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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60) '을사늑약 전야의 애국지사 활동'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6/05 [15:36]

대한정통사(60) '을사늑약 전야의 애국지사 활동'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6/05 [15:36]

맹약하는 충신들

 

  앨리스일행과 만찬을 나누었던 이 준은 곧이어 일본으로 건너 가서 여러 정객들을 만나며 일제의 의중을 탐지한 결과 일제가 대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방침을 완전히 정했음을 알고 곧바로 다시 귀국하여 민 영환등과 국가장래의 일을 의논하였다. 장시간의 의논끝에 이 준은 상해에 가서 일제의 야욕을 전 세계에 알리기로 하고 얼마간의 여비를 마련한 후 비밀리에 상해로 떠났다. 이 준과 함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기로 맹약한 민 영환은 동생이기도 한 주불공사 민 영찬에게 전보를 쳐서 속히 상해로 가서 이 준과 만나 최선의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였다.

 

  사태가 급박함을 인식한 애국지사들은 비밀리에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의 대책을 깊이있게 논의했는데, 거기에서는 미국의 협조를 시급히 요청하기로 결정되어 미국에 보낼 밀사를 정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에 대하여 참정대신 한 규설이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도 나왔으나 누군가가 ‘이등에 대항해서 황제를 보필해야 한다’는 것과 ‘삼엄하게 감시를 받고 있는 대신들 중에서 누군가가 밀파될 때 출국도 하기 전에 일제에 발각되기 쉬울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자 결국 헐버트가 적격자로 정해졌다. 애국대신들은 비밀리에 광무황제께 그러한 의견을 상주드리니 황제께서는 기꺼이 윤허를 내리셨다. 헐버트는 을미사변때 황제를 경호한 세 명의 미국인 중 하나였음을 광무황제께서는 똑똑히 기억하고 계셨기때문에 그를 믿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대한 밀명을 띈 헐버트는 이 준과 따로 출발하여 상해로 향하였다.

 

  이 준은 출발 전에 돈화문앞의 국민교육회로 가서 회원들을 모아 놓고 풍전등화같은 나라의 형편을 설명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죽음으로써 항일시위를 벌여야함을 역설하였다. 이 준은 한미공수동맹 수행을 위한 특파대사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상해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11월 초순에 상해에서는 이 준, 민 영찬, 이 용익, 헐버트 네 사람이 모여서 향후 대책을 의논했는데, 일단 전 세계국가들에 조국의 현실을 알리기로 하여 이 준이 각 국에 보내는 전보통신의 원문을 짓고 헐버트가 각국어로 번역해서 타전하기로 하였다.

 

  헐버트는 각국에 타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운영하는 ‘코리아데일리 뉴스’에도 소식을 보내어 일본의 야욕을 폭로하는 한편 자신은 서둘러서 미국으로 떠났다. 코리아데일리뉴스의 폭로논설에 따라서 애국적 단체들이 호응하여 맹렬한 시위운동을 벌였고, 일진회의 친일매국노들은 그에 대한 반대시위를 하는 등으로 대립하여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이에 고무된 참정대신 한 규설은 의정부회의를 개최하여 영일동맹의 내용에 대해서 영국과 일본 양국에 보내는 항의서를 채택하여 외부대신 박 제순의 명의로 발송하였다.

 

  항의서 내용이 발표되자 일제에 대한 규탄은 더욱 거세어졌는데, 송병준과 이용구등 친일매국노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이 국가를 위하여 대단히 유리하다’고 역선전하며 국민들을 호도했다. 이러한 북새통속에서 이등은 일왕의 특사로서 그 불길한 모습을 대한국땅에 나타냈던 것이다. 이 준, 민 영환등과 함께 멸사보국(滅私報國)의 결의를 굳히고 일제의 침탈에 맞서서 독립을 지키려는 애국지사 이 상설이 궁내부특진관을 사임한 지 일년 10개월만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전격적으로 의정부참찬에 발탁된 것은, 이등이 ‘오(五)조약’을 강제하려 내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던 4238년(서1905) 11월 2일이었다. 일제의 음흉한 수작을 짐작하고 있던 그는 민 영환, 한 규설, 박제순등과 협의하여 조약체결을 거부하기 위해서 함께 순국할 것을 결의하였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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