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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33)-민족주의에 대한 고찰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21/05/07 [09:18]

옛날 옛적에(33)-민족주의에 대한 고찰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21/05/07 [09:18]

 

▲ 유럽의 민족주의  © 플러스코리아

 

▲ 대한민구의 민족주의는 있을까?  © 플러스코리아

 

할아버지가 전해 들어서 알려 주신 '박달주의론'의 내용 ;

 

첫 째, 민족주의에 대한 고찰

 

1.민족주의의 두 얼굴

 

 

민족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역사적 개념을 떠나서 민족이 성립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용어에 대해 인류사회는 매우 다양한 개념들을 부여해 온 것이 사실이며, 심지어는 민족이란 인류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우려할만한 악성 질병의 원인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 반면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민족지상(民族至上)의 민족주의야말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그 자신의 이익과 발전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가 일종의 잘못된 편견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민족이라는 용어자체가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복잡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일상적으로 민족이라고 표현하는 단어 속에는 국민(nation), 민족(race), 종족(tribe)이라는 뜻이 함께 뒤범벅이 되어 있으며, 거기에다가 어떤 경우에는 인종(human species, 또는 human race)이라는 의미까지도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근세사 이후 주로 유럽지방의 제국주의 추진국가들에 의하여 사용된 개념은 국민이라는 개념이다. , 종족적 혼합이 심하여 하나의 민족(race)적 통합을 이루기 힘든 대규모 생활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방법으로 소위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뒤늦게 제기 되었고, 이러한 유럽지방 중심의 제국주의는 곧 국민(또는 시민)의 복지를 지향한다는 내셔날리즘(Nationalism)’을 공고히 하면서 전세계를 무대로 침략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빗나간 내셔날리즘(, 제국주의)에 맞서서 투쟁해 온 것도 다름 아닌 민족주의이며, 이 경우에 우리는 방어적 내셔날리즘이라고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침략적이건 방어적이건 무조건 민족주의라는 용어 하나로 번역되어 사용되면서 그 구분이 모호해진 데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 판이한 성격의 내셔날리즘을 고찰해 보면 한가지 뚜렷한 특징이 발견된다. , 근세 이후 침략적 내셔날리즘에 편승했던 국가들은 대체로 그 종족적 통합이 불과 수십년 내지 수백년 사이에 급조된 신생국이나 다름없는 나라들이며, 그 반대로 방어적 내셔날리즘의 입장을 취했던 나라들은 이미 수백년 내지 수천년간에 걸친 종족적 통합을 완료하여 비교적 장구한 역사적 경험을 해 온 나라들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완성도라는 점에서 볼 때 신생민족은 일종의 미완성민족(또는 불완전민족)’이라고 볼 수 있고, 역사민족은 일종의 완성민족(또는 완전민족)’이라고 볼 수 있다. , 완성민족이란 오랜 역사 속에서 씨족과 씨족이, 부족과 부족이, 종족과 종족이 섞여오면서도 하나의 집단적 역사인식하에 집단적 운명을 공유해 온 가장 잘 다듬어진 우수한 사회적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 편으로는 문화적정신적 성숙도를 놓고 볼 때, 신생민족은 대체로 미성숙 민족이고, 역사민족은 대체로 성숙한 민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나의 민족(race)으로서 그 자체로서 안정된 생활양식이 구비되어 있는 문화적으로 성숙한 민족은 재화의 획득 이외에는 아무런 명분도 없는 침략을 감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며, 공동체적 생활양식 자체가 불안정한 신생민족은 그 활로를 재화의 획득만을 목표로 한 침략정책에서나마 찾으려고 애쓰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류사회의 평화적 통합을 위해서는 우선 비교적 건전한 인류애를 갖춘 나라들부터 성숙한 민족으로 진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불가피하게 사용하게 될 민족이라는 용어는, 우리 인류사회의 궁극목표일 수도 있는 인류발전의 최고단계로서의 이른바 세계민족(global race)’이라는 이상도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점을 가정하고서 쓰는 용어이다.

 

즉 언젠가는 인류 모두가 모든 문화적 장점들과 인종적종족적 다양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인류역사의식으로 결집되어 대동평화적 사해일가(大同平和的 四海一家)를 이룰 날도 있으리라는 점을 예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있어서 사해일가의 이상이 아무리 가장 소중한 바램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은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민족이 이루어지는 데도 수백·수천년의 장구한 시간을 요하는 만큼, 여러 민족들이 다시 사해일가의 세계민족으로 발전하는 데도 그만한 시간쯤은 요하리라는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성급한 세계국가건설의 과욕은 세계대란(大亂)의 피바람을 또다시 불러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적 이상으로서의 세계민족을 지향하더라도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고도 보다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니면 안된다. 이 원칙이 흔들려서는 이 지구는 또다시 영웅의 탈을 쓴 살인마들의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평화적 세계일가를 향하여

 

 

평화를 이루려면 우선 각자의 마음과, 가정과, 마을과, 국가에 이르기까지 평화로운 여건들을 마련해 가야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국가들이 함께 영구히 평화롭게 지낼 수만 있다면 이미 그 자체가 세계국가이자 세계민족을 이룬 것이며, 또한 모든 국가가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세계회의가 있어서 모든 지구적 관리에 공평무사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이 전쟁이나 분쟁이나 사소한 다툼 따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폭력적 행위가 사라진 상태임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 상식적 인식에 따르면 평화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건 다투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함을 알 수 있다. 세계사상 위대한 현인(賢人)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평화로운 마음은 과다한 욕심을 내지 않고, 탐내지 않으면서,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정녕 모든 인류가 그와 같은 가르치심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류역사는 한 쪽에서 그와 같은 현인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제자가 되려고 모든 폭력적 방법들을 포기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다른 한 쪽에서는 그러한 착실한 제자들을 해치려고 칼날을 세우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로 점철되어 왔다. 더욱 교묘하게는 양의 탈을 쓰고서 늑대같은 짓을 서슴치 않는 자들도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니, 많은 성인들이나 현인들이 살았던 시대에 조차도 오히려 치열한 전란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음을 볼 때, 모든 인류가 한꺼번에 평화적 인간으로 각성한다는 것은 바랄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당장에 평화적일 수 없다면 우선 대부분의 인간이라도 평화적인 인간으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현실적인 순서일 것이며, 민족이나 국가에 있어서도 같은 순서가 적용될 수 밖에 없다.

 

3. 현실적인 평화적 접근방법

 

현 인류사회에서 우선 가장 시급한 국제적 평화를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종족단위 이상의 모든 분쟁을 당장 정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쟁원인을 찾아서 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해결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분쟁원인을 객관적, 합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유능한 분쟁조정위원회의 존재가 우선되면 더욱 좋을 것이다. 현재 그러한 목적으로 이용 가능한 것은 유엔안보리(安保理) 정도이겠지만 유엔이 그러한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완전히 공정하게 움직여야 할 유엔 자체가 특정집단의 이익이나 시각에 의하여 심하게 편중된 판정을 내리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무탐무욕하고 안분지족하는 평화적인 정서자체가 유엔운영 당사자들에게조차 정착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며, ‘세계국가건설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기본적조건의 성숙을 기다리지도 않고, 정상적인 순서를 밟더라도 수백년 후에야 그 가능성이 보일 세계국가기구의 가시적 운영부터 서두른 성급한 특정권력자들의 졸속성 자체에도 기인하는 것이다. 예컨대 서로 성격이 맞지도 않고,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녀를 억지로 결혼시킨 꼴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는가? 심지어는 유엔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안보리의 가장 중요하다는 다섯 국가들()도 서로 공공연하게 극한적으로 반목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다른 군소 국가나 민족들에게는 평화를 권할 수가 있는가? 마치 사이 나쁜 부부가 걸핏하면 대판 부부싸움을 벌리고 당장 이혼할 듯이 으르렁거리면서도 이웃집들에게는 화목한 가정 만드는 법을 가르치려 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유엔의 중재 하에서 세계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비록 지속적으로 노력은 한다고 하더라도 당분간은 잠꼬대에 불과할 것이므로, 다른 방법도 입체적으로 모색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우선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들부터 차례로 검토하며 해결책을 강구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4. 분쟁의 해결

 

 

분쟁에는 국내적 분쟁도 있고 국제적 분쟁도 있다. 국내적분쟁의 요인도 단일민족국가와 다민족다인종 국가 간에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단일민족국가에서는 주로 국내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상배들 간의 암투나 실력행사가 두드러진다. 그 반면에 다민족다인종 국가에서는 그러한 권력투쟁의 요소에다가 각 민족인종간의 불화가 항상 분쟁요인으로 잠재해 있어서, 각 이익집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합력이 약해지면 분쟁이 곧 가시화되어 버린다. 또한 단일민족국가나 다민족국가를 막론하고 부의 편중이 심해지면 그 자체로서 분쟁의 커다란 요인이 되어 왔다. , 정치적경제적동기가 국내적분쟁의 주요 요소이다. 거기에다가 문화적 차이도 분쟁의 한 요인이 될 수 있으나,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정치적경제적 기회의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수가 많았다.

 

국내적 분쟁은 흔히 그 분쟁의 폭력적 운동성향을 외부로 발산시킴으로써 내부적 모순을 은폐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작용함에 의하여 엉뚱한 국제적 분쟁을 야기시켜 오기도 했다. , 국내적 분쟁과 국제적 분쟁은 많은 경우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도 하므로, 국내적 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발생가능한 국제적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매우 효과적인 예방적 조치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사회에 있어서 세가지의 기본적인 권리가 충족되어야 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정치적으로는 자주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립이 존중되어야 하고, 문화적으로는 존엄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 세가지를 자주(정치적)자립(경제적)자존(문화적)의 세마디로 요약하여, 삼자원칙(三自原則)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삼자원칙은 즉, 모든 민족이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 내지 신식민지적인 모든 국제적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점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원칙이다.*

 

국내적 분쟁을 해결하려면 단일민족국가에서는 무엇보다도 삼자원칙에 입각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공고히 하는 것이 긴요하다. 여기에서 다루려는 정치적 자유란 반드시 비폭력적이면서 사회도덕적으로 타당한 선에서 각 개인의 정당한 의견이 존중되는 테두리에서의 자유를 뜻하며 제멋대로 하는 방종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경제적 평등이라는 것도 무조건적인 평등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으므로, 사회계층간 반목의 요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극단적인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윤리적으로 합당한 선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인 부의 균배(均配)를 뜻하는 것이다. 물론 민족사회내의 각 개인의 문화적 취향에 대해서도 상호 존중해 주되 민족사회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민족국가에서는 각 종족집단에서의 삼자원칙을 존중해주면서 각 집단간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보장해 주는 것이 긴요하다. 각각의 소규모집단이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분쟁도 그 해결원칙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리라 볼 수 있다. 평화적 국가가 되는가 못되는가 하는 것은 각 국가의 구성원들의 능력에 맡길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외부의 세력을 빙자하여 어거지로 평화를 꾸미는 것은 오히려 분쟁의 씨앗만을 더욱 키우는 결과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류의 역사는 풍부한 예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국제적 분쟁은 일반적으로 국내적 분쟁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실제로 어떠한 형태의 분쟁해결방법에 접근하는 것은 국제분쟁 쪽이 더욱 알기 쉽게 전개되기도 한다. 설령 그것이 대규모전쟁에 의한 것일지라도 표면적으로만은 일단 정복이건 강화(講和)이건 간에 두가지 중의 한 형태로 귀결되는 게 상례이다. 만일 국제관계가 불평등하게 이루어지면 표면상의 귀결과는 관계없이 항상 극렬한 분쟁의 요소가 폭발직전에 처해 있게 마련이다. 국제적 분쟁은 정치적 패권주의나 경제적 불평등 강요, 문화적 갈등에 의한 것이 대부분인데, 표면상 내세우는 분쟁의 명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경제적 실리를 얻으려는 목적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인류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국제적 분쟁을 피하려면 국가간의 평등한 상호관계를 정립해야 하며, 각 국가의 고유한 문화양식에 대하여 일체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 각 국가의 삼자원칙을 존중해서 그 원칙을 침범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한 자국의 물질적 풍요만을 위해서 타국에게는 불평등한 무역을 자유무역이라는 표리부동한 이름하에 강요하거나, 자국의 풍요를 위한 물질적 수탈 목적에 맞게 약소국들의 위정자들을 움직이기 위하여 내정간섭을 자행한다던가 하는 조잡하고도 치사스러운 제국주의적 발상부터 완전히 일소하지 않는 한 국제사회에 진정한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항상 분쟁의 가능성을 키워 나가게 되는 것이다. 삼자원칙만 잘 지켜져도 국제분쟁의 대부분은 그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다가 서로간 모자라는 부분들에 대하여 조건없이 상부상조하는 인류애적인 미덕이 이루어진다면, 인류사회는 세계일가를 초월하여 그대로 지상천국을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현실의 문제들

 

모든 국가와 민족의 평화적 상부상조에 의한 바람직한 세계일가를 건설하자는 데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칠 새 없는 침략전쟁 - 제국주의 - 사상대립 - 냉전 - 국제블럭화 - 지역분쟁 등이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악순환을 되풀이하거나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세계일가라는 인류의 고상한 이상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여전히 국가와 민족간의 이해관계가 팽팽하게 대립하여 상호양보에 인색하며, 특히 강대국들의 일방적 이익추구로 삼자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고, 국제적 조절기구는 그 편파성으로 인하여 극히 제한된 역할밖에는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현대 인류사회는 평화적 세계일가를 꿈꿀 수 있는 어떠한 실제적인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기본여건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극히 야만적인 적자생존의 광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되 군비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고, 자유무역을 외치되 일방적인 경제적 이익만을, 세계일가를 외치되 자국내에서의 집단분쟁조차 해결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말하자면 평화로운 인류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 모범적인 문명사회가 지구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세계일가의 이상을 향하여 전 인류가 진일보하려면 무엇보다도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그러한 인류사회의 모범이 될만한 견본적인 사회가 선을 보여야 하며, 그 규모는 클수록 바람직하긴 하지만 규모가 적더라도 알찬 견본이 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선 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문명의 씨앗을 키워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회라고 해도 막연한 의욕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지금과 같은 약육강식의 시대에서는 우선 살아남은 후에야 다른 인류사회에도 점차로 그 씨앗을 퍼뜨려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소규모 인류사회를 변혁시키는데 있어서도 우선 선각자들이 앞장서고 대중이 함께 호응하여 움직여주어야 하듯이, 국제사회에서도 선각자적인 역할을 할 국가나 민족은 필요하다. 물론 인류역사상 여러 국가나 민족집단들이 세계를 통일하여 지상천국을 이루려는 선각자들인 것처럼 행동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모두 다 그 기본적 소양이 터무니없이 부족하여 참담한 살륙과 더욱 깊은 증오만을 남긴채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더욱 기본적인 문제는 저들이 모두 다 평화적 방법이 아닌 폭력적 방법으로 저들의 의도를 관철하려고 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저들의 역사 자체가 평화보다는 분쟁의 연속이었던 데서 형성된 고질적인 폭력적 성향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새로이 세계평화의 선구적 역할을 맡아야 할 국가나 민족은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가장 평화애호적이면서 국제적인 평화공존의 지혜를 오랜 역사를 통하여 터득해 온 국가나 민족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국가나 민족은 인류사회의 평화를 위한 가장 훌륭한 민족적 슬기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러한 지혜는 곧 모든 인류가 더불어 살며 세계일가를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지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격을 지니고 현존하는 국가나 민족을 인류사회는 알고 있는가? 우리는 세계평화의 파랑새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 를 편견없이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예로 든 패권주의자들은 그 역사적 행태로 보건대 이러한 조건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아프리카나 인도동남아시아라틴아메리카 등의 열국(列國)도 거의 모두가 역사적 경험이 일천하거나 상호투쟁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오랜 역사활동을 해 온 동아시아의 지나와 한민족사회인데, 주지하다시피 장성 이남의 지나사회는 극심한 내우외환의 연속으로서, 몇가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단 오십년도 평화롭게 지낸 적이 없을 정도로 심한 혼란과 폭력의 연속이었다. 다민족국가의 특징인 민족간 분쟁에 있어서, 서기 1960년대 후반의 문화혁명때만 해도 숱한 소수민족들이 중앙권력의 극심한 차별적 탄압에 희생되었던 바가 있고, 그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되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저들에게 올바른 평화적 철학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헛된 중화주의와 탐욕스런 권력투쟁에 더욱 열성적이었던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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