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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63)-의병전쟁의 전개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7/25 [12:12]

대한정통사(63)-의병전쟁의 전개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7/25 [12:12]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 안재세전문위원]  을사늑약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찍이 충청도에서 을미의병을 주도했던 이 설과 김 복한은 병약해진 몸을 이끌고 상경해서 을사오적의 처단 및 국권회복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경무청에 갇힌 바 되었는데, 모든 실권이 일제에게 돌아가 버렸음을 간파한 그들의 동지 안 병찬은 상소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4239년(서1906) (음)2월 23일에 충청도 예산군 광시면의 장터에서 동지들과 함께 일찍이 참판을 역임한 민 종식을 대장으로 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민 종식은 일찍이 을미왜란(명성황후 시해)때 사직하고 고향 청양에 내려와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었으며 비밀리에 광무황제의 칙명을 받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 대학 구내에서 운영되던 소년병학교 교관과 학생들. 박용만 선생을 비롯 동학농민군과 구한말 군인 출신들이 교관을 맡아 과목별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민 종식의병장은 명성황후의 집안출신이었으며, 과거에 일찍 급제해서 이조참판을 지냈던 명문거족 출신으로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하게 살 수 있었으나, 그는 국권회복에 신명을 다 바치기로 결심하고 의로운 투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그는 전 재산을 정리하여 무기들을 구입한 후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민 종식이 이끄는 의병은 사기가 충천하여 4월 26일에는 홍주성을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일제주둔군사령관 장곡천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대부대를 보내어 공격했으므로, 쌍방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장비가 왜구들보다 크게 열악한 의병진영이 파괴당하고야 말았다.

 

  민 종식 등은 일단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데는 성공했으나 일진회매국도당의 밀고에 의하여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4239년(서1906) 7월 2일에는 평리원(대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의 종친들이 당시만 해도 엄연히 큰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민씨 일가의 반발로 인한 후환을 두려워 한 이등은 법부대신이던 이하영을 시켜서 각의를 거친 끝에 진도로 유배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민 종식의 거사실패를 안타깝게 여기시던 광무황제는 진도에 유배가 있던 민 종식에게 특사를 내려서 풀려나게 했으나, 그는 모진 옥고로 인하여 4240년(서1907) 6월 26일에 순국하고 말았다.

 

 

 

  을미의병을 일으켰던 대표적 선비의 한 명으로서 광무황제의 특명으로 동궁시종관에 임명되어 황태자를 모시고 있던 노 응규는, 노일전쟁 중 한일의정서가 강제되는 등 국내외 정세가 심히 험악하게 돌아가자 최 익현과 함께 다시 항일의 의지를 굳히고 있다가,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즉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토왜투쟁에 착수했다. 이에 황제는 비밀히 삼남시찰사(視察使)의 직책과 암행어사 마패를 내려 창의거병을 촉구했다. 그는 최 익현의 막하에 들어 가서 토왜전에 나섰으나 최 익현의 의병진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최 익현 자신은 체포당하자, 수개월간 더욱 철저한 준비를 갖춘 후 4239년(서1906) 늦가을부터 삼남의 요지인 충청북도 황간에서 다시 거병하였다.

 

  노 응규 의병장은 살신보국의 일념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으니 왜군의 척후대를 괴멸시키고 경부선철도를 파괴하고 열차를 전복시키는 등 그 위세가 삼남을 진동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서 서울을 탈환하려고 진군계획을 세우던 중에 독버섯같은 왜구의 밀정에 의하여 기밀이 누설됨으로써 체포당하고 말았다. 옥중에서도 왜구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았던 노의병장은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동지들이 들여 주는 음식 이외에는 어떠한 관급식도 먹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투옥된 지 1개월도 채 못 되어 최 익현과 마찬가지로 아사(餓死)하고 말았다.

 

  일찍이 임오군사봉기때 대궐 밖에서 무사들과 함께 매국노 고관들을 처단하려고 도모하다가 계획이 사전 누설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던 지사(志士) 노 병대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안 황제로부터 창릉의 참봉으로 임명받고 항일의지를 더욱 불태우고 있었다. 갑오왜란이 벌어지자 그는 순국자결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고, 개화당이 향교를 없애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상경해서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리기도 하는 등 원칙에 철저한 선비였다. 을사늑약의 소식을 들은 그는 상경하여 오적의 처단을 도모하던 중에 판서 이 용원을 통하여,

 

“전 참봉 노 병대를 선조 계사년의 예에 따라서 분충정란(奮忠靖亂) 2등을 내리고, 비서원 비서승을 특별히 제수한다.”

 

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서 다시 귀향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여건이 여의치 않아서 4260년(서1907) 8월에 속리산에서 거병한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토왜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체포당하고 말았다. 그는 옥중에서 끝까지 굴하지 않고 왜구들을 힐책했으므로 왜헌병은 잔인무도하게도 그의 한 쪽 눈을 빼버리는 악랄한 고문까지 자행했다. 그는 왜구들이 ‘한일합방 은전’으로 석방시켜주자,

 

“너희 나라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

 

하면서 석방을 거부했으나 강제로 석방당했고,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광복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4246년(서1913) 3월 12일에 다시 체포당하여 15년형을 선고받고, 왜구들이 주는 식사를 거부하고 단식한 지 28만에 순국하였다.

 

  이처럼 구국설욕의 일념에 불타는 황제가 내린 밀명을 받고 살신보국을 염원하는 뭇 충신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자, 대한국의 모든 애국지사들은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국권회복의 한 마음으로 의병대열에 다투어 나섰다. 태백산 남쪽 낙동정맥을 무대로는 신 돌석 등이, 영남일대에서는 유 시연 등이, 전라도 지방에서는 전 해산 등이 연이어 대규모 의병을 일으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며 대한국의 독립전쟁사상 불멸의 신화를 만들어 갔다. 그리하여 광무황제의 칙명을 받은 모든 충신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총궐기하여, 마침내 ‘짚신과 군화의 전쟁’으로 불리운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기나긴 독립전쟁의 장엄한 막을 올렸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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