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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49)좌절된 중립화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6/10/17 [12:22]

대한정통사(49)좌절된 중립화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6/10/17 [12:22]

 대한정통사(49)좌절된 중립화

 

  ‘친일적인’ 광무황제와 ‘부패한’ 대한국 고관들을 엉터리 약속과 거액의 공작금으로 회유하면 쉽사리 공작을 성사시킬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고 있던 삼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뭔가 일이 이상하게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삼륜이 도착소식을 알리자마자 광무황제로부터 전달되던 접견소식이 열흘이 지나도록 깜깜 무소식이었던 것이다. 12월 3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칙사자격으로 방문한 이용익에 의하여 접견날짜가 1월 2일로 결정되었음을 통보받았으나, 그것마저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예전과 다른 대한국의 분위기에 초조해진 삼륜은 1월 7일에 광무황제의 심부름으로 온 궁내협판 직책의 민 영린을 통하여 ‘시국에 관하여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므로 알현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으나 그래도 접견소식은 오지 않았으며, 접견이 지연된 것에 대하여 수차례에 걸쳐 양해를 구하면서도 2월 1일로 재차 예정되었던 접견도 또다시 무산되고 말았으므로 삼륜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처럼 삼륜 자신은 광무황제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대단한 것으로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무황제로부터 실상은 기피되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광무황제가 더이상 일제의 모략이나 농간에 넘어가지 않기로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고조되어 가는 노일 양국간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대한국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서의 중립화안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친일파 이지용이 외부대신으로 있는 등 친일매국노들이 대한국정부내에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한국의 중립화만이 대외정책상 최선의 방안이라고 믿고 있는 애국적 대신들이 대한국정부내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들을 보면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문하고 온 현 상건을 비롯해서 이 학균·이 인영 등이 중립주의를 주창하였고 이 용익·강 석호 등 황제의 측근들과 함께 황제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월 23일에는 세계 각국에 중립성명을 보내었던 것이며, 만일 일본도 대한국의 중립선언을 인정한다면 두 나라간의 밀약체결에도 응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대한국이 마침내 중립선언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자 가장 크게 당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었다. 겉으로 늘상 내세워 온 대한국독립보장의 미사여구들과는 관계없이 오매불망 대한국을 집어삼킬 궁리만 하고 있던 일제침략자들이 대한국을 중립국으로 남겨둘 리가 만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국을 둘러 싼 열강들이 대체로 한반도중립화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반면에, 일제는 대한국의 중립선언을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린 채 서기 1904년 2월초에 대한국으로부터 아무런 양해도 받지 않고 일제군대를 불법적으로 상륙시켰으며, 대한국위정자들을 군사력으로 위협하면서 저들과의 공수동맹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하였다.

 

  서기 1904년 2월 8일에 이미 여순항구를 봉쇄버리면서 전쟁에 돌입한 일제는, 2월 9일에 인천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공격하고 약 2천여명의 육군을 인천에 상륙시키고 곧바로 서울로 침범하였다.

 

일찍이 10년 전의 청일전쟁때 일제의 무단국토점거와 궁성난입으로 인하여 큰 곤욕을 치루었던 광무황제는, 예측할 수 없는 일제침략자들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을 사태에 대비하여, 유사시에는 평양으로 거처를 옮기실 각오까지 하고 평양에 소규모의 행궁을 시급히 건축토록 독려하며 대한국 나름대로의 방어책을 강구 중에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국제적 상식도 통하지 않는 무법자(국제깡패집단) 일제에 의하여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동안 초조하게 기다렸던 삼륜은 그 위세를 타고 2월 11일에 광무황제를 접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일제의 군사력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황제를 접견한 삼륜은 그동안 구상해 왔던 한일협력안을 제안하면서 ‘중립선언을 철회하지 않으면 후환(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등)이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까지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이 용익은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중립선언을 자진 철회할 용의가 없소. 당신 스스로도 불과 몇 년전까지 ‘대한국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소?”

 

하고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답변에 궁색해진 삼륜은,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소. 청일전쟁의 경험으로 볼 때 이번에도 대한국 측이 자진해서 일본에게 동맹체결을 요청하는 것이오.”

 

라고 강변하면서 중립선언을 철회하고 일본과 동맹을 맺으라고 억지를 썼다.

 

  사실 한반도의 중립화 문제는 수차례 제기된 바가 있었고, 심지어는 오만무도한 임권조 조차도 의정서체결을 끝까지 반대한 이 용익이,

 

“지금처럼 변화무쌍한 국제정세 하에서는 대한국이 굳이 전쟁에 말려 들어 갈 조건을 만들 필요는 없소. 더욱이 세계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가 만약 육전에서 일본에게 승리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가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대한국을 병탄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위험한 일본과의 동맹보다는 차라리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옳은 대외정책일 것이오.”

 

라고 주장하자 ‘일리가 있다’고 수긍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자들이 저들의 뱃장대로 밀고 나가는 데는 더 이상의 의논이 필요치 않았다.

 

  일제가 집요하게 의정서체결을 강행하려 하자 참정대신 심 상훈과 군부대신 이 용익은 광무황제께,

 

“이런 중대사는 내각회의에 회부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하고 상소를 올렸고, 그에 공감한 황제의 뜻에 따라 내각회의에 상정되었다. 그러나 외무대신 임시서리인 이지용은 참정대신의 서명도 없이 조약체결에 응함으로써 매국에 앞장섰다. 끝까지 의정서체결에 완강하게 반대했던 이 용익은 의정서의 강제체결이 이루어짐과 함께 일제헌병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납치당하고 말았으며, 이 용익과 뜻을 같이 하던 길 영수와 이 학균과 현 상건도 ‘대한(對韓)정책을 반대하는 한국요인’이라고 지목되어 납치당할 뻔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3월 16일에 다행히도 상해로 탈출할 수 있었다.

 

  광무황제는 대한국으로서는 이미 중립을 이루기 위해서 대한국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고, 중립을 선언한 나라를 불법점거한 일본의 무도함을 세계 각국이 다 알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과, 일제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위협이 단순한 위협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는 현실성 등을 고려하여 일단 일제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당대 세계 최대의 육군국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던 러시아와의 한 판 승부를 겨뤄보려는 막강한 전투력을 배경으로 살기등등한 일제의 위협에 처한 대한국정부는, 마침내 목숨을 걸고 대한국의 중립화를 실현시키려 기도했던 밀사들의 노력도 헛되이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굴욕적인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됨으로써,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에 큰 암초를 만난 셈이 되고 말았다.

 

  비록 강압에 의한 것이기는 하였어도 그래도 그 알량한 한일의정서에 의하면 일본은 어디까지나 대한국의 독립주권을 보장할 것을 약정했고, 그에 따라서 대한국은 내정개혁에 대하여 일본의 조언을 받기로 하는 한편 일본군의 대한국내 주둔을 허용했던 것이었다. 한일의정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6가지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한일 양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의 친교를 지속 보유하고 동양의 화평을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국은 일본을 확신하고 시정개선에 관하여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임

  2. 일본정부는 대한국 황실의 확실한 친선의 뜻과 안전강령을 담보함

  3. 일본정부는 대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보함

  4.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국 황제의 안녕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는 임기응변으로 필요한 조치를 빨리 취할 것이며, 대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십분 편의를 제공함. 일본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쓸 수 있음

  5. 양국정부는 금후 상호 승인없이 본 조약의 취지에 반하는 협정을 제3국과 체결하지 않음

  6. 본 조약에 기재되지 않은 상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대표와 대한국 외부대신간에 임의로 정함

    

  그러나 처음부터 대한국의 독립 따위는 꿈도 꿔본 적이 없는 일제는 3월 17일에 일제추밀원의장인 이등박문을 대한국에 보내어 반대세력을 강력히 탄압하도록 추진하는 한편, 친일파들을 무마하여 보호국으로의 편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공작을 추진했다. 그리고 약 일주일간의 대한(對韓)공작을 마치고 두 달 만에 이등박문이 귀국하자 이등박문이 중심인 일제의 원로회의는 5월 30일에 일방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對韓)방침’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6월 11일에는 일본왕 명치의 결재를 얻어내면서 대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정책을 저들 내부적으로 추진했다.  

 

  그 내용은 “(일본)제국은 한국에 대하여, 정사상(政事上)및 군사상의 보호의 실권을 장악하고, 경제상으로는 더욱이 우리 이권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간단한 것이었으나 그러한 방침을 정한 이유라는 것을 덧붙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존망이 일본의 안위와 직결되므로 타국이 먹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2. 일본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강대국과 전쟁해 온 것도 다 한국의 독립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3. 그런데도 한국은 스스로 독립을 유지할 만한 힘이 없으므로 일본의 보호하에 두고 일본 방위의 전초기지로 삼을 수밖에 없다.

  4. 한일의정서로 어느 정도 보호권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국방·외교·재정에 관하여 더욱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며, 경제적으로도 모든 이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의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등등..

    

  또한 일제는 ‘방침’에 이어서 대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서 ‘대한시설강령(大韓施設綱領)’이라는 것을 작성했는데, 그것은 군사·외교·재정·교통기관·통신기관·척식 등 각 부문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국제적 음모의 계획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8월에는 소위 ‘조선시정개혁안’이라는 것을 강제로 시행하면서, 8월 22일자로 외국인 고문을 고빙(顧聘)한다는 내용의 ‘(제1차)한일협약’을 강요하였다.

 

그에 따라서 10월 17일에는 대한국의 재정고문으로 일본인 목하(目賀:메가다)를, 12월 27일에는 외교고문에 친일파로 유명한 미국인 스티븐스를 채용하도록 억지를 부림으로써 대한국의 재정과 외교는 일제침략자들에게 장악되어 버리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내정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일제는 각 도마다 경무관에 해당하는 경시이하 수명씩의 경찰관을 경무보좌관이라는 이름으로 배치해 놓고 일제의 경찰제도를 한국에 이식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해버렸다. 차후 예상되는 반일투쟁에 대비하려고 교활한 일제는 일찌감치 경찰제도의 장악에 주력했던 것이다.

 

일제의 노골적인 야욕이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원색적인데다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핑계로 대한국을 강점한 왜군의 행패가 극도로 포악했으므로 그동안 대세만을 관망하고 있던 대한국의 애국지사들은 일제히 일제타도를 외치며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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