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리성계 '위화도 회군' 의주성에서 35리, 현재는 10리현재 북한의 위화도와 신도는 역사기록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허구[홍익/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김종문] 압록강은 천하 3대강이었다. 압록강은 한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배달겨레의 성산인 백두산에서 발원하였다. 백두산은 좌우 천리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었으며 백두산 서쪽의 천여리의 강들이 모인 압록강은 점점 거대해졌다고 한다. [참조기사: 현 백두산은 조선의 백두산과 달라, '몽골의 동남쪽에 있었다' [참조기사: 천하 3대강 '압록강'은 북한의 압록강이 아니다 역사기록들에 의주지역 서쪽 압록강은 압록강(5리) 소서강(1리) 증강(4리) 여러 강들로 나뉘어 졌으며 강들 사이에는 커다란 섬들이 많이 있었다. 의주서쪽의 섬들을 포함한 압록강의총 너비는 20여리에 달하였다. 현재 남북의 한반도의 의주서쪽의 압록강에도 여러 섬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섬들은 역사기록들과 불일치한다. [참조기사: 조선의 압록강, 의주에서 요동까지 강폭은 뱃길 20리 위화도는 둘레가 40리, 의주성에서 35리의 거리였다 威化島(위화도)는 고려 말기인 1388년(우왕 14) 고려군이 요동정벌을 위하여 머무르던 섬이다. 태조대왕 이성계는 威化島回軍(위화도회군, 1388)으로 고려를 장악한 후 역성혁명(1392)을 일으켜 대조선COREA를 개국하셨다. 당시 위화도에 머무르던 군사의 수는 10만 대군이었다고 한다. 위화도는 10만 대군이 머무를 수 있는 커다란 섬이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3권 평안도(平安道)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화도(威化島) 검동도의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다. 검동도와 위화도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의 지류가 가로막고 있는데 굴포(掘浦)라고 일컫고 주성(州城)에서 25리 떨어졌다. 위화도는 검동도 아래에 있던 섬으로 둘레가 40리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9년(1488) 6월13일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검동도(黔同島)와 같은 것은 거리가 의주성(義州城)으로부터 30여 리이고, 위화도(威化島)는 그 반이 더 떨어져 있는데다가 모두 난자강(蘭子江)·압록강(鴨綠江) 두 강의 밖에 있으니, 이는 곧 6, 70리의 노정(路程)으로서 왕래(往來)하는 데 거의 하루가 걸리는데," 의주성에서 위화도까지 왕복 70리(32.9km)의 노정이라면 35리(약 16.45km)의 거리라는 것이다.
현재 북한의 위화도와 의주의 거리는 의주 중앙을 기준으로 해도 5km정도로, 왕복 70리(약 32.9km)정도라는 역사기록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현재의 위화도와 검동도가 가짜인 것은 두 섬의 거리로도 알 수가 있다. 위화도와 검동도의 거리는 15리 역사기록들에 검동도와 위화도의 거리는 약 15리(7,050m)였으며 섬들이 커서 의주 목사(義州牧使)와 인산 절제사(麟山節制使)가 나누어서 수호(守護)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세조 11년 을유(1465,성화1) 2월15일 (임진) "난자도(蘭子島)·검동도(黔同島)·초모도(招募島)의 3도(島)는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위화도(威化島)는 인산 절제사(麟山節制使)가, 신호수(申胡水)는 방산 만호(方山萬戶)가 수호(守護)하게 할 것." 압록강 의주서쪽에는 커다란 섬들이 많았으며 지역이 넓기에 의주목사와 인산절제사와 방산 만호가 나누어 수호하였던 것이다. 중종 35년 경자(1540,가정19) 8월23일 (임오) “ ‘위화도(威化島)에서 금동도(黔同島)까지는 15여 리이고," 역사기록들에 위화도와 검동도의 거리는 15리였으나 현재 북한의 압록강에 있는 이러한 섬들은 150m거리로 거의 붙어있다. 압록강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었다. 의주서쪽에 압록강에는 둘레가 10리가 넘는 커다란 섬들이 많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3권 평안도(平安道)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오적도(於赤島) 난자도(蘭子島)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7리이다.” "검동도(黔同島) 주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위화도(威化島) 검동도의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다." "난자도(蘭子島) 위화도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조몰정도(鳥沒亭島) 주에서 서쪽으로 7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35년 경자(1540,가정19) 8월23일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위화도(威化島)에서 금동도(黔同島)까지는 15여 리이고, 금동도에서 설함평(設陷坪) 한 변까지는 12∼13리였으며, 설함평의 길이는 어림잡아 일식(一息)은 되었다. 의주서쪽 압록강에는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한 커다란 섬들이 많았다. 그러나 현재의 압록강은 강이 너무나 작아서 수십리의 섬들이 있을 수가 없다, 현재 의주서쪽에 몇 개의 섬들은 작은 수로들을 연결하여 만든 인위적인 섬들로 판단된다.
신도의 위치는 조작되었다. 신도는 동국조선COREA의 영토중 서쪽 마지막 섬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 14년(1636) 김육의 조경일록(朝京日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저녁 때 거우도(車牛島)에 도착하였는데, 피도(皮島)와의 거리는 50리였다." "밤이 깊어 새벽이 되면서 북풍이 일어나므로 배를 옮겨 섬의 동쪽에 있는 우모연(牛毛淵)으로 가 머물렀는데, 우리 나라의 영토는 이 섬의 서쪽에 있는 신도(薪島)에서 끝난다고 하였다." 신도는 거우도(車牛島) 서쪽에 가까이 있었으며 동국조선COREA의 영토인 섬은 신도에서 끝난다고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광해(光海) 신유년 이후의 항해노정(航海路程)은 선천(宣川) 선사포(宣沙浦)에서 발선(發船)하였다. 혹은 함종(咸從)을 경유해서 가고 혹은 안주(安州) 노강진(老江鎭)을 경유하여 간다.철산가도(鐵山椵島) 60리, 거우도(車牛島) 1백 40리, 녹도(鹿島) 5백 리 이로부터 요동땅이다." 철산가도는 의주 남쪽에 있었던 지명으로 신도는 철산가도 서쪽 1백 40리의 거우도(車牛島) 서쪽에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신도는 동쪽에 거우도가 없다. 녹도(鹿島) 5백 리를 지나면 요동땅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신도까지의 섬들은 동국조선의 영토이고 녹도를 지나면서 부터는 요동에 속하였던 것이다.
의주를 지난 압록강은 서쪽으로 요동과 평안도 사이를 천여리 흘러 북신구(北汛口)를 거쳐 바다로 들어갔다. 신도는 동국조선COREA의 서쪽 마지막 섬이었으며 신도를 지나서도 압록강에 섬들은 있었다. 그래서 신도를 지나면 요동땅이라는 기록들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배달겨레의 역사에서 위화도회군은 대조선COREE의 개국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고려말 10만 대군이 머물렀던 위화도는 둘레가 40리(약 18.8km)에 달하였으며 의주성에서 위화도까지 35리(약 16.45km)정도의 거리였다. 현재 북한의 위화도는 의주남서쪽으로 4km(약 8.5리)정도의 가까운 거리이다. 거리자체가 맞지 않는 것이다. 역사기록상에 압록강 의주서쪽지역에는 난자도(蘭子島, 둘레 10리) 검동도 (黔同島, 둘레 15리), 오적도(於赤島, 둘레 17리), 조몰정도(鳥沒亭島, 둘레 20리), 위화도(威化島, 둘레 40리), 설함평(設陷坪, 길이는 일식(一息, 30리))등 커다란 섬들이 많이 있었다. 현재 의주서쪽의 압록강의 너비는 160m로 너무나 좁으며 그 안에 역사기록들과 일치하는 섬들이 하나도 없다. 신도는 대조선COREA의 서쪽 끝 섬으로 철산가도(鐵山椵島) 서쪽 1백 40리(약 65.8km)에 거우도 서쪽에 있었다. 현재의 신도는 철산가도에서 89리(약 42km)거리에 있으며 동쪽에 거우도(車牛島)가 없다. 현재 북한의 위화도와 신도는 역사기록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영문고지도들을 공부하다 우연히 고지도들의 중요지명들이 이동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현재의 중요지명들의 위치가 세계사조작을 위하여 이동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2년여간 지명이동사례들을 탐구하여 정리하였습니다. 2014년 7월부터 고지도조작의 사례들을 모은 ‘고지도의 진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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