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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창제의 1등공신은 세종의 딸 '정의공주'

한글기호 가름토를 부활시킨 주역은 세종의 딸 정의공주였다!

신민수 우리말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3/05/29 [14:38]

훈민정음창제의 1등공신은 세종의 딸 '정의공주'

한글기호 가름토를 부활시킨 주역은 세종의 딸 정의공주였다!

신민수 우리말전문위원 | 입력 : 2013/05/29 [14:38]
훈민정음과 정의공주(貞懿公主) - 죽산안씨족보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창제 이야기 



[역사=플러스코리아]신민수 전문위원= 정의공주(1415년 ~ 1477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차녀이며,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세조의 누나이다.

정의공주는 죽산안씨인 안맹담(安盟聃)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죽산안씨대동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     ⓒ 신민수 우리말전문위원



 


 
 
 
 
 
 
 
 
 
 
 
 
 
 
 
 
 
 
 
 
 
 
  
위 내용에는 참으로 이상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은 공주가 변음과 토착의 원리를 즉시 풀었다는 구절입니다.
위 구절은 한글[가름토]기호가 있었다고 해야만이 이해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소리기호가 있어야 그것을 보고 변음과 토착을 즉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변음과 토착의 구절을 해독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름토가 있었다고 보면 바로 해독이 되는 내용입니다.
  

변음[變音]은 목구멍[ㅇ] -> 혀근[ㄱ] -> 혀끝[ㄴ] -> 치사이[ㅅ] -> 입술[ㅁ]이며
토착[吐着]이란 소리를 토하는 원리로써 ㅇㆆㅎ/ㄱㅋ/ㄴㄷㅌ/ㅅㅈㅊ/ㅁㅂㅍ입니다.


 
그리고 한글기호를 세종대왕님께서 직접 한글기호를 만드셨다면 변음, 토착을 몰랐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말이 안 됩니다.
결국 한글기호[가름토]는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며 이 한글원리의 핵심을 푼 사람은 정의공주가 됩니다.
한글기호 28자는 여러정황으로 보아 세종이전부터 문서로써 쭉 전해저 온 기호로 보여집니다. 
한글기호는 뜻이 담겨있는 뜻글이란 사실을 발견하여 이를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김봉규 13/06/07 [09:10] 수정 삭제  
  에 있는 기록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始製訓民正音而變音吐着猶未畢究使諸大君解之皆未能遂下于公主卽解究以進世宗大加稱賞特賜奴婢數百口

는 다음과 같이 ( ) 안의 어구가 생략 압축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世宗憫(朝鮮之愚民朝鮮)方言不能以(中原國)文字相通(是故世宗)始製訓民正音(冊)而(朝鮮方言之)變音吐着猶未畢究(是以)使(自己之)諸大君解之(雖然諸大君)皆未能(解之)遂(世宗)下(命)于(貞懿)公主(解之)卽(貞懿公主)解(之)究以進(上于父王)世宗大加稱(貞毅公主)賞特賜奴婢數百口

뜻마디에 따라 띄어쓰기를 하면

世宗憫(朝鮮之愚民朝鮮)方言不能以(中原國)文字相通 (是故世宗)始製訓民正音(冊) 而(朝鮮方言之)變音吐着猶未畢究 (是以使(自己之)諸大君解之 (雖然諸大君)皆未能(解之) 遂(世宗)下(命)于(貞懿)公主(解之) 卽(貞懿公主)解(之)究以進(上于父王) 世宗大加稱(貞毅公主)賞特賜奴婢數百口

가 될 것입니다. 이를 배달말로 뒤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종님금은 (조선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선)방언을 중원문자로써 서로 류통하지 못함을 고민하셨다. 그리하여 (세종님금은) 처음으로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만드셨다.

그러나 (조선방언의) 변음(바뀜소리=자음동화, 련음현상 등)과 토착(토붙음=체언 조사, 어간 어미 등)에 대해서는 다 연구하지 못하셨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여러 대군들에게 그것을 풀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여러 대군들이) 모두 그것을 풀지 못했다. 마침내 (세종님금은 정의)공주에게 (그것을 풀라고) 하명하셨다. 곧바로 정의공주는 (그것을) 풀어서 궁구하고는 (부왕에게) 진상하였다. 세종님금이 (정의공주를) 크게 칭찬하시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 명을 하사하셨다.

문제는 여기서 과 이 무엇인가입니다. 배달말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아직 명확한 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종님금은 단군조선국 3세 단군 가륵천왕 시절에 삼랑 을보륵이 만든 38개의 가림토문자를 입수하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글자모양은 사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졍린지는 세종28년(1446) 9월 29일조에 있는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자방고전(字放古篆=글자는 옛날의 전자를 본땄다)”이라 했습니다. 이는 세종님금이 이미 있었던 가림토문자를 본땄음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김봉규 13/06/07 [09:21] 수정 삭제  
  세종님금은 모음은 천지인을 기본자로 삼고 여기서 초출자 재출자를 만들었습니다. 자음은 발음기관을 본따 아설순치후에 따라 기본자를 삼고 가획자를 만들거나 기본자를 리용하여 병서자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모음의 기본자와 초출자와 재출자를 알았고, 자음도 기본자와 가획자와 병서자를 알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자들이 실제 말살이에서 쓰일 때는 글자모습 그대로 소리나기[正音]도 하고 바뀌어 나기[變音]도 하(=자음동화 련음)며, 낱말 끝에 토처럼 붙는[吐着] 것(=조사, 어미활용)이 있기도 합니다. 례를 들면, 은 , 은 이지만 에 이 결합한 은 바른소리가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항문]으로 소리가 변[變音]하게 됩니다. 또한 에 이 결합한 은 바른소리가 [찬란]이지만 실제로는 [찰란]으로 소리가 변[變音]하게 됩니다. 와 의 경우 실제로 “돌고/돌지/돌지만/돌아도/도니/도니까...”, ”집이/집도/집만/집까지/집조차/집이나마...“처럼 상황에 따라서 토(=조사, 어미)가 다양하게 붙[吐着]어서 쓰이게 됩니다.

세종님금은 이처럼 실제 말살이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살피지 못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군(=수양, 안평, 금성)에게 이를 풀어보라고 했으나 풀지 못하자, 둘째딸 정의공주에게 하명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주는 이에 대해 풀고서 부왕에게 그것을 진상[以進]하니 세종님금은 크게 기뻐하여 노비 수백 명을 하사한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종님금이 다 살피지 못한 것은 자음 아설순치후의 기본자나 가획자 자체의 소리나 발음방법이라기보다, 자음과 모음뿐만 아니라 실제 말살이에서 나타나는 곡용(=체언 조사)이나 활용(어간 어미)에 따른 문제였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배달말학계에서는 과 을 이렇게 본 사람은 저(김봉규)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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