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태조 왕건과 신숭겸 장군 묘...신숭겸 장군의 황금머리,사실일까

보도국 신종철 기자 | 기사입력 2017/09/18 [15:25]

태조 왕건과 신숭겸 장군 묘...신숭겸 장군의 황금머리,사실일까

보도국 신종철 기자 | 입력 : 2017/09/18 [15:25]
▲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 동상. 견훤과의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대신 전사했다

 


[플러스코리아타미즈=신종철 기자] 강원도가 '강원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르는 경계 지역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서울 춘천 간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려면 대부분 46번 국도를 이용했다. 이 국도를 타고 춘천을 향해 가다 보면,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르는 지점에 걸쳐 있는 '경강교'를 지나면서부터 주변 풍경이 이전과 크게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다.

 

경강교를 건넌 뒤로는 인가가 부쩍 드물어진다. 산은 높아지고 길은 점점 더 험해진다. 그때까지 대체로 낮은 평지를 달려온 자동차들은 경강교를 지나면서부터는 바위 절벽 아래를 위태롭게 지나가야 한다. 그 차들은 때로 강물 위를 지나가야 할 때도 있다. 절벽을 깎아내고 만든 도로 아래로 북한강이 흐른다. 절벽을 깎아낼 수 없었던 곳에서는 할 수 없이 강 위에 수십 미터 높이의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도로를 깔아야 했다.

 

이 도로 위를 지나갈 때면, 그 옛날에 이 도로를 건설하던 사람들이 치러야 했을 생고생이 떠오른다. 도로를 만드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도로의 생김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도로가 완공되기 전에는 춘천을 오가는 일 자체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자동차를 몰고 이 길을 지나갈 때면,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배곤 한다. 바위 절벽 아래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 꽤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옛날 이런 도로마저 없던 시절에 부득이 서울과 춘천을 오가야 했던 사람들은 또 어떤 고생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들은 춘천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큰 불편과 모험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길을 가는 도중에 깊은 산 속에서 맹수와 산적을 만나는 일도 결코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을 누군가 소금기 가득한 땀과 눈물을 흘리며 지나갔을 게 틀림없다.

 

'황금머리'와 함께 잠든 신숭겸 장군

▲     국내 유일의 1인 3분(墳) 묘. 셋 중 하나에 신숭겸 장군의 황금 머리가 매장돼 있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 동상. 견훤과의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대신 전사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는 산 밑에 꽤 번듯한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인다. 박사 학위를 가진 인재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박사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까지 70여 명에 가까운 박사가 배출됐다. 박사가 아무리 흔한 세상이 됐다고 해도 한 마을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박사가 나올 수 있는 확률은 그렇게 크지 않다. 이 마을 어딘가에 분명 박사를 낳게 하는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석파령너미길은 박사마을을 지나 곧 이어 '장절공 신숭겸 장군묘'가 자리한 곳에서 끝난다. 신숭겸 장군은 고려 개국 1등 공신이다. 고려 태조 10년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과 싸울 당시의 일이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장군은 그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건이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는다. 적으로부터 왕건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신숭겸 장군은 결국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 사이 왕건은 전장에서 무사히 탈출한다.

 

이후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왕건은 그에게 '장절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장절은 '절의가 굳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왕건은 장군에게 시호만 내려준 게 아니다. 장군이 잠든 묘를 밑에서 올려다보면, 그 위에 봉분이 무려 3개나 솟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곳에 혹시 부인이나 다른 가족이 함께 묻힌 게 아닌가 싶지만 그게 아니다. 장군의 묘는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묘다.

 

봉분이 3개나 된 데는 도벌꾼으로부터 장군의 묘를 지키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군이 전사하자 후백제군은 장군을 왕건으로 오해하고 왕건이 사망했다는 증거로 장군의 머리를 베어간다. 그 바람에 장군은 머리가 없는 시신으로 남게 된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왕건이 장군의 시신을 거둔 뒤, 장군의 머리를 황금으로 만들어 시신과 함께 안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머리 크기만 한 금덩어리가 함께 묻혔으니, 자연히 도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군의 묘가 도벌을 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 봉분을 여러 개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전설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한 무덤에 봉분이 3개나 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숭겸 장군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대부분 전설에 해당된다. 모두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전설이다.

 

장군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꽤 아름답다. 이곳에서 보게 되는 풍경이 또 예사롭지 않다. 묘지 양 옆으로 아름다리 소나무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는 광경이 숭고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소나무들 모두 최소 100년은 넘은 아름드리나무들이다. 그 한가운데로 멀리 춘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데, 그 풍경이 마치 춘천의 과거와 현대를 한눈에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도 같은 기분을 자아낸다.


왕실의 잦은 변고와 혹독한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천 년 사직이 위태롭게 된 신라 제49대 헌강왕 1년(875). 신풍 도선(道詵·827~898) 국사가 추락한 왕권과 부패 권력을 개탄하며 전국 방방곡곡의 지세를 살피던 중 개성에 들렀을 때 일이다. 때마침 송악산 아래 정기 서린 길지가 보여 찾아가니 금성태수 왕융(王隆·?~897)이 집을 짓고 있었다.

 

여보게 태수, 그 집터를 우로 99자(약 30m)만 옮겨 임좌병향(동으로 15도 기운 남향)으로 앞산을 보게 하시오. 틀림없이 득국(得國)하는 큰 인물이 나올 걸세.”

얼른 알아차린 태수는 짓던 것을 허물고 국사가 점지한 자리에 새로 집을 지었다. ‘무자식 상팔자’라며 체념하고 살던 왕융에게 2년 후 부인 한씨(추존 위숙왕후)가 아들을 낳으니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943)이다. 왕건이 17세 되던 해 도선이 다시 찾아와 신묘한 병법과 각종 술법을 전수해 주며 왕건에게 일렀다.

 

▲     © 신종철 기자

 

때는 바야흐로 난세이니 함부로 목숨 걸지 말고 살아남아야 한다. 너는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니 무서운 지장(智將)이 되지 말고 만민을 품는 덕장(德將)이 되어 인심을 얻어라. 왕의 그릇된 판단과 국정 파탄이 초래한 백제·고구려 멸망사를 상기할 것이며 장구한 역사를 내다보는 인군이 되어라. 국가 기강이 흩어진 신라는 머지않아 곧 망하게 될 것이다.”

 

도선 가르침 안고 난국 예의 주시

 

왕건은 도선의 가르침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얼음판 같은 난국을 예의 주시했다. 신라는 망조가 들어 한반도 동남쪽(경상도)의 변방 소국으로 전락했고, 견훤의 후백제는 서남쪽(전라도)을 장악해 중부지역(경기·강원·황해)을 차지한 후고구려(태봉) 궁예와 치열한 영토 싸움을 벌였다. 이 땅에 다시 후삼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중국과 밀무역으로 거부가 돼 막강한 개성 호족(豪族)이 된 왕융은 궁예에게 거액을 바치며 아들 왕건을 맡겼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온갖 충성을 다했다. 궁예의 명으로 청주 괴산 남양 등 군·현을 쳐 평정하는가 하면 함대를 이끌고 나주를 공격해 함락했다. 이 공으로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크게 얻으며 태봉 3년(913) 시중 자리에 올랐다.

 

궁예는 유능한 신하를 의심하는 무모한 군주였다. 왕권에 위협되도록 힘이 커진 호족과 장수들은 무차별 처형했다. 어느 날 역모 혐의로 체포된 왕건에게 궁예가 물었다.

 

내 관심법(觀心法)으로 너를 보니 반역을 꾀한 게 확실하다.”

네, 그렇습니다. 소인이 감히 역모를 꾸몄으니 죽여주십시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는 자신의 관심법이 신통했음에 만족하고 “정직해서 용서한다”며 오히려 상을 내렸다. 이런 군주에게 충성할 자 누구이겠는가. 태봉 5년(918) 6월 신숭겸·홍유·배현경·복지겸 장군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등극시켰다. 옛 고구려의 혼을 이어 국호를 고려라 이름 지은 새 나라가 개국한 것이다. 태조 왕건의 보령 42세였다.

 

신라와 선린우호·견훤엔 등거리 외교

 

임금이 된 왕건 앞에는 수많은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다. 신라 왕권이 붕괴하자 각 지역 호족들이 활개치며 민생을 짓밟았고 기세등등한 견훤은 고려와 신라를 무차별 공격했다. 태조에게는 민심 수습이 우선이었다. 신라 말기 극도로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 지나치게 가혹했던 조세정책을 크게 완화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딸을 후궁으로 맞아 혈연관계를 맺고 아들들에게는 높은 벼슬자리를 줘 우대했다. 태조의 후비(后妃)는 29명에 이르렀다.

 

왕건은 신라와의 선린우호를 유지하며 견훤에게는 화전 양면의 등거리 외교술을 펼쳤다. 태조 10년(927) 마침내 대구 팔공산에서 왕건과 견훤 간에 사활을 건 대전투가 벌어졌다. 견훤 군에 포위된 왕건이 죽음 직전에 이르자 심복 신숭겸(?~927) 장군이 얼른 왕건의 갑옷으로 갈아입고 왕건을 피신시켰다. 견훤은 사로잡힌 신숭겸이 왕건인 줄 알고 단칼에 목을 내리쳐 몸뚱이만 고려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태조는 신숭겸의 목 없는 시신을 끌어안고 앙천통곡했다. “주군(主君)을 위해서라면 물 끓는 가마솥에라도 서슴없이 뛰어들겠다”던 젊은 날의 도원결의가 그를 더욱 슬프게 했다. 태조는 훼손된 신숭겸의 머리를 순금으로 만들어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1리에 묘(강원도기념물 제26호)를 쓰도록 했다. 왕건은 신숭겸 묘가 도굴당할 것에 대비해 동일 묘역에 세 개의 봉분을 조성토록 배려했다.

 

왕건 현릉 잦은 이장과 수난 겪어

 

술좌진향(동남향)의 신숭겸 묘는 국내 유일의 1인 3분(墳)의 특이한 묘제다. 동서남북의 사신사를 고루 갖췄고 혈처 뒤의 북현무 내룡맥이 직사로 내려와 무장 후손이 출현할 명당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신립 장군이 그의 방손이다.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며 26년을 재위한 뒤 67세로 승하한 태조의 현릉(顯陵)은 신혜왕후 유(柳)씨와 함께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다. 우리 역사상 왕건의 현릉처럼 잦은 이장으로 수난을 당한 묘는 없다.

 

①제8대 현종 1년(1010) 제2차 거란의 침입으로 왕건 재궁(梓宮)을 향림사로 이치 ②1016년 현릉에 이장 ③거란의 3차 침입으로 1018년 재궁을 향림사에 또 안치 ④1019년 현릉에 다시 복장(葬) ⑤1059년 현릉에 도굴범이 들어 파묘 ⑥1217년 김산·김시 난으로 재궁을 봉은사로 옮김 ⑦1232년 몽고군 침입으로 강화도 이장 ⑧1270년 강화에 건물 짓고 임시로 매장 ⑨제25대 충렬왕 2년 재궁을 현릉에 다시 복장.

땅속에 매장됐던 유해가 공기 중 산소를 만나면 거듭되는 산화작용으로 바스러져 버린다. 구천(九天)에 들지 못하고 아홉 번이나 바깥바람을 쐰 현릉 재궁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고려 백성들은 후손이 못나고 임금이 나라를 못 지켜내면 조상이 험한 꼴 당하는 법이라며 태조 왕건을 불쌍히 여겼다.

 

국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고려는 뒤늦게 원나라 속국이 되고 말았다. 임금이 교체될 때마다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왕족 간 권력 싸움과 권신들 사이 분열로 제34대 475년으로 멸망할 때까지 국가적 수모를 겪어야 했다.


9회말 2아웃에도 포기를 모르는 야구선수들처럼,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책임감 있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강심장’을 가슴에 품고, ‘런닝맨’처럼 취재현장을 뛰어, 독자들에게 웃음과 ‘힐링’을 선사하겠습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미식 여행지 고흥, ‘녹동항 포차’에서 추억을 쌓아요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