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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단편소설> 911, 그날 3회
 
박종규 소설가

 

 

<박종규 단편소설>  911, 그날 3회

 

재생 3.

벽제 화장터의 앞마당은 노란 나뭇잎들이 바람에 쓸려 다닌다. 하늘은 높고 푸르지만, 그 푸름이 쓸쓸한 마음의 골을 더 깊게 한다. 지금 수아는 불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뜨거운 불을 생각하면서 몸서리친다. 한 줌의 가루로 남겨지기 위해 살았던 삶. 육신은 살아 있을 때만 사람이고 죽으면 처리의 대상이 된다. 결국은 헛것이 될 육체에 갇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등바등 세상과 싸워나가야 한다. 먼저 세상을 등지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깨트린다.

 

“형부, 너무 낙담 마세요.”

 

땅에 뒹구는 낙엽을 쓸며 검은 치맛자락이 다가온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슬픔의 무게를 덜어낸 듯 가볍게 바람에 실려 있다. 처제 윤아. 자매는 일란성 쌍둥이다. 둘은 용모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빼닮아 혼동할 때가 잦았다.

 

수아와 데이트하던 시절, 윤아가 대신 나와 데이트가 끝날 무렵에서야 동생이라는 것을 알았던 적이 있다. 자매는 사이가 좋았다. 윤아를 보면 수아가 윤아로 다시 살아난 것처럼 아내의 주검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녀는 공항에서부터 슬픔을 가누지 못했고, 언니의 딸 다미를 안고 한참이나 통곡했다. 그녀의 구두코가 나을 향해 멈춰 선다.

 

“다미는 걱정하시지 마세요.”

 

“……?”

 

무슨 말인지 얼른 가늠이 가질 않으나 담담한 속이 담긴 투다.

 

“당분간 제가 형부 집에 드나들게요.”

 

“……!”

 

윤아는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더니 더 머물지 않고 유가족 대기실로 발길을 돌린다. 윤아는 그렇게 내게로 왔다.

 

당분간 다미는 장모가 맡기로 했다. 처제는 내 집에 수시로 들렀는데 이따금 다미를 데려왔고 집안일을 하나하나 챙겨 언니가 떠난 자리를 말끔하게 정리했다. 물론 나의 기분을 살펴가면서 없앨 것과 놓아둬야 할 것을 구분 지었고, 자연스럽게 수아의 흔적은 엷어져 간다.

 

다미도 이모를 엄마처럼 잘 따른다. 얼굴이나 목소리가 엄마나 다름없으니 다미가 이모를 엄마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처제는 천연덕스럽게 엄마의 역할을 했다. 외국 출장이 잦은 나는 집 비우는 일이 많았고, 그런 날은 처제가 집을 지키곤 했다.

 

수아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처제를 나의 아내로 생각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언니의 뒤처리를 위해 집에 드나드는 것으로 여겼으나, 그녀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일들이 많아지면서 처제는 점점 필요한 존재가 되어 간다.

 

윤아가 언제까지 이렇게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술기운이 조금 있는 날은 처제를 수아로 착각하곤 했는데, 처재는 그런 나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미를 위해서라지만 처제는 벌써 반년 이상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다. 하루는 퇴근하여 집에 오니 문이 잠겨 있었다. 무심코 키를 돌려 거실에 들어선 뒤 욕실 문을 열다가 그만 처제의 샤워하는 모습과 맞닥뜨렸다. 서로 놀라서 얼른 문을 닫아 버렸지만 묘하게도 그 뒤부터 우리 사이는 남이랄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 느낌이 들게 되었다.

 

“형부, 저 그냥 이렇게 눌러 살면 안돼요?”

 

“응? 나야 좋지!”

 

언젠가 처제가 불쑥 꺼낸 말에 나는 생각 없이 맞장구를 쳤는데, 그날 처제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얼른 다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 처제가 연락 없이 오지 않으면 불안했고, 처제도 내가 출장을 갈 땐 유난히 더 챙겼다.

 

양말이나 속옷은 항상 세탁소를 이용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일도 처제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주변에서는 재혼을 서두르라고들 한다. 다미가 어릴 때 서둘러 짝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회사 업무에만 몰두한다.

 

일에 빠지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 때는 공부가 전부였고, 지금은 일이 전부다. 내 머리가 크려면 일에 빠져야 하고, 업무를 볼 때는 수아에 대한 아픈 기억마저 덮어 버릴 수 있었다. 수아를 잃고 좌절감에 빠졌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단 하나였다. 그녀를 만났던 쌍둥이 빌딩, 내가 사력을 다해 올랐던 그 계단의 기억!

 

“형부, 오늘 저녁 약속 없으세요? 밥 사주세요.”

 

처제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들떠 있다.

 

“어, 그래. 다미는?”

 

“할머니한테 있어요. 여긴 우리 집이에요.”

 

“알았어. 어디로 갈까?”

 

“회사 근처로 제가 갈게요.”

 

“그래. 퇴근 시간 맞춰 나와.”

 

다미와 함께한 외식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처제가 전화해서 밥을 사달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전화 목소리로 보아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회사 주차장 앞에서 기다리던 처제를 태우고 북악 스카이웨이로 향한다. 처제는 그날따라 영락없이 언니의 모습이다.

 

김 사장 일행들과 함께 갔던 레스토랑이 산등성이에 있다. 우리는 창가 쪽 테이블로 안내된다. 격자무늬로 가름질 된 유리창 밖에서 이른 달이 소롯이 지켜보고 있는데, 보름이 가까운지 달이 가득 차 있다. 식사를 시키기 전에 엽차를 들면서 처제는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눈치다.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었나 보다.

 

“여기 멋진 곳이네요. 언니랑도 왔었어요?”

 

“아니.”

 

“음……. 언니 있을 때는 회사 사람들 집에도 오고 그랬다고 들었어요. 필요하면 제가 그런 일 도와드릴 수도 있는데…….”

 

“…….”

 

“아무래도 결혼을 서두르시는 것이 좋겠지요?”

 

처제는 귀여운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자꾸 묘한 질문만 해 댄다. 회사 일에 묻혀 있다가 보니 재혼은 생각도 못했지만, 처제가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은 이제 서서히 우리 집 드나드는 일을 그만두려는 것이려니 싶어서 내심 섭섭하다.

 

“오늘 처제, 그렇게 입으니… 새색시 같아.”

 

“…….”

 

“왜? 듣기가 불편한가 보군!”

 

“형부.”

 

“응?”

 

“저, 사실은 결혼해요.”

 

“어?”

 

너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이다. 처제는 뺨이 불그레해지더니 천연덕스럽게 표정을 바꿔 빙그레 웃으면서 곧바로 말을 잇는다.

 

“형부 반응이 참 궁금했어요. 호호호.”

 

“얼떨떨하구먼! 축하해야 하는 건가? 기분이 묘해지네.”

 

들어서는 아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이젠 떠나는구나 싶은 허전함이 밀려온다. 하긴 언젠가는 들어야 할 말이다. 언제까지 처제를 붙들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착잡함이라니…….

 

“그렇죠? 기분이 묘해지시죠?”

 

처제는 흘깃 눈웃음을 친다.

 

“암튼 여자들이란 알 수가 없군! 먼저 상대가 누군지 내게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고…….”

 

마치 내 사람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느낌이랄까, 갑작스러운 말에 감정을 제어하기가 어려웠으나 어느새 깊어져 버린 자신을 느낀다. 처제는 당연히 상대를 찾아 떠날 사람이다. 얼마나 더 애써 주기를 바랄까.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못했어. 같이 식사라도 할 걸 그랬네. 어떤 사람?”

 

처제와 시선을 부딪치기가 곤란해서 물컵만 만지작거린다. 처제는 처음부터 시종 내 표정을 살피고 있다.

 

“좋은 사람이에요. 아주!”

 

처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힘을 준다.

 

“그래, 처제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꼭 그래야 해.”

 

“네…….”

 

“…….”

 

종업원이 와서 식사 주문할 때까지 침묵이 흐른다. 내 눈언저리에 스미는 외로운 기색을 처제에게 읽히는 느낌이다. 나는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여 종업원을 부른다.

“우리 제일 비싼 메뉴로 할게요. 좋은 와인도 함께.”

 

테이블에 가지런히 모은 윤아의 작은 손등을 가만히 덮어 쥔다. 따스한 온기 속에서 미세한 맥박이 느껴진다. 가만히 그 맥박에 나의 호흡을 맞춘다. 이젠 수아를 온전히 보내야 한다.

 

“그런데……. 어떡하지요, 형부?”

 

이번에는 처제가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로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응? 무슨…….”

 

“우리 착한 형부 혼자 놔두고 떠날 수가 있어야죠!”

 

“……무슨 소릴! 지금까지 한 수고만 해도 너무 과분한데.”

 

“…….”

 

처제는 말을 잇지 못한다.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본다. 그동안 내가 처제를 수아로 착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깊은 생각에 빠진 처제가 슬그머니 손을 빼면서 입을 연다.

 

“형부, 있잖아요…….”

 

“……?”

 

“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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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30 [12:54]  최종편집: ⓒ plu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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