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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52) 애국자들과 국권수호의 열정

애국자들과 국권수호의 열정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6/12/23 [18:14]

대한정통사(52) 애국자들과 국권수호의 열정

애국자들과 국권수호의 열정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6/12/23 [18:14]

 

 

애국자들과 국권수호의 열정

 

 [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개혁당추진 인사들은 곧 반대운동에 돌입했으나 간신들과 일제의 농간으로 이 용익이 파면당하고, 망명이라는 명목 하에 일본에 강제로 납치당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굴욕적 의정서체결과 일제의 횡포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거세어지면서, 예전에 독립협회와의 불화로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던 보부상단의 중심 인물인 길영수·이정규·최낙동, 이재화 등까지도 의정서를 조인한 외부대신서리 이지용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벌였다.  

 

  보부상단의 세력은 여론을 크게 좌우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두려워 한 이지용은 한 때 동대문 밖의 별장으로 피신하여 근신하는 척하고 은둔해버렸고, 의정서를 강력하게 추진했던 친일매국노 구완희의 집에는 보부상단의 상무원이 폭탄을 투척하여 파괴했으며, 이어서 이지용의 집에도 폭탄을 투척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이에 일제는 정부로 하여금 보부상들의 집합체인 상무사를 해체시키도록 강요하였으므로, 일단 해체되었던 상무사는 얼마 후에 ‘대동협회’라는 새이름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대동협회는 이 준에게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여론을 크게 좌우하고 있던 또 하나의 세력은 언론기관들이었는데, 황성신문과 제국신문 등은 공공연히 의정서를 비난하였으며, 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orea Daily News)를 발행하던 영국인 베델은 영문판신문을 통하여 외국에까지 의정서를 비판하는 논설 등을 실었다.

 

베델은 이 준 등 애국지사들과 뜻이 통하여 자신의 조국인 영국과 동맹국이기도 한 일제의 만행과 압박을 비난함으로써 외국인으로서는 반일의 선봉에 서게 된 인물이었다. 베델은 종로에서 연합탄핵연설회도 주관했고 이 준은 연설회의 사회를 맡아 보는 등 긴밀한 협조하에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노일전쟁은 일제의 승세로 굳어져가고 있었고, 5월 3일의 봉황성 전투에서 일제가 승리하자 친일파매국노가 들끓던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등이 일군사령부와 일제공사관까지 찾아 가서 승리를 축하하는 등 법석을 떨었고, 5월 18일에는 러시아와의 국교단절을 의결하였으며, 그에 따라서 친일매국노들은 더욱 설쳐대었다.

 

이러한 사태진전을 우려한 애국지사들은 충군애족하는 우국지사들의 결집체인 대한보안회를 구성하여 대항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세계평화를 내세운 세계적십자 운동의 여파가 대한국에도 밀려 왔다. 일제를 국제적으로 견제할 필요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주장해 오던 이 준은, 러시아대신 일제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는 때마침 밀려 온 세계적십자운동이 유력한 대안이라는 판단 하에 적십자 국제기구에 정식으로 가맹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준이 하는 일은 무조건 반일적인 것으로 곱게 보고 있지 않던 친일매국노들은 이 준을 반국가혐의로 체포하여 4개월간 감옥에 가두었다가 아무런 ‘반국가’ 혐의도 찾을 수 없자 할 수 없이 석방했다. 석방된 이 준은 곧바로 동지들과 함께 배일격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배포하여 거족적 단결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야욕은 가히 끝이 없어서, 노일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자 4237년(서1904) 6월에 이르러 일제는 노골적으로 대한국의 토지를 수탈하려고 소위 ‘황무지개척권’을 정부에 대하여 요구하였다. ‘개척권’은 일제자본가인 일본농구(農具)주식회사 사장 장삼(長森:나까모리)이 일제대리공사 적원(荻原:오기하라)에게 청원하여, 전국에 있는 관청 및 민간인소속 토지를 제외한  대한국 궁내부 소유의 산림·천택(川澤)·황무지를 개척할 수 있는 특허를 달라고 조른 데서 비롯되었다.

 

  그 내용이 공식적으로 조인되기 전에 한성신문에 게재되자 국민의 여론이 분노로 들끓었으니, 정 기조와 최 동식 등은 항의격문을 뿌리고 이 상설은 항의하는 상소장을 올려서 반대하였으며, 외부(外府)에서조차 궁내부의 의사를 거절하였고, 민 영환 등 애국대신들은 개혁당 출신들을 비밀리에 민 영환의 저택으로 불러들여 사태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에 열중하였다. 특히 이 상설의 상소문에 대하여 광무황제는 그 충성심을 아름답게 여겨 그 뜻을 받아 들이기로 했으므로, '광무가지(光武嘉之)'라는 말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이 준 또한 여러 동지들과 힘을 모아 일제침략야욕 분쇄 등 보국안민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보안회를 조직하였으며, 곧이어 6월 3일에는 종로네거리에서 황무지개척권을 일제에 허가하려 했던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외부대신 이하영을 성토하였다. 성토당한 두 매국간신배들은 당황했으나 곧 황제에게,

 

“보안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일본과의 사이에 일대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사오니 보안회를 박멸해야 할 줄 아옵니다.”

 

하고 은근히 위협하면서 화를 면하고자 하였다. 일단 일제와 정면충돌하는 것만은 막아야겠다고 판단한 황제는 할 수 없이 보안회를 해산하라는 조칙을 내렸고, 일제의 사주를 받던 경무청에서는 즉시 관계자 80여명을 체포하여 일제의 헌병사령부로 넘겨버렸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제2선에서 활동하던 이 준은 남은 인사들과 새로운 인사들을 모아서 보안회를 단시일 내에 다시 조직했다. 이 준은 얼마 후인 6월 하순경 종로네거리에서 연설회를 마련하여 매국노들과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일대 웅변을 토하였다.

 

이에 감동한 애국시민들과 이 준의 열변을 들으려 상경한 수만명의 군중들은 크게 환호하며 이 준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 준의 용이주도한 조직구성방안에 의하여 전 참정대신 심 상훈이 보안회의 회장이 되어 있었으므로 위세가 당당했고, 이번에는 두 간신배들도 손을 쓰기가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성난 군중들에 의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자, 민병석은 일제공사관으로 은신하고 이하영은 일제헌병사령부로 도망쳐서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심상훈에게는 독립운동에 대한 뚜렷한 지조는 없었으므로 얼마 안 가서 두 간신배들의 회유공작에 말려들어서 보안회를 사임하고 말았으므로 보안회는 다시 한 번 일대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이 준은 민 영환·이 상설등과 의논하여 보안회 대신 대한협동회(이하 '협동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으니 조직구성원들은 다음과 같았다.

 

‘회장 : 이 상설 / 부회장 : 이 준 / 총무 : 정 운복 / 평의장 : 이 상재 / 서무(庶務)부장 : 이 동휘 / 편집부장 : 이승만 / 지방부장 : 양 기탁 / 재무부장 : 허 위 등등‥’

이로써 볼 때 협동회에는 당대의 열렬한 애국지사들이 운집했음을 알 수 있고, 일제조차도 함부로 손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7월 4일에 이 준이 협동회를 대표하여 일제공사 임권조를 찾아가서 그 특유의 웅변력과 뱃짱으로 조리있게 설득시킨 결과, 마침내 황무지대부허가문건을 돌려받아 가지고 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준이 그 문건을 황제폐하께 돌려 드리게 되자 광무황제는,

 

“짐이 불명(不明)한 소치로 조종창업(祖宗創業)의 유지를 일조(一朝)에 상실케 되어 불행히 여기던 중에 지금 경등이 협력 동심하여 협동회의 이름으로 국토를 멱환(覓還:찾아돌아옴)하여 오니 경등의 갈충보국(竭忠報國)은 백세일유(百世一有)라 하겠다. 짐은 깊이 경등의 뜻과 행동을 가상(嘉尙)히 아노라. 각자 돌아가서 안업(安業)하기를 바라노라.”

 

라고 진심으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쾌거를 이룩한 후 협동회는 조직을 총재체제로 하여 갱신 강화하였으니, 총재에 민 영환, 부총재에 이 도재와 심 상훈, 회장에 이 준, 도총무에 양기탁, 지방부장에 이 상재, 평의장에 이 동휘, 평의원으로는 지 석영, 나 철, 김 석항등의 편제로 보강하고 회원은 6천여명으로 확대되어 더욱 활발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민 영환은 민병석과 인척간이었으나 나라일을 위하여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간신배로 지목된 민병석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일제는 군대와 헌병대를 동원하여 협동회에 대한 총검거에 나섰고 이 준 등 주요간부들도 체포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의 가까운 인척이기도 한 민 영환에 대해서만은 일제도 손을 쓸 수가 없었으므로 민 영환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이 준 등 협동회 간부들의 생명만은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준과 민영환 간에는 생사를 초월하는 동지애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무황제도 국제적십자기구 가입을 앞장 서서 추진했던 이 준의 참 뜻을 알고 12월 21일에 정식으로 가입하도록 명한 일이나, 대한국 적십자사의 초대 총재로 이 준이 선출된 일등은 군신간에 국가장래를 위하여 말없이 통하는 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바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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