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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인동장씨(仁同張氏) 고려 신호위상장군 장금용

고려 신호위상장군 장금용이 시조… 칠곡 인동서 뿌리내려

보도국 신종철 기자 | 기사입력 2017/09/18 [19:48]

[뿌리를 찾아서] 인동장씨(仁同張氏) 고려 신호위상장군 장금용

고려 신호위상장군 장금용이 시조… 칠곡 인동서 뿌리내려

보도국 신종철 기자 | 입력 : 2017/09/18 [19:48]
▲     사진제공=인동장씨 종친회

 

[플러스코리아타임즈=신종철 기자]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지금의 칠곡지역의 인동을 관향으로 삼고 있는 씨족이다.

 

인동은 예전에 옥산으로 불렸기 때문에 옥산장씨로 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동장씨의 시조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한 장금용(張金用)이다.

 

장금용의 아들인 장선(張善)도 고려 문종 때 금오위상장군을 지냈다. 인동장씨의 여헌(旅軒) 장현광은 그의 유록에서 장금용을 시조로 모시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고려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공(장금용)을 시조로 모시는 것은 그분이 선대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조상은 몇 대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조상이 이곳 인동(옥산) 땅에 거주하신 내력을 살펴보면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20대뿐이다”고 했다.

 

현재 일부에서는 인동장씨의 시조인 장금용은 안동장씨 시조 장정필의 후손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즉, 장정필의 증손자 이름이 인동장씨의 장금용과 동일한 이름을 쓰고 있어 인동장씨는 안동장씨에서 파생되어 나간 본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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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에 대해 인동장씨 측에서는 장금용이 동명이인일 뿐이며, 안동장씨에서 분파되어 나간 본관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장금용의 윗대가 고증되지 않는 이상 인동장씨가 안동장씨로부터 분파되어나간 본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 다른 인동장씨에는 장계(張桂)를 시조로 하는 장계계(張桂系)가 있는데, 장계는 고려 충열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대제학에 이르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 인동장씨의 장금용계와는 달리 장계계는 자신들을 고려건국에 공을 세운 태사공(太師公) 장정필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동장씨는 여러분파로 나뉘어 졌는데, 장금용의 직계인 종파(宗派)를 비롯하여 남산파(南山派), 진가파(眞佳派), 진평파(眞平派), 황상파(凰?派), 청주파(淸州派), 울진파(蔚珍派-), 양양파(襄陽派), 경파(京派), 금구파(金溝派), 고흥파(高興派), 영광파(靈光派), 함평파(咸平派), 흥해파(興海派), 화순파(和順派), 초계파(草溪派), 의흥파(義興派), 감무공파(監務公派) 등이 있다. 우리나라 장씨인구의 대종을 이루는 인동장씨는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18만4863가구에 59만13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동장씨의 연혁과 인물 장금용계(상장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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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군계의 시조는 장금용이다. 장금용은 고려 때 삼중대광에 올라 신호위상장군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장선(張善)은 고려 문종 때 금오위상장군을 지내고, 인동을 세거지도 삼았다. 장금용계의 인물에는 고려조에서 장금용의 증손이며, 봉정대부 내사령을 거쳐 직사관을 지낸 장국신(張國伸)이 있고, 통의대부 검교군기감사에 오른 장위(張偉)가 가세를 일으켰다.

 

또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린 절신으로 유명한 장안세(張安世)와 장중양(張中陽)이 있다. 장안세는 직제학을 역임한 장계와 함께 활동한 인물로 덕령부윤을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절개로 두문동에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의 한명이다. 그의 후손으로 조선조 성리학의 대가인 여헌 장현광(張顯光)이 있다. 장중양도 태조의 한성부좌윤 벼슬을 제수하여 회유하였으나 절의를 지키고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조선조에서는 임진왜란 때 군위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장사진, 성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장봉한, 상주판관으로 있으며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홍한 등이 있다. 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일등공신에 오르고 옥성부원군에 봉해진 장만(張晩)과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옥산군에 봉해진 장돈(張暾)이 있다.

 

장현광은 장안세의 후손으로 선조 때 보은현감만 잠시 지내다 대사헌, 공조판서 등 20여 차례 벼슬제수도 거부하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퇴계학파의 거두로 정구(鄭逑)의 문인이자 조카 사위로 인조 때는 왕의 부름을 받아 정치에 대한 조언을 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와 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여헌집’이 있고 ‘성리설’, ‘역학도설’, ‘용사일기’ 등의 저서가 있으며, 성주의 천곡서원, 인동의 동락서원, 선산의 여헌영당 등에 제향되었다. 


장붕익(張鵬翼)은 교리를 지낸 장차주의 손자로 숙종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거쳐 창원부사를 지냈다. 영조 때 훈련대장,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인좌의 난 때 총관이 되어 왕을 호위하였으며, 총융청의 총융사로 임명되어 반란군의 장수 이배(李培)를 잡아 난을 평정하였다. 그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장옥정(희빈장씨)은 역관이었던 조부 장응인, 아버지 장형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양반이었던 장옥정의 조부 장응인은 중국과의 무역거래로 역관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보고 장경인과 함께 역관이 되었다. 이후 인동장씨는 역과에 7명이나 수석합격을 낸 역관 명문 집안이 되었다. 장옥정은 조대비의 조카인 조사석의 소개로 궁녀가 되어 숙종의 총애를 입었다. 그리고 역관이었던 인동장씨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왕후까지 올랐으나, 인현왕후를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다. 


장태소(張泰紹)는 삼도군통제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장지풍이며, 손자는 형조참판과 어영대장을 역임한 장현택이다. 장응일(張應一)은 숙종 때 우승지와 대사간, 부제학을 지냈고, 장석룡(張錫龍)은 형조판서에 올랐다. 

 

장계계(직제학계) 

 

직제학계의 시조는 장계이다. 장계는 고려 충열왕 때 등과하여 보문각 직제학을 지내고, 옥산공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인동현 발영전에 전거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장계계의 인물에는 시조인 장계의 손자로 광주부사를 지낸 장용서(張龍瑞)가 있고, 장계의 6세손으로 홍산현감을 지냈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옥산군에 추증된 장안량(張安良)이 있다. 또 그는 5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가 현달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장안식(張安式)은 훈련원 판관을 지냈고, 장용서의 증손인 장자원(張自遠)은 검교세자시 강원필선을 지냈다. 그 후손들이 평안도 용천, 정주 등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장안량의 5형제 중 장남인 장선손(張善孫)은 의정부 첨서와 녹사를 역임했으며, 차남 장경손(張敬孫)은 사재감 주부를 지냈고, 또 인동의 또다른 별호인 연복군에 봉해진 장말손(張末孫)은 이조좌랑으로 강순을 도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2등공신에 책록되고 해주목사를 지냈으며,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장순손(張順孫)은 군수였던 장중지의 아들로 정언과 판관을 지내고, 춘추관의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연산군 때 직간하였다가 화를 입고 원방에 부처되었으나, 중종반정이후 복권되어 병조판서에 올랐다. 김안로 등과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축출하려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이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장기연(張紀淵)은 괴산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장화식(張華植)은 의금부도사를 거쳐 한성판윤, 육군참장을 역임하였다. 장봉환은 평리원 검사를 지냈고, 장승환은 외부참서관을 지냈다. 

 

인동장씨 근현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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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張泰秀)는 전라북도 김제에서 출생하였으며, 철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정언, 지평을 역임하였다. 고종 때 병조참의, 동부승지, 경연참찬관을 지냈다. 하지만 단발령이 내려지자 사직하였다. 일본 헌병대에 아들 3형제가 붙잡혀가자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죽었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장지연(張志淵)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1894년 진사가 되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 궐기를 호소하였다. 다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일시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에 망명하기도 했으나, 경남일보를 창간하여 주필을 맡으며 계속 활동했다. 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승만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장택상(張澤相)과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장면(張勉)이 유명하다. 

 

창랑(滄浪) 장택상은 1893년에 경상북도 칠곡(漆谷)에서 출생하였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청구회(靑丘會) 회장으로 있다가 8·15광복을 맞아 수도경찰청장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임하였으며, 제2대, 3대, 4대, 5대 국회의원(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엔 국무총리에 기용되었으며, 1959년엔 재일교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하여 제네바에 파견되기도 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재야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병사했다. 

 

운석(雲石) 장면은 1899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하고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해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6·25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기여하였다. 1951년에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야당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9회말 2아웃에도 포기를 모르는 야구선수들처럼,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책임감 있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강심장’을 가슴에 품고, ‘런닝맨’처럼 취재현장을 뛰어, 독자들에게 웃음과 ‘힐링’을 선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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