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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62)-광무황제의 밀명과 2차 의병봉기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7/17 [14:42]

대한정통사(62)-광무황제의 밀명과 2차 의병봉기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7/17 [14:42]

 

▲ 짐망화천지수전세비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1. 짐망화천지수(朕望華川之水)

 

  국제적 사기극인 을사늑약을 일제가 마치 정당한 국제조약인 양 내외적으로 크게 선전하며 대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자,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대의를 내세운 유림선비들을 선두로 격렬한 항의와 항쟁에 돌입했다.

 

  광무황제 또한 일제의 사기극에 치를 떨었으나, 황제는 간악한 일제가 조종하는 매국적 밀정들이 사방에 깔린 궁중에 갇혀있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황제는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온갖 지식과 지혜를 다 동원하여 해결책을 찾기에 골몰했다. 광무황제를 둘러 싸고 있는 일제의 철벽같은 장막에 대하여 ‘데일리 메일’기자였던 맥켄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등은 광무황제의 사생활을 엄격히 관리했고, 일본군이 대궐로 파견되어 광무황제는 사실상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았다. 경찰간부가 대궐문에 배치되어 일본인이 임명한 관리의 허가없이는 아무도 출입할 수가 없었다. 대궐의 관리들인 황제의 동지들도 깨끗이 제거되었다. 그런데도 광무황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외에 글을 보내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했다. 이에 일본인들은 황제의 측근조차도 일본밀정을 들여 보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황제 곁에는 아직도 일제가 미처 다 쫓아내지 못한 충신들이 몇몇 있어서 황제의 괴로운 심사를 이해하며 말벗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간교한 일제는 친일매국노들을 황제 주위에 풀어서 황제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신들과 함께 마음놓고 나라의 일을 의논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황제의 시종관으로 있던 정 환직은 그러한 황제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기때문에 외로운 황제의 뜻을 눈치로 헤아리며, 언젠가는 황제와 국가를 위하여 진충보국(盡忠報國)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의 직책은 태의원 전의(太醫院典醫)였으나 의원은 아니었고, 다만 그를 극히 신임하신 황제가 측근에 두기 위하여 내렸던 관직이었다.

 

  의학보다도 군사에 관한 조예가 더욱 깊었던 그는 일찍이 도찰사로 임명되어 탐관오리들을 색출하다가 모략을 입어 옥에 갇혔었으나 황제는 그의 죄가 없음을 알고 풀어준 후 전의로 임명했었다. 그는 이미 62세를 넘긴 고령이었으나 황제가 가장 믿고 있던 측근이었으며, 지난 날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일제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의병을 양성해야함을 주장해 왔던 충신이었다.

  사기적 오조약이 대내외적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던 4238년(서1905) 12월의 어느날, 황제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정 환직에게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경은 화천의 물을 아는가?”

 

일찍이 학문에도 통달하여 그 질문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 환직은 감읍(感泣)하여 미처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황망히 황제께 큰 절을 올렸다. 엎드려 황명을 기다리던 정 환직에게 황제께서는 나즈막히 한 마디를 더 이으셨다.

 

“짐망(朕望)”

 

  이로써 군신간의 선문답은 끝나고 황제의 밀지를 받든 정 환직은 그 길로 사임한 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만반의 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군신(君臣)이 하나가 되어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의로운 봉화를 경상북도 영천을 중심으로 높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 일찍이 을미의병을 일으켰다가 광무황제의 부르심을 받고 평리원판사(대법원장), 의정부참찬 등 최고위관직을 역임한 강직한 선비인 왕산 허 위가 을사늑약이 강제되기 4개월 전인 4238년(서1905) 7월에 황제께 사의를 표명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금릉군에서 시국을 걱정하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가, 정 환직부자가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군자금으로 20만냥이라는 거금을 주선코저 했다. 그 거금은 경상북도 칠곡군의 대부호인 장승원이 예전에 경상북도관찰사의 직책을 얻는 댓가로 허 위에게 유사시(즉, 의병봉기등)에 내기로 했던 것이었다.

 

  장승원이 20만냥을 허 위에게 약속한 데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었다. 부패한 매국도당들이 설치던 시절이라 매관매직을 서슴치 않는 자들도 많았는데, 경상북도관찰사의 공정가격(?)이 20만냥이었다. 부호인 장승원은 20만냥을 싸들고 당시 인사권자인 의정부참찬 허 위에게 갔으나 그러한 매관매직을 용납하지 않던 허 위에게 깨끗이 거절당했다. 그러자 안달이 난 약아 빠진 장승원은,

 

“개인적으로는 받지 않겠다고 하시니, 만일 나라에 필요할 때는 말씀만 하시면 득달같이 바치러 오겠습니다.”

 

하고 굳은 언약을 했다. 언제고 다시 항일의병전쟁을 수행해야만 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던 허 위는 그 언약을 지켜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장승원이 관찰사가 될 수 있게끔 주선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관찰사가 된 후 마음이 변해 버린 장승원은 약속했던 군자금을 내어놓지 않았고, 오히려 의병거사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친일적인 관헌에게 밀고해서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한 장승원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정 환직 부자는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하사받은 5만냥을 군자금으로 하여 힘껏 의병들을 모으는 한편, 청국인들을 통해서 상해로부터 신식무기들을 구입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陳)’으로 불리운 대규모의 의병항쟁을 주도하다가 부자가 다 함께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러나 정 환직 부자의 선구자적인 의병봉기와 순국은 헛되지 않아서 그들의 봉기이후에 국권회복의 열망에 불타는 숱한 애국지사들이 의병의 대열에 앞다투어 나섰던 것이다.

 

* '화천의 물(華川之水)' 고사의 내용:

 ‘옛날 중원지방의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 항공(項公)이 주변 제후국들의 집중공격을 받은 끝에 마차를 타고 도주하다가 체포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신하인 봉축부(鋒丑父)가 항공의 수레에 올라가서 서로 옷을 바꾸어 입으니 누가 항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적들이 수레를 포위하자, 봉축부는 신하로 변장한 항공에게 “내가 목이 마르니 화천의 맑은 물을 떠오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신하로 변장한 항공은 물을 뜨러 가는 척하면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봉축부는 물론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제후들에 의하여 의로운 죽음을 당했다’ 즉, 광무황제는 이 고사를 인용하여 국권회복의 마지막 수단으로서의 전국적 의병궐기를 은밀히 명한 것임.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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