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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 55] 미국에서 외면당한 대한국 밀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3/20 [12:53]

[대한정통사 55] 미국에서 외면당한 대한국 밀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3/20 [12:53]

  [대한정통사 55] 미국에서 외면당한 대한국 밀사

 

 

[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4230년(서1897)에 독립협회가 박영효를 추밀원장으로 추대하려 했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했던 독립협회회원 이승만은, 여러 동지들과 모의한 끝에 4232년(서1899) 1월 30일에 탈옥을 시도했다가 다시 잡혀서 약 6개월간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는 ‘왕당파’로 알려진 박돌팍(朴達北)이라는 형리에게 수시로 악형을 당했는데, 이 때 느꼈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으로 인하여 그는 황실에 대하여 평생동안 혐오감과 적개심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같은 해 7월 27일에 재판관 홍 종우에 의하여 마침내 형이 확정되었는데, 탈출과정에서의 죄과가 경미한 것으로 나타났으므로 간신히 사형은 면하고 ‘태형 백대 집행 후 종신형’을 받게 되었다.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던 그에게 태형 백대란 그 자체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형이 집행되려 하자 참관했던 홍 종우가 먼저 퇴장했고, 태형을 실시한 옥리 김 윤길도 예상외로 관대하게 매질시늉만 하여 형식적인 형집행만 한 후에 감옥에 돌려 보냈으므로, 그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4235년(서1902)에는 유길준의 동생인 유성준을 비롯하여 신흥우·이 준·양 기탁·안 국선·박 용만 등도 시국사건(보안회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었으므로, 그들은 옥중에서 많은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앞날에 대비했다. 특히 이승만은 옥중에서 미국처녀인 헤로드가 들여 보내 준 성서를 보면서 영어공부에 열중하기도 했고, 아펜셀러·벙커·제임스 게일·언더우드·애비슨 등 미국인선교사들에게 감화되어 기독교로 완전히 개종했으며,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는 등으로 미국인선교사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다. 옥중생활을 하던 그는 4237년(서1904) 4월 6일에 미국에 있던 필립 제이슨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정당했으며, 모든 문화인들이 옹호하여야 할 원리원칙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본인은 충심으로 정의와 문명을 위하여 싸우는 국가(즉, 일본)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일본이나 그 이외의 기타 국가도 대한국 스스로 노력하며 다른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대한국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대한국이 앞으로도 어린애처럼 행동을 한다면 외국의 속국이 될 것은 확실합니다.”

 

  아무리 노일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고, 필립의 새 조국이 된 미국이 공식 및 비공식적으로 영국과 함께 러시아에 맞서려고 하는 일본을 지지하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필립의 주장은 항일투쟁에 나서고 있던 어떠한 애국지사들도 받아 들일 수 없는 황당무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갑신왜란의 미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소위 독립협회를 이끌었다는 그가 대한국의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일가가 풍비박산(風飛雹散)되어 버린 자기자신의 진정한 원수가 누구인지를 그 때까지도 전혀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승만이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감옥생활에도 이골이 날 때쯤 되었을 때, 광무황제는 그가 옥중에서도 ‘독립정신’이라는 애국계몽책자를 내고 계몽사업 및 선교사업 등에 종사하는 등 그 나름대로의 애국심과 탁월한 대중설득력을 지니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여 4237년(서1904) 8월 9일에 특사령을 내렸다. 그것은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큰 재목으로 본 광무황제의 특별배려였다.

 

  특사령으로 풀려 난 이승만은 노일전쟁이 진행되면서 왜구들의 대한국진출과 폭압이 급격히 가중되고 있는 현상을 목격하고, 왜구들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나라는 미국밖에 없겠다는 신념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는 독립협회 시절에 정부고위직 관료이면서도 독립협회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던 한 규설과 민 영환을 찾아가서 자신의 의견을 토로하고 대책을 논의한 끝에, 대한국의 외교활동이 일제에 의하여 크게 제약받고 있는 상태에서는 미국정부에 대한 공식적 원조요청은 불가능하므로 적임자를 선발하여 밀사를 미국으로 파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적임자로 결정된 것은 영어를 잘 하고 미국선교사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승만이었다. 광무황제 주변에 남아 있던 몇 명 안되는 충신들 중 최고위급 관료였던 한 규설과 민 영환이 그와 같은 국운을 건 주요한 결정들에 대해서 광무황제와도 의논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그와 같은 논의가 오가던 중에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미국측의 알선에 의해서 노일간에 강화회담이 시작되리라는 소식을 접하신 광무황제께서는, 자칫하다가는 대한국의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유린될 것을 우려하시어, 같은 해 10월중에 당시 동경에 머물고 있던 대한국공사 조 민희에게,

 

“미국정부가 현재 조약에 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한국의 독립유지에 온 힘을 기울여 동양평화를 유지해 주기를 바라며”

 

라는 내용의 밀서를 미국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하셨다. 풍전등화와도 같은  국운이 걸린 밀명을 받은 조민희는 즉시 태평양을 건너 가서 주미 대한국공사관의 고문인 니이담(Needham)을 통해서 밀서를 국무장관인 헤이에게 보냈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미국정부로부터 기대했던 회신이 감감무소식이 되자 심히 불안감을 느끼신 광무황제는 마침내 미국인들과의 친분이 두텁고 영어에 능숙한 이승만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하여, 미국측이 4215년(서1882)의 수호조약에 의하여 공정하게 처신해 주기를 의뢰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밀사’였으므로 표면상으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처럼 꾸며서 왜구들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이미 나라가 겉잡을 수 없이 왜적들의 농간에 휘말려 들고 있는 상태에서 이승만을 특별사면한 후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임무를 띈 밀사로 파견한 조처는 밀사로서의 임무수행 이상의 심모원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미주에서의 해외독립운동 기반을 닦기 위한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밀명을 받은 이 승만은 4237년(서1904) 11월 4일 오후 1시에 유학여권과 워싱턴 주재 대한국공사관에 보내는 편지를 트렁크 밑에 감추고 이 중혁과 함께 서울을 출발했다. 제물포에 도착한 이 승만은 다음 날인 11월 5일 3시에 미국선적의 오하이오(Ohio)호로 목포·부산을 거쳐 왜열도의 신호(神戶:고베)에 도착했는데, 거기에서 미국인선교사 로간(Logan)을 만난 그는 11월 13에 로간의 교회에서 ‘여비를 지원해 줘서 감사하다’는 등의 연설을 하고 11월 17일에는 시베리아호(Siberia)호로 떠나서 11월 19일에는 중간기착지인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하와이에서 우선 교포들의 후원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헐버트밀사의 외교노력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었다. 이 승만과 윤 병구는 11월 30일 새벽까지 숙의를 거듭하여 윤 병구는 당분간 하와이에 남기로 하고 이 승만은 우선 워싱턴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 승만은 12월 6일 오전 10시에 레이(Howard Leigh)와 함께 미국본토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안 중혁의 마중을 받았다. 그 곳에서 레이는 차비가 없어서 남기로 하고 이 승만 혼자 워싱턴으로 향하여 12월 그믐날 저녁 9시경에 도착하였다.

 

  이 승만은 아이오와써클(Iowa circle)에 있는 대한국공사관을 방문해서 홍 철수를 만났는데, 홍 철수는 이 승만을 도와주라는 민 영환의 편지를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사관자문역인 김윤정과 셋이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승만은 대화를 통해서 현지 대한인사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이 승만은 곧이어 상원의원이자 대한국주재 미국공사를 역임한 딘스모어를 방문하여 민 영환과 한 규설로부터 받은 밀서를 전달하고 협조를 구했으나, 그로부터는 헤이국무장관과의 인터뷰를 주선해주기로 한 외에 별다른 협조를 얻어낼 수 없었다. 이 승만은 워싱턴 포스트지를 찾아 가서 일제의 대한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글을 투고했으나 ‘정의롭다는’ 미국 국민들로부터도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얼마 후에 그는 딘스모어와 함께 국무장관 헤이를 방문하여 한시간 반 동안 인터뷰를 했는데 헤이는,

 

“대한국인들은 대한국에 있는 미국선교사들을 사랑해야 하며, 대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박해하지만 않는다면 말썽이 없어질 것입니다.”

 

라는 등의 전혀 관련도 없는 횡설수설만 늘어 놓으면서 선교사들과 기독교포교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가서 그는 이 승만에게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회가 닿을 때는 언제든지 미국은 개인이나 정부측 입장을 막론하고 한미조약의 의무를 완수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승만과 딘스모어는 일단 인터뷰 결과에 만족하고, 이 승만은 그 소식을 민 영환과 한 규설에게 전해주었으며, 딘스모어는 서울주재 미국외교단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헤이는 그 해 여름에 사망함으로써 그러한 헤이의 약속은 허공에 떠 버리고 말았다. 한편으로 이 승만은 김윤정과 꾸준히 접촉하면서 민 영환에게도 김윤정을 신태무 대신 대한국공사로 임명해주기를 요구하여 관철했는데, 그것은 이 승만 일생일대의 또 하나의 커다란 실수였다. 김윤정은 워싱턴 주재 일본공사관과 접촉하면서 이 승만의 활동을 알려주고 있던 일제의 밀정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4238년(서1905) 6월이 되자 1개월 내에 포츠머스에서 노일평화조약이 체결되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는 가운데 미육군장관 태프트는 루즈벨트의 딸인 앨리스 및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동양여행을 하고 있었다.

 

단순한 여행목적의 앨리스와는 달리 태프트는 일본과 비밀협약을 하려는 숨은 목적을 지니고 있었는데, 첫 기착지인 하와이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 윤 병구의 주도하에 7월 12일에 군중집회를 연 대한국인들은 교포 8,000명의 이름으로 대한국의 독립을 위한 거중조정을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윤 병구와 이 승만을 루즈벨트에게 특사로 보내기로 결의했다. 교민들은 웨이드맨을 통하여 태프트로 하여금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받아 내었고, 이 승만과 윤 병구는 곧 워싱턴으로 떠났다. 그러나 태프트는 그 길로 동경으로 가서 7월 29일에 저 영원히 저주받을 태프트-가쓰라 비밀협정을 체결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알 길이 없던 이승만은 끈질긴 노력끝에 4238년(서1905) 7월 6일에 쌔거모어 힐(Sagamore Hill)별장에서 휴양 중이던 루즈벨트를 만나서 청원문을 전달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대통령 각하,

 

  본인들은 하와이에서 열린 대한인교포 8천명의 특별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을 전한국 국민을 대표하여 각하께 고하고 원하는 바입니다. 노일 양국이 개전한 후 대한국은 일본의 작전을 도우려고 기지의 사용을 허가하고 많은 편익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한 바 일본은 그 후 수천명의 악질적이고 난폭한 일본인들을 대한국내에 풀어놓아 가장 난폭한 행동으로 대한국인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18개월동안 우리 정부로부터 온갖 이권과 특전을 강탈하여 오늘날은 일본인들이 대한국내의 가치있는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한국 사람들은 지리상 인종상 상업상 일본인들을 신뢰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대한국인의 출자(出資)로서 일본인들을 위한 발전과 그 개척사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많은 이권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미국과 미국인은 공평한 행동을 사랑하며 만인의 정의를 위하여 노력하는 공정한 지도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조항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강화담판을 할 때에 우리 대한국이 그들 강국의 희생이 되지 아니하도록 구원을 요청하는 바이며, 이 때야말로 미국의 지원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절하고 절박한 대한국 측의 의사가 받아들여지기에는 루즈벨트의 거의 일방적인 친일성향이 너무나 강했다. 루즈벨트는,

 

“그대들이 청원서를 공사관을 통하여 보내준다면 그 문서를 평화회의에 즉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대한국공사가 국무성에 청원서를 갖고 오도록 하세요.”

 

하고 표면상으로는 정중하게 답변했으나, 그것은 이미 일제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던 대한국의 외교현실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루즈벨트는 그 청원서가 ‘공식문서’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깨끗이 거부하고 말았던 것이다. ‘공식문서’가 아니라는 이유는 그 후로도 루즈벨트가 대한국과의 모든 공식적인 국제조약상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거절하는 데 쓰이는 편리한 용어가 되고 말았다. 당황한 이 승만과 윤 병구는 서둘러서 ‘공식문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김윤정을 찾아갔으나 김윤정은,

 

“이선생! 이 청원서는 우리나라 본국정부의 훈령없이는 국무성에 보낼 수가 없읍니다.”

 

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그에 대하여 이 승만이 독립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했던 약속을 상기시키며 격렬히 항의했으나, 김윤정은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하고 문을 닫아 버렸으며, 흑인수위로 하여금 두 사람이 공사관에 오면 쫓아 버리라고 명령까지 했다. 이 때 이 승만은 비로소 김윤정이 일제의 주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루즈벨트가 대한국을 업수히 여기게 된 데는 그 자신의 친일적 성향도 성향이지만 그의 친구들인 스티븐슨과 조지캐넌의 역할이 지대했다. 즉, 스티븐슨은 일제로부터 막대한 금품을 제공받으면서 미국신문에 대한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사들을 계속해서 게재하고 있었고, 조지캐넌은 대한국이 자치능력이 없다고 루즈벨트에게 역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루즈벨트는 마침내 대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이미 추진한 후였으니, 대한국의 밀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일 리가 없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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