(개신교-천주교 서양종교 총칭)를 믿는 사람은 28만 여명, 불교(동양종교 총칭)를 믿는 사람들은 16만여명이었으며, 그러나 천도교를 믿는 사람은 무려 610만여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을 때 동학이 종교화 되었어도 우리민족 대부분은 천도교를 믿고 따랐던 것이며, 이후 일제와 서양종교세력(일제와 미제가 맺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의 악랄하고 극악하리만치 탄압과 압제로 뿔뿔히 흩어지며 국외로 흩어져 독립활동, 망명, 유랑를 하거나 숨어지내야 했다.)

나라가 병탄된 2년 후인 1912년 고종황제의 아들 이강 왕과 천도교 손병희 교주는 삼각산 우이동 계곡에서 밀담을 나눈다. 일제 헌병의 감시가 삼엄해 봉황각에서 거사를 논하다가는 일제에게 염탐당할 것을 우려해 계곡물이 굽이치는 곳에서 대한제국독립을 모의하고 결의했다. 독립에 필요한 지도자 양성이 급선무였다. 이강 왕이 자금과 뒤를 봐주고 손병희 교주는 지도자 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지도자 수련과정은 보국안민에 입각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회복을 위해 49일씩 수련과정을 통한 독립군 지도자 양성이었다. 이게 바로 3.1독립만세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장장 7년간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런데 33인의 지도자 중 서양종교인이 있는데, 천도교에 따르면 당시 손병희 교주가 일제에게 다양한 종교지도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양종교 목사인 이승훈과 만나 독립만세 취지를 설명하고 결행을 의논하는 자리를 갖는데, 이 자리에서 이승훈은 '목회자를 섭외 하려면 자금 5000환(지금의 10억정도의 가치) 정도가 필요하다'고 말해, 결국 손병희는 이 돈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훈은 거사를 준비하는데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3.1만세 하루 전날 밤에 나타나 3.1만세에 넣을 명단만 주고 갔다고 전해진다. 이게 3.1만세운동에서 33인 민족대표 중 서양종교인이 15명일 것.

서울과 고향을 오가던 백 의사는 이 만세혁명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그는 3.1 만세운동을 전후하여 일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규합과 자금염출에 힘쓰면서 그해 8월 인천에서 일본인들의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중국의 만주일대의 심양 방면으로 피신한다.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이희영 , 유자명 , 이을규 , 정화암 , 신채호 선생 등과 자주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중국을 근거지로 수차례 국내를 왕래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펴다 일시 일제 경찰에 구금되었으나, 의사의 기지로 무사히 나와 1922년에 북경(北京)으로 재차 망명한다.

1924년 상해임시정부 김구선생 등 동지들과 결의하여  일왕 처단과 일본 수력발전소를 파괴하기로 계획하고 일본으로 건너 갔으나, 갑자기 일어난 관동대지진 발생으로 뜻을 못이루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왔다.

북경에 온 의사는 이회영, 신채호선생 등과 함께 더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그해 6월 재중국조선아나키스트에 가입하였다. 또한 이희영 , 이을규 , 이정규 , 유자명 , 정화암등과함께 재중국조선아나키스트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정의공보' 를 발간하는 한편, 상해에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서 직공으로 근무하면서 중국인 노검파, 대만인 범본량, 아나키스트연맹 등과 손을 잡고 노동자들의 사상계몽에 진력하였다. 당시 백 의사를 따르는 군중이 십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중점 1. 아나키스트가 무정부주의자인가?
 

▲ 영화 아나키스트. 중국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한중 합작.     © 편집부

아나키스트를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 하고 있다.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
 
그런데 무장항일투쟁 등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자, 일본 도쿄대학 게무리야마 센이치로라는 교수가  아나키즘(anarchism)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고 말았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번역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일제본국에서 조차 침략과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들이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아나키스트로 가입해 반정부 투쟁을 하고 있었고, 식민지배에서 독립해 조국을 되찾으려는 독립군들과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제3국(자본주의, 공산주의, 중립 국가)에게는 '무정부주의'는 마치 정부조직이 없는 혼란을 야기하는 주의로 심어주어 인식하도록 해, 분열과 혼선을 가지게끔 조작하고 의도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테러리즘 아닌가요?”, “아나키스트도 투표를 하나요?”, “아나키스트도 정당활동을 하나요?”,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나요?”

그래서 그런지 이 나라에서는 아나키스트에 대해 이런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승만, 박정희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의 이념의 산물이다.
 
일제가 식민지배 및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항일저항 및 투쟁으로 일관하는 아나키스트들을 분열시키고 제압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무정부주위자'로 만들어 놓은 덫이라는 것을, 광복 후 국민들에게 교육시키지 않는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백정기를 지워버렸다. 아예 교과서에도 삭제해 버렸다. 대한민국 삼의사 중 한 분인 백정기의사를 위정자들인 국가 수반들이 내다 버린 것이다.
 
이는 아직도 진정한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슬프고도 심란한 국가와 국민이 돼버렸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민족이 되고 있다. 일제에게 충성했던 친일파들의 세력은 우익으로, 우파로, 보수로, 둔갑해 민족반역짓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런데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실현하기 위한 것이란 점을 차차 열거해 진실을 밝혀 나가기로 한다. [이어서 다음편이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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