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지구상에 와서 살다 죽어 간 것이 100만 년이나 되었지만,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6,000년밖에 되지 않았다.”(르네 에티앙블)
문자의 역사, 그것은 6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일구어낸 인류의 서사시이며, 메소포타미아에서 황하에 이르기까지의 문화가 담긴 장대한 파노라마이자 영감에 가득 찬 예술 세계이다. 문자는 인류 문명의 주춧돌이며, 그 역사는 인류가 물려받은 기억의 총량이다.
인류가 존재한 수만 년 동안 선화(線畫), 기호, 그림 등 간단한 의사소통의 수단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문자가 존재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문자를 사용하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호나 상징 체계가 있어야 하며, 이 체계는 여러 사람 사이에 합의된 것이라야 한다.
이러한 체계는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자의 역사는 그야말로 오랫동안 천천히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다.
그런데 세계에 존재하는 약 70개의 문자 중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가장 빠른 속도로 창제되고 가장 짧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러 사람이 합의하고 활용할 수 있는 문자가 동아시아 변방의 조선에서 1443년 12월 이달에 만들어졌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문자는 이름부터가 백성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담긴 ‘백성을 깨우치기 위한 바른 소리’라는 의미를 함축한 ‘훈민정음’이라고 불렀다.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은 글자의 모양은 단순하지만, 기형학적으로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만방의 어떠한 언어와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참으로 신묘하고 충실한 문자로서 세종대왕이 물려준 가장 소중한 민족 유산이다.
“이건 조약돌이 아니라 금속활자입니다.”
2021년 6월 29일 세계의 문자사와 아울러 금속활자 사에 대변혁을 가져올 어마어마한 일대 사건이 서울 도심의 한 골목에서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지닌 뇌관이 터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600여 년 전 한양 도성의 중심부였던 서울 종로구 인사동 피맛골에서 유적을 발굴 중이던 수도문물연구원 조사팀의 외마디가 신호탄이었다.
16세기 조선의 건물터 땅속에서 나온 도기 항아리 옆구리 구멍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삐져나온 조약돌 모양의 유물 몇 개! 조심스럽게 씻어보니 15세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즈음에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 조선 초기 세종대(代)에서 세조 연간에 주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갑인자인 금속활자라는 판독 결과가 나왔다.
더욱이 한두 점이 아니라 항아리 내부에는 무려 1600여 개의 금속활자가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이 금속활자 중 일부는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1450년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로 활판인쇄를 시작한 때보다 제작 시기가 수십 년 앞서는 것들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 한정되어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되었는데, 동국정운은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이 조선의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된 ‘여린히읗’, ‘비읍 순경음’ 등의 활자는 물론이고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연결 표기해 토씨(어조사)의 구실을 한 연주활자(連鑄活字)들도 10여 점이나 나왔다.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인 조선 전기에 제작된 훈민정음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발견되었듯이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인이 인정하는 금속활자 강국이다.
이것은 우리만의 주장이 아니라 교육·과학·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하여 국가 간의 협력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전문기구인 유네스코가 인류가 보존 보호해야 할 문화적 세계기록유산으로 직지심체요절을 2001년 9월 4일 지정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강국임이 입증된 것이다.
그런데 세계가 인정한 最古의 금속활자 강국에서 이상하게도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원리를 기록해 놓은 ‘훈민정음해례본’은 목판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앞서 인용한 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사용된 금속활자가 있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왕의 창작물인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문자를 풀이한 서적 ‘해례본’은 목판으로 출판하였으며, 반 천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작스럽게 한양이 아닌 안동과 그 후 상주라는 경상도 지역에서만 발견되게 하였는지 궁금증을 떨칠 수가 없다.
최근 한류 문화에 대해 세계인의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한글에 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는 기회를 잘 활용하여 ‘28자로 이루어진 자모음으로 세상의 어떠한 소리도 적을 수 있는’ 신비하고 소중한 자랑스러운 문자 ‘훈민정음’을 문자가 없는 나라와 종족에게 전파하여 명실상부한 세계 인류 문자가 되게 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일 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을 초월한 인류의 영원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해례본의 금속활자본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세종대왕의 지혜와 숨결이 깃들어 있는 훈민정음 원본을 반드시 찾아내어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주어야 하는 소명 의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 원본 기사 보기:경기남일보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연재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