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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신의 요람, 간도 용정(龍井)기행

윤동주 생가와 일송정을 돌아보며...

문화부 | 기사입력 2007/12/30 [17:37]

민족정신의 요람, 간도 용정(龍井)기행

윤동주 생가와 일송정을 돌아보며...

문화부 | 입력 : 2007/12/30 [17:37]
▲ 윤동주 시비앞에서 필자  이명권
용두레 우물이 있는 연변의 수도 용정을 다녀 온 이후 비로소 그 때의 감흥을 몇 자 적어 보는 지금, 먼저 조용히 눈을 감고 경건한 기도를 올립니다. 민족시인 윤동주 선생님이 나시고 사시던 보금자리를 찾아 간 것뿐 아니라, 항일 투쟁과 민족 통일을 위해 일생을 불태운 선구자들이 모여 사시던 용정 일원을 찾아 갔던 그때의 숙연한 심정이 아직도 뇌리와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곳의 풍경을 함부로 담아낼 수 없는 엄숙하고도 경건한 분위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곳 길림 사범대학으로 발령을 받아 온지 만 한 달이 지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건국 기념일 덕분에 4박 5일의 여정으로 백두산과 용정 그리고 두만강을 다녀오기로 생각하고 지난 10월 3일 10시간의 열차 여행 끝에 이곳 사평에서 연길에 도착했습니다. 연길에 사는 친구 조민호 시인을 오랜만에 만나 늦은 밤까지 살아온 얘기를 나누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백두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홀로 갔던 것입니다. 민족의 영봉(靈峰) 백두산 등정에 관한 감격은 차마 기행문으로 담을 수 없어 부족하지만 짧은 시, 3편(박달나무, 천지, 장백폭포)으로 대신했습니다. 연길에서 백두산을 하루 만에 돌아오기 위해 새벽 4시차를 타고 5시간을 달린 끝에 백두산 기슭에 도착하였고, 마침내 장엄한 백두의 기상을 체험했던 것이죠. 오르던 것만큼이나 하산의 아쉬움은 컸습니다. 하지만 산 아래 멀리 연길에는 또 다른 민족의 웅지(雄志)가 꿈틀거리는 용두레 우물, 용정(龍井)이 있었던 것이죠. 
  다음 날 아침, 연길에서 용정은 자동차로 약 30여분 걸리는 30리 길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로 가는 경우와 세 명이 택시를 타는 경우는 약 8원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민호 시인과 연변과학기술대 신수영교수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용정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신수영 교수는 미국에서 약 20년을 사시다가 노후에 이곳으로 교편을 잡아 오면서, 국립안동대학교 안병렬 교수의 후원으로 연길의 조선족 후예들에게 한글 서적을 보급하는 일을 하시면서 잊혀져 가는 2-3세대의 민족 언어와 혼을 전수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기상이 있는 분 같아 단번에 의기가 투합하여 용정 기행을 권했더니 그분도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가보지 못했다하여 함께 나섰던 것이죠.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용정에 조선족 마을이 생긴지는 1877년,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이재민과 평안북도의 김인삼 등이 처음으로 14호가 해란강가(지금의 용정시 서교)에 모여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시작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족이 처음 개척한 이곳 용정에는 아직도 70%의 조선족 분포를 보이고 있습니다. 황무지를 개척하여 평화롭게 살던 이 곳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직후 1908년 일본은 ‘조선통감 간도파출소’를 세워 우리 민족을 박해하기 시작했으나, 애국적 민족 호걸들이 몰려와 학교를 세우고 민족 의식을 고취함으로써 1919년 3.1운동 시에는 이곳에서도 ‘3.13 만세운동’으로 대대적인 운동을 함께 전개했다고 합니다. 이때 물론 많은 순국선열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지요. 

일행을 태운 택시가 용정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당도한 곳은 용정 중학교였습니다. 학교 안으로 들어서자 교정 우편으로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담은 시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  간도 용정의 윤동주 시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한참을 침묵한 후에, 좌측에 세워진 또 하나의 기념비를 보았습니다. ‘연합 기념비’로서 일제 시대에 세워진 은진 중학교, 명신여중, 동흥중학, 광명중학, 대성중학, 광명여자중학의 여섯 개 학교를 합쳐서 용정 중학교로 만든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었습니다. 본관 이층 건물의 입구에는 옛 대성중학교의 간판이 걸려있고, 아담한 붉은 벽돌에는 담쟁이가 기어올라 이곳을 졸업한 옛 선조들의 고독한 발자취를 위로하는 듯, 새로 찾아오는 길손들에게도 환영의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이곳 6개의 용정 중학교를 졸업한 많은 위인들 가운데는 윤동주 시인과 그에게 결정적 감화를 준 김학연 목사, 그리고 윤동주와 벗하던 민족 통일 지사 문익환 목사 등 숱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세 운동 때를 비롯하여 연길 감옥에서 이름 없이 숨져간 위인들도 더욱 많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더욱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용정' 지명의 기원이 되는 용두레
▲  용두레 우물가에서 필자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용두레 우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설적인 노래가 되다시피 한 ‘선구자’의 두 번째 구절이 바로 ‘용두레 우물가’인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우물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살리는 생명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물가에 모여 아낙들은 이 물을 길어가면서 생명의 밥 짓기를 거듭했을 터이고, 일제의 침탈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던 대장부들은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자 젊은이를 교육하고 육성하면서 외치던 타는 목마름을 해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듯 역사는 변천하는 것인지, 점차 도시화 되어 가는 용정시내의 한 복판에서 용두레 우물의 옛 모습은 빌딩 숲에 가려 초라했지만, 그래도 장엄한 기색을 잃지 않았습니다. 족히 100년은 넘었을 한편에 서 있는 거대한 수양버들이 우물의 역사적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고 있었던 것이죠.    

▲ 윤동주 생가 앞에서 필자
이곳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우리는 이제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찾아갔습니다.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니 40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조민호 시인이 비싸다면서 버스를 탈것을 권해 강의가 바쁜 조 시인을 연길로 먼저 보내고, 신 교수와 둘이서 12인승 남짓한 소형버스를 타고 잘 포장된 도로 주변에 무르익어 가는 곡식과 수확한 노란 호박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시골길로 달린 후 8원을 주고 윤동주 생가가 있는 마을 명동촌(明洞寸)까지 도착했습니다. 늘 다니는 버스 안내원은 한족(漢族)이었던지 윤동주 생가를 몰랐지만 함께 탄 조선족 여학생이 마치 있어서 그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도로 밑으로 난 양지바르고 비교적 넓은 평원에 자리한 윤동주 생가는 명동촌으로 들어가는 바로 입구에 있었습니다. 실개천이 흐르는 들판 너머 멀리 아늑한 산이 병풍처럼 휘두르고 있었고, 온 종일 따사로운 햇볕을 받을 수 있는 양지바른 곳에 네 칸 방 기와집의 본채와 옆에 딸린 곳 간 채가 있는 생가가 텅 빈 채로 먼 곳을 찾아 온 길손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원래의 생가는 없어지고 다시 세운 생가였지만 윤동주 시인은 이곳에서 1917년 12월 30일 아버지 윤석영과 어머니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던 것이죠.  
▲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생가를 들어가기 전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가 달린 교회였습니다. 허름하여 족히 오래된 건물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지만, 예사롭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이 바로 명동교회였습니다. 교회 입구 한 쪽에 비석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독립운동가로서 교회를 세운 설립자 김약연(金躍淵) 목사를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석은 박해의 흔적으로 일부 손실되고 글자가 깨어지는 등 수모를 겪은 채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고목이 잘려나가고 밑 둥만 남아 있는데, 그 나무에서 30여명이 일제 시대에 학살을 당했다 하니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마치 제암리 교회의 일제 만행을 보는 듯 하여 더욱 의분(義奮)이 솟았습니다.   

▲  명동교회의 설립자 김약연 목사 전시관
교회당 내부로 들어가서 십자가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 뒤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나오려고 하는데, 안내원 한 사람이 달려와서 다시금 자세히 들려주는 데, 과히 역사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전시된 사진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명동 교회의 유래는 물론 민족 애국지사들이 이곳 교회를 통해 얼마나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혼을 불태우며 사라져 갔던가를 소상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 할 수는 없지만,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영은 이 명동교회의 장로로서 지도자적 인물이었고,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학교의 교원이었고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배경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윤동주가 후에 일본 동지사 대학에서 공부했던 배경도 아버지의 역할이었던 것이죠. 윤동주의 이력은 잘 아는 대로 이곳 명동 소학교와 은진중학교, 평양의 숭실중학교, 다시 고향 용정의 광명중학교, 그리고 서울의 연희(연세)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동지사 대학에서 공부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리스도교 계열의 학교였다는 것은 그와 그의 집안 배경 그리고 교육과정이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원이 설명해 주는 놀라운 사실은 윤동주 시인이 일제의 감옥에서 어떻게 죽어 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내막은 아직도 모르지만 주변의 증인과 정황을 미루어 보면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는 것인데, 1943년 시모가모 경찰서에 붙잡혀 간 7월 14일부터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은 1945년 2월 26일 사이의 불과 1년 7개월 만에 20대의 젊은 시인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독립운동의 혐의로 받은 2년의 형량치고는 당시로서는 경범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이유는 같이 붙들려 간 고종형님이었던 송몽규의 죽음과 그의 증언을 통해 추측 할 수 있습니다. 시체를 인수하러 갔던 윤동주 시인의 부친과 당숙인 윤영선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그때까지 살아있던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그는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기를 이 주사는 바로 인체 실험용이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시체를 찾으러 간 아버지에게 일본인 간수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동주 선생은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라고 전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간디는 동족의 과격 힌두교인에게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헤, 람”(오, 신이여)하고 죽어 갔다지만, 윤동주 시인은 이국 하늘에서 무슨 마지막 울부짖음을 외치고 쓰러져 갔을까요? 
 
▲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되는 일송정
처연한 발걸음으로 생가를 빠져나와 우리는 다시 일송정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는 이제 서녘으로 서둘러 기울기 시작하는 듯하여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으나, 택시도 없기에 돌아가는 버스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 두 일행은 무작정 걷다가 차를 타기로 하고 일송정을 향하여 걸었습니다. 먼발치에 선바위가 눈앞에 들어 왔습니다. 그곳은 민족 지사들이 바위에 올라 의사(義士)를 도모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지점 언저리에 문익환 목사님의 고향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생가가 복원되지 못하고 있고 언젠가 그곳에도 민족정신의 웅지(雄志)가 발현 된 역사적 유적지로서 자리매김 하기를 바래보기도 하면서, 선구자들의 노래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가사를 흥얼거리자, 신수영 교수님은 한곡을 청했습니다. 노래라면 거절할 나도 아니어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단번에 소리를 뽑았습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일송정에서 바라본 해란강
노래가 끝날 무렵 멀리서 한대 차가 달려왔습니다. 버스도 아니고 택시도 아니었습니다. 아무차라도 손을 들었지요. 그야말로 히치하이킹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다가 다시 서서 우리를 태워주어 용정 시내까지 단숨에 달려갔고, 고마워서 5원을 주었으나 그들은 끝내 사양했습니다. 통행료가 5원이었기에, 통행료라도 보태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고마움을 전하고 우리는 일송정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15원에 택시를 타고 어둡기 전에 산기슭까지 올라갔습니다. 기슭에서 다시 정상까지는 걸어서 족히 30분은 가야했습니다. 알고 보니 정상까지 길이 나 있었던 것을 우리는 남산을 오르듯이 둘러 올라간 것이지요. 드디어 정상에 올랐습니다. 숨 가쁜 하루의 일정이 잠시 이곳에서 정지되는 듯했지요. 그리고 그리던 그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님의 품에 안기듯 가만히 일송정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용정 시내를 가로지르며 동쪽 아래로 내리 흐르는 해란강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역만리(異域萬里)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그들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민족 해방과 민족 융성의 정기를 뿜어내던 이곳. 한 그루 해방의 나무 일송(一松)을 생각하며 정자를 마련한 이 곳에서 조국이 있고 동지가 있으며‘우리’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벅찬 감격에 말을 잃을 뿐이었습니다.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용정 시내가 이제는 길림성의 연변 자치주로서 조선족이 이루어 낸 유서 깊은 도시로 날로 변모해 가고 있지만 서쪽의 평강벌판은 우리의 조상들이 일찍이 이곳에 처음으로 벼 농사법을 전수했다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이 사실은 일송정을 내려오려 하자 마치 올라 온 조선족 연변 농림부 산하 고위직원이 우리에게 알려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연구차 온 농촌진흥청 연구 개발국 국제기술협력과 소속 국가기관팀장인 농업연구관 김태헌 농학박사를 안내하던 차에, 아무도 없던 일송정에 때마침 올라와 우리를 만나게 된 사람이지요. 일송정의 정기와 해란강의 역사를 가슴에 담아두고 땅거미가 질 무렵 다시 시내까지 걸어서 돌아가야 했던 우리에게 마침 천사처럼 찾아 온 그들의 승용차로 편안히 연길시내 숙소 근처까지 잘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조선족 동포와 고국 동포의 덕을 또 한번 본 것이지요. 조상이 일군 아름다운 터, ‘용정의 우물’가에서 오래 오래 자라 갈 생명수(生命樹) 같은 한 그루 아름다운 과일 나무를 심어 보기를 다짐해 봅니다.
 
[가곡]선구자는 본래 '용정의 노래' ..선구자는 누구인가?
 
가곡 <선구자>의 무대가 되는 일송정(一松亭)은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서 서남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비암산(琵岩山)정상에 있다. 연길-용정-화룡 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용정을 지나자마자 왼편 언덕 꼭대기에 자그마한 정자 하나를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일송정이다.

그러나 일송정은 정자가 아니라 한 그루 소나무라는 설이 유력하다. 멀리서 보면 이 소나무의 모습이 마치 정자와 닮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일송정이라 붙였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소나무 옆에 나무 정자가 있어 누군가 그 정자의 이름을 일송정으로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송정으로 가는 비암산 초입에는 해란강경기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해란강 경기장은 연길 경기장과 함께 연변프로축구단인 장백호랑이팀의 홈경기장이기도 하다.

이 경기장을 지나면 주인을 알 수 없는 공동묘지를 지난다. 이 무덤군을 지나 비암산 정상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비암산 8부 능선부근 비포장 산길 옆에는 간도로 이주했던 여류소설가 강경애의 문학비도 보인다.

비암산은 그리 높지 않은 나지막한 산이지만 사방이 대부분 평원이라 높게 보인다. 일송정에 올라보면 동쪽으로는 용정시와 서전벌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해란강, 평강벌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발해 초기 황성이었던 중경현덕부 자리도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다. 발해시기엔 비암산 꼭대기가 봉화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봉화대는 연길시의 주산인 모아산과 연길 인민공원의 소돈대와 서로 연결돼 있다.

비암산 정상 절벽 아래에는 크고 작은 소나무가 무성하지만 일송정 바로 옆 절벽 끝에는 수령 20년쯤 됨직한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이 소나무는 2003년 3월 용정시정부와 3.13용정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인근 용정시 승지촌에서 캐다 심은 소나무다.

그러나 이 소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1938년까지만 해도 수령 수 백 년이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 아마 그 모습은 현재 연길 소하룡에 있는 천년송과 비슷한 모습이리라. 원조 일송정인 이 소나무는 마치 바위 위에 걸터앉은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용정의 조선인들은 이 일송정을 용정을 지키는당산나무로 여기며 신성시했다.

또 용정 일대에서 활약하던 독립 운동가들은 이곳을 비밀집회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일제가 민족정기가 깃든 용정 남산 당산나무의 존재를 곱게 봐줄리 만무했다.

일송정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본군은 이 소나무를 과녁삼아 사격연습을 하거나 소나무껍질을 벗겨내 구멍을 뚫어 대못을 박는 등 모진 짓거리를 했다. 결국 일송정은 일본군에 의해 말라 죽고 말았다.

그 후 소나무와 정자는 조선인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세월은 흘러 1990년 한국의 한 단체가 용정시정부의 협력으로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었다. 그러나 이 소나무도 오래가지 않아 고사했다.

소나무가 고사한 원인에 대해선 땅이 척박해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다는 설과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나무가 죽으면, 다시 심고 하기를 8번. 드디어 2003년 3월 9번째로 심은 소나무가 지금까지 살아 버티고 있는 것이다.

1990년 일송정 부근에는 또 10여m 높이가 넘는 대리석 선구자탑을 세웠다. 선구자탑에는 가곡 <선구자> 1. 2절과 노래의 유래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선구자탑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했던 1992년 중국정부가 폭파시켜버렸다.

그 후 1996년 9월 용정시와 자매결연을 한 한국 거제시의 한 독지가는 다시 선구자탑이 있던 기석 위에 가곡 <선구자>와 <고향의 봄> 한글가사를 새긴 노래비를 세웠고, 2000년 6월 한국의 한 기업가가 남북한 정상이 만났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해 북한노래인 <반갑습니다> 노래비를 추가로 세웠다.

그러나 이 노래비에 새겨진 노래가사 3점은 2003년 10월께 모두 삭제되고, 2004년 4월 20일 다른 노래가사와 내용으로 대체되었다. 노래비 전면부에 음각으로 새겨진 <선구자>자리엔 <용정찬가>가 들어섰고, <고향의 봄>은 <비암산 진달래>로 바뀌었다. 또 <반갑습니다>자리엔 초서로 갈긴 붉은 ‘龍’자가 새겨졌다.

‘龍’자는 용정(龍井)의 ‘龍’이기도 하지만 중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서는 이 사실을 실례로 들며 중국 당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있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그러나 노래비 훼손이 전적으로 ‘동북공정’으로 빚어진 결과라는 보도엔 무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용정시정부가 선구자탑을 처음 세울 당시부터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변 음악계의 원로인 김종화 선생은 가곡 <선구자>가 일송정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그는 <선구자>의 작곡가인 조두남이 <징병제만세>, <황국의 어머니>, <아리랑만주> 등을 작곡한 친일음악가였으며, 작사자인 윤해영도 일제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하고 찬양한 <낙토만주> 등을 창작한 친일문학가였다고 증언했다.

이어 <선구자>의 가사가 조두남이 말했던 ‘1932년 어느 독립군(윤해영)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라 1944년 조두남이 흑룡강성 영안에서 발표한 <용정의 노래>를 개작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용정의 노래>는 나라를 잃은 유랑민들의 서글픈 처지를 읊은 노래에 불과했다. 김종화 선생이 증언했던 내용들은 동포작가 류연산 선생에 의해 하나씩 밝혀졌다. 류연산 선생은 결국 일송정과 선구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조두남이 자신의 친일행적을 숨기기 위한 방편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결론지었다. 류연산 선생은 2002년 월간 <말>지에 처음으로 이를 공개한 후 2004년 그의 책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추가로 낱낱이 공개했다.

한편 이 진실게임의 불똥은 한국에도 튀었다. 2002년부터 3년간 조두남의 음악적 고향이었던 마산에서는 마산시의회와 마산지역 시민단체 사이에 ‘조두남음악관’ 건립을 둘러싼 큰 소동이 여러 번 벌어졌다.

마산지역 시민단체는 조두남의 친일행적을 빌미로 마산시가 건립할 ‘조두남음악관’이란 명칭을 개칭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친일과 표절로 얼룩진 <선구자>를 기념관 안에 전시할 수 없다고 거세게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산시는 2005년 ‘조두남음악관’을 ‘마산음악관’으로 개칭하고, 가곡 <선구자>와 관련한 모든 상징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동포들은 ‘친일’이라는 용어에 대해 한국보다 두드러기가 더 심하다.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일제의 핍박 때문에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선조들의 후손이라는 점이고, 다른 한편으론 중국이 공산혁명과 문화혁명 등을 겪으면서 사상적으로 친일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민족의 상징이랄 수 있는 일송정에 친일의 회칠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선구자탑을 반대하고, 친일의 꼬리표가 달려 있는 음악가가 지은 <선구자>와 <고향의 봄>노래비 삭제를 주정부에 건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의문점이 생긴다. 바로 북한노래인 <반갑습니다>는 왜 없앴을까? 하는 점이다. <반갑습니다>는 친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더욱이 이 노래는 남한과 북한에서 다 인기가 있던 대중가요가 아니던가?

아마 그 이유는 <반갑습니다>에 들어있는 ‘동포’, ‘조국’, ‘통일’ 같은 가사가 거북했기 때문이 아닐까? 중국 당국은 일송정에 ‘친일배제’라는 선명한 답안을 정하고, ‘한민족배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2003년도 연변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민족상징물 말살 사건들, 예를 들어 ‘사이섬비석’ 폭파사건의 예를 보아도 짐작이 간다.

어쨌든 현재 일송정에는 선구자가 없다. 한국 관광객이 일송정에 올라가서 <선구자> 노래를 부르건 안 부르건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선구자>를 누가 지었건 간에 가사가 좋아 부른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선구자>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일송정에서 이 노래를 목청껏 부를 순 없다. 용정이 고향인 문익환 목사는 일찍이 이 사실을 알고 평생 동안 <선구자>를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하는 한국관광객들은 일송정에 오르면 일단<선구자>를 부르고 싶어 한다. 그들이 부르는 <선구자>는 독립군을 탄압했던 일제 개잡이부대의 특무가 아니고, 항일무장 독립전사였던 일송(一松) 김동삼과 같은 진짜 선구자일 것이다.
마산촌넘 07/12/31 [13:01] 수정 삭제  
  특히 조두남의 선구자에 관하여 객관적인 모습이 좋았습니다.
사실 윤해영은 괴뢰 만주국의 입헌기관인 '오족협화회'의 간부임이 밝혀 졌습니다.
그런 윤해영을 독립군으로 둔갑시켜 선구자로 칭하는 등 거짓으로 일관된 조두남은 응징 받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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