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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천 소설가] "동학만이 답이다!" -(1)

ㅡ학문과 난(동학난)에 갇혀 있는 동학을 천도의 영역으로 탈출시켜야 한다

이하천 소설가 | 기사입력 2020/11/12 [12:00]

[이하천 소설가] "동학만이 답이다!" -(1)

ㅡ학문과 난(동학난)에 갇혀 있는 동학을 천도의 영역으로 탈출시켜야 한다
이하천 소설가 | 입력 : 2020/11/12 [12:00]

 

▲ 이하천 소설가 ©플러스코리아

 

기독교와의 접촉

부모님이 천주교 신자였던 탓에 나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영세를 받아서 마리아란 본명을 갖게 되었다. 남편도 고등학생 때 천주교 신자로 영세를 받아서 안드레아라는 본명을 가졌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식도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했다. 얼마 후 남편과 나는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고, 5년 후 20대 후반 캐나다로 옮겨 가면서 처음 기독교(=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포들과 섞이게 되었다. 우리 스스로 이민자가 된 것이다. 이민생활이란 그 사회와의 이질감 때문에 늘 자신의 뿌리인 조국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이 말은 교회가 교포들에게 서로 소통하는 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고여 있는 물속에서 정신적 헤엄을 치는 특이한 상황은 교회가 기댈 곳이 되어 정서적으로 도움도 되지만, 부작용도 따를 수밖에 없다.

 

우선 기독교의 극성스러운 언어는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요란스러운 기도, 한탄, 슬픔이 넘치는 분위기는 더욱 더 그랬다. 40년이 넘는 과거시기이니 그 때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인의 정서적 지형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장면들이 몹시 낯설었다. 왜 울고 불고 난리들이야, 뭐 이런 심정. 그래서 일단 기독교에서 물러났다. 그 때만 해도 교회를 떠난 이민자의 삶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독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속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이건 아니다’는 강력한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런 저항을 하게 만드는 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되지 않은 채였다. 기독교에 대한 막연한 저항과 반감만이 나를 지배했던 시절이었다.

 

36세 때 귀국 후 나는 정신적으로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나는 부모님 보호 아래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지만, 워낙 사회에 대한 언어가 없는 집안 분위기로 인해 의식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떠밀리듯 외국으로 나갔었다. 때문에 나는 나름 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한국사회를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외국에 나가서 서서히 의식이 깨어났기에 잔뜩 기대를 걸고 귀국을 했었다. 이민자의 삶에서 가질 수 없는 품위, 자존심에 극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에 나는 그 품위와 자존심을 찾아 귀국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 한국인으로서의 품위와 자존심...이런 심리적 배경이 사나운 폭풍우처럼 나를 지배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86년 내가 본 내 조국 한국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였다. 젊은이들은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있고 대학가는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영양실조로 털이 듬성듬성 빠진 새끼 들고양이들의 울음소리, 그 새끼고양이를 패대기쳐서 밖으로 내동댕이치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으악~ 비명을 지르게 했다. 재래시장을 처참한 모습으로 기어 다니는 장애인들의 모습은 나를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렸다.

 

그 당시 나에게 첫 번째로 등장한 관문은 한국의 여성문제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성들은 나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울었다. 나는 그들의 울음소리에 늘 숨이 막혔다.

귀국 후 나는 이 고통의 근원, 울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이유를 찾아 매일매일 개인사와 사회사의 심리 속으로 잠수를 했다. 어쩌면 나는 이 해답을 찾기 위해 귀국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머리를 짓누르는 어두움의 실체를 찾기 위해 어떨 때는 책 속으로, 어떨 때는 종교로, 어떨 때는 사람을 찾아서 미친 듯이 다 구해보았다. 어디서도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한 나는 혼돈의 시간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 자신이 직접 찾아 나서기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도망 다니다 더 이상 도망 다닐 수 없는 마지막까지 와 버렸기 때문에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그것은 마치 캄캄한 밤, 사납게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여성들의 울음소리를 온몸에 휘감으며 앞으로 걸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 길을 찾기 시작한 지 몇 년 후 나는 글을 하나 생산했다. 첫 번째 소설 ‘조용히 쓸어라 대지는 깊이 잠들지 않는다’(통나무. 1993)에 작가의 말로 넣게 된 ‘언어와 해방’이라는 글이다. 그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15년만에 다시 보는 조국의 모습은 또 다른 형태로 내게 충격을 주었다.

TV만 틀면 쏟아져 나오는 외국말과 여성들의 인형적이고 유아적인 태도와 언어, 남성들의 권위적 인 태도, 대학가에 난무하는 화염병과 돌멩이, ‘어머니 울지 마세요. 어머니 손톱을 깎아 드릴께요, 어머니 울지 마세요.’ 라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하는 대학생 남자, 화염병에 맞아 불에 타면서 펄쩍펄쩍 뛰는 전경들, 전경들의 방망이에 쓰러져가는 대학생들, 분신자살하는 노동자들, 자신들도 잘 모르는 이념을 위해 결국 마지막 코너에 몰려 죽어가는 소위 우리가 빨갱이라고 부르는 역사 속의 남녀들, 전향한다는 단 몇 자를 거부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장기수들, 기도원 지하실에 굵은 쇠사슬로 발목이 묶인 채 “내가 왜 이곳에 갇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소위 정신병자로 분류되는 여자들, 인신매매단에 잡혀가는 젊은 여자들, 성폭행을 당한 며느리를 더럽다고 쫓아내는 시어머니, 성폭행을 당해 절망에 떨고 있는 딸을 붙들고 겨우 ‘우짜노! 우짜노!’만 외쳐대며 우는 어머니들, 16세 난 어린 여아를 작두에 올라서라고 성화를 부리는 신경두꺼운 어른들, ‘창피는 잠간이고 이익은 영원하닷!’하고 외쳐대는 사람들, 세계 최고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가진 나라, 그러면서도 남성들은 너도나도 민주화를 외쳐댔고 6.29 선언으로 시끄러운 나라... 나는 내 영혼이 개인의 역사와 사회의 역사 속에 끼어 드디어 박살이 나버리는 그런 위기감에 처했다.

 

나는 이런 극한 상황에 도달할 때마다 ‘오! 어머니!’ 하고 내 개인의 어머니가 아닌 ‘대지의 어머니 를 불렀다. 반만년 역사 동안이나 이 척박한 땅에 잠들어 있는 대지의 어머니...‘오! 어머니! 당신은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 것입니까? 오! 어머니 어머니...’

 

- 독자 여러분, 우리 모두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세계로 침잠해 보자. 오랜 시간 동안 그런 훈련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분명 우리의 영혼이 그 원인과 이유조차 불분명한 망령들의 외침과 울음소리와 통곡소리를 듣고 불안과 죄의식과 두려움에 떨며 서 있는 장면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반만년 역사 속에서 목적도 없는 소리처럼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쓰러져간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한국여성들의 혼백의 신음소리일 것이다.

  

나는 그때 왜 대지의 어머니를 불렀을까? 나는 그 당시 우리에게 영혼의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생물학적인 어머니는 있어도 마음의 성장을 도와 줄 언어가 있는 역사의 어머니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가부장제에서 살아야 했던 극심한 여성억압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첫 번째 관문 통과는 그렇게 처절한 피를 뿜으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의식이 깨어나지 않았던 때 한국을 떠났다가 의식이 깨어난 상태에서 돌아왔다. 또 한국사회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에 잔뜩 기대를 하고 돌아왔던 때였다. 나는 그야말로 박살이 나는 느낌이었다. 이게 내 나라라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맞다면 나는 당당함이니 자존심이니 품위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민족이란 공동체의 개념이라는 선상에서 그렇다.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상상을 하면 기분은 좋겠지만, 그것은 허상이고 가짜고 위장에 불과했다. 1986년이니 지금부터 30년여 전이었다. 지금의 30대가 막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이미 그 당시 지금의 젊은 세대가 세월호 사태와 최순실 사건으로 느꼈을 무너짐, 황당함, 참담함, 절망감을 직접 경험한 셈이었다.

    

이게 내 조국이라니! 나는 사방으로 날뛰고 있는 나의 정신을 어딘가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 기대고 싶은 심정을 어쩔 바를 모르며 또 다시 종교를 찾았다. 기독교, 불교...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은 신의 세계에,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인간이 해결해야할 일을 신에게서 해답을 찾는 것을 그 당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책임방기였다. 또 신 때문에 오락가락 하는 마음, 말하자면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오면 나에게 어떤 행운이 찾아 올 것 같은 나약한 마음을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면서 인간으로서의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의미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심리적 측면의 역사 속으로, 나 자신의 내면으로,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속으로 잠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사회의 이상한 모습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할 게 너무 많았다.(이 과정은 지면 상 다음 책 ‘동학만이 답이다’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 사형집행전 해월 최시형  © 이하천 소설가



동학과의 첫 만남

‘이프’라는 페미니즘 잡지가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제사에 대한 글을 써주기를 부탁했고 그 후 책으로 출판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그 당시로선 아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아무도 할 수 없다고? 그럼 내가 하지, 뭐 이런 것. 그래서 나는 ‘나는 제사가 싫다’를 쓰기 시작했다. 전체적 틀은 남녀의 관계가 권력관계로 굳어진 제사를 사랑의 관계로 의식을 전환시키는 것. 자손들을 이런 식으로 가르치다니!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심리에 깊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제시하지 않고 제사만 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회오리바람처럼 나 자신을 휘몰아 가며 역사 속으로 잠수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역사 속에 반드시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이 있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그 해답을 동학에서 찾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전에는 동학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나는 남편과 함께 경주 현곡면에 있는 최제우 생가와 용담정을 찾았다. 그리고 새로운 제사개념 향아설위 즉 위패를 조상을 향해 놓지 않고 살아있는 나를 향해 놓는 개념을 발견했다. 그것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틀을 제공하는 개념이었다. 그 때까지 여성은 자신을 늘 시댁 조상과 아들과 남편에게 기대고 사는 인간, 비주체성을 강조한 문화세습이라는 틀 안에 강제로 갇혀 살아야 했다. 그런데 동학에서 조상을 향한 위패를 나 개인을 향해 놓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던 것이다. 100년 전에 해월 최시형은 의암 손병희에게 향아설위의 이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내가 오만 년을 바꾸지 못할 법을 새로 만들었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이하천. 나는 제사가 싫다. 이프, 2000. 30쪽.) 그 당시 얼마나 한국사회가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잠겨져 있었으면 해월 최시형이 그런 발언을 했겠는가?그 책을 쓸 당시도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았는데 해월 당시로서야 오죽했겠나? 뒤 남편과 동학을 하자고 합의를 봐서 집과 가까운 곳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그 뒤 유야무야 동학은 또다시 의식의 저 편으로 사라졌다. 김지하, 김용옥 이런 사람들의 동학에 대한 언급이 책으로 언론으로 눈에 띄었지만, 그 때뿐 동학은 계속 내게 보였다 사라졌다.

 

1993년 1월 6일 동학 100년을 기념하여 도올 김용옥의 특별기고문이 조선일보에 실렸는데, 나는 마지막 처형 직전의 최시형 사진이 담긴 그 기사를 가위로 오려 표구를 해서 그 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몇 십 년을 내 거실에 걸어놓았다. 매일 매일 그 기사와 처형 직전의 최시형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나는 한발자국도 동학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기고문을 보물 다루 듯 했을까? 그 기고문의 핵심은 동학을 사가들이 동학난이라는 사건 위주로 역사를 왜곡하는 오류를 범했으며 수운 최제우 이후 30년 동안 해월 최시형은 혁명이 아닌 천도를 통한 개혁추구를 했다고 서술했다.

  

2020년 다시 동학을 만나다.

조국사태 후 나타난 정신적 대지진으로 우리사회의 정서적 지형은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내면전쟁이 발발했다. 4.15 총선과 맞물려 진보와 보수는 각자 뭉치기 시작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숨어 있던 사랑교회 목사 전광훈이 ‘하느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 하면서 그 모습을 전면 드러냈고, 코로나19의 습격으로 이만희가 이끄는 신천지라는 기독교 종교집단이 우리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신천지에 모여 든 수많은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저들이 우리사회에서 조금이라도 기댈 곳이 있다면 저런 황당한 데 빠져들었을까? 그리고 나타난 n번방 미성년 성착취 동영상 사건. 많은 젊은이들이 관여된 일련의 사건들은 나를 계속 놀라게 했다. n번방을 운영하던 박주빈은 처음 포토라인에 섰을 때 ‘손석희와 윤장현, 김웅’을 거론하며 그 분들에게 사죄한다고 했다.

 

우리사회는 그 당시 박주빈의 엉뚱한 발언을 자기과시욕이라는 선상에서 보았다. 그러나 나는 달리 본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박주빈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우리사회의 어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보았다. 우리사회의 윤리성이 바싹 깨진 것을 이미 안다는 듯 내가 하는 거나 당신네들이 하는 거나 영역만 다를 뿐 무엇이 다르냐는 듯 당당하게 유명인인 손석희 이름을 거론했다. 특히 정치권에서 내로남불로 엉망진창인 모습을 매일매일 연출하니 나도 내 이익을 위해 살겠다는 것이 왜 나쁘냐는 듯 너무도 당당했다. 정치인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이 훌륭한 모습 대신 꼼수에 꼼수로 건너뛰면서 얼마나 국민들의 정신에 집단 테러를 가하는 지, 이런 행태가 젊은이들의 윤리성에 얼마나 치명적 상처를 주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위헌 위성정당 비례대표 후보등록, 기형에 기형을 거듭 하면서 각자의 정치적 이권에만 몰두하는 장면, 그러면서 젊은이들에게 윤리성을 지켜라, 올바로 살아라 하면 누가 그 말을 들을 것인가. 그야말로 윤리성은 한국인의 심리 속에서 뒤틀리고 뒤엉켜져서 제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만들었다. 

  

하늘은 정신적 땅이다

정신적 길을 놓친 저 아이들을 어떻게 하나? 나는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동학만이 답이다!’라는 생각을 불현 듯 하게 되었다. 나는 동학에 대한 자료와 기독교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집에 동학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가 다 모아져 있었다. 심지어 전봉준의 재판기록까지. 나는 그 자료들을 살피면서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싶었다.

 

지구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하늘은 정신적 땅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도 땅 투기가 일어났다. 일제침략 시기를 거치면서 문화권력이 센 서양이 우리의 하늘을 차지한 것이다. 그 땅을 우리는 어~하다 그만 빼앗겨버렸다. 남들이 차지한 하늘을 이고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늘은 어디서 찾아야할까? 우리의 하늘은 우리의 역사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시절 기숙사에 기거를 했는데, 그 때 내 본명은 마리아였다. 나는 내 본래의 이름 보다 마리아라고 불러주면 약간 으쓱해지면서 좋아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 지도 모른 채. 그 후 30대 때 그게 말도 안 되고 근거도 없는 가짜 우월감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리아, 세실리아, 에스터...이렇게 20대 초반의 우리는 서로 부르며 좋아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정말 어쩌자고.

 

기독교는 훌륭한 종교다. 성경은 인간이라는 컴퓨터를 이해하는 사용 설명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인들에게 맞는 언어지 우리에게 맞는 언어는 아니다. 성경은 하나의 책으로서 읽는 것은 좋으나 거기에 혼까지 빼앗긴다는 건 한국인으로서 맞지 않다는 얘기다. 마치 공자, 니체, 불교 경전, 베토벤, 모차르트 등 이런 걸 읽고 들으며 나 개인의 인식의 영역을 넓히는데 사용되듯이 성경을 원하는 사람은 그런 차원에서 사용해야 맞다는 말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미국인들이 최제우, 최시형 이름을 부르며 우리의 동학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 되겠는가? 어느 사회나 일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 그는 일생을 신학자로서 살아왔지만 기독교는 한국인의 몸에 맞는 옷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동학의 가르침은 세계 종교사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가치의 결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이상과 구체적 실천을 제시한다. 한신대학의 김경재 교수는 어느 면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알맞은 종교를 꼽으라면 바로 동학일 것이라고 보고, 같은 대학의 김상일 교수도 21세기 세계의 대안종교를 들라면 그것이 동학이라고까지 하였다. 필자도 이런 의견에 동감하는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란다.(오강남, 세계종교 둘러보기. 현암사, 2003. 341쪽.)

 

종교와 언어

나와 기독교와의 불화는 언어였다는 것을 이제야 선명하게 분석하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의 체험기처럼 교회에 들어가서 조직을 보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고 환멸을 느낀 것이 아니다. 입구부터 무언가 뜨거운 채찍 같은 것이 나를 후려쳤다. 나는 그 이유를 그 당시는 알지 못했다.

 

마리아, 요셉, 바오로, 안드레아, 야곱, 말따, 아브라함, 노아, 소돔, 고모라, 주 예수, 골고다, 아멘, 할렐루야...이런 언어는 한국인에게 맞지를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남의 나라 역사다. 그 맞지 않는 언어를 매일매일 쓰며 한국인의 영혼을, 진정성을 다스리니 그렇게 많은 문제가 일어난다. 인간에 있어서 혼의 문제는 뿌리의 문제로서 저 깊은 뿌리까지 물이 가도록 하려면 언어를 바로 써야 한다는 게 핵심이고 나의 지론이다.

 

10대와 20대는 뿌리가 깊지 못한 나무와 같다. 삶의 현상에 대해 20% 정도만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만 보이지 먼 곳은 잘 보이지도 않고 마치 희미한 안개 밭을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순진하다고 말한다. 그런 연령에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다가서면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어 갈 수가 있다. 이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을 하는 것은 부모다. 부모가 언어가 있다면 아이들은 옆길로 잘 새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가 언어가 없는 사람이면 아이들은 쉽게 믿을 곳을 찾아 떠나는 조건이 된다. 한국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독특한 특성이 보인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하느님이란 존재를 영접함으로서 마치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강력한 빽을 가지게 된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이런 심리를 잘 간파하면서 그 허점을 파고들며 협박한다. 하느님, 하느님, 예배, 예배, 십일조, 십일조. 기도기도 하면서 마치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벌이라도 올 것처럼 협박한다. 그건 종교의 참 모습이 아니다.

  

종교란?

세상을 살아보면 어떤 신령한 기운이 이 우주에 흐르고 있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삶을 따라다니는 희노애락, 결혼식, 장례식,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비극적인 일들, 인간이 잘 알 수 없는 이런 세계는 종교의 힘을 빌려서 넘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예식을 통해 한 인간을 보내고 축하하고 자신의 슬픔을 누구인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에게 호소하며 엎드리고 싶은 심정, 인간의 품격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종교란 한 개인의 자발적 생명력, 주체성, 독립성을 형성시키는데 보조적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언제나 내가 중요하다. 서양은 이미 종교를 이렇게 대한다. 그런데 서양종교를 받은 한국은 하느님이란 절대 권력자를 팔아 사적정신으로 종교를 다루고 언어를 그에 걸맞게 쓴다. 교인들의 돈과 노동력을 사용해 자신들의 문화권력과 돈을 위해 움직이는 기독교의 사이비교주와 수뇌부는 개인의 삶과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 사기집단이며 범죄자들로 발전했다. 왜 그럴까? 물론 자신들도 종교의 참의미를 모르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 돈과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도들이 순진했다는 얘기다. 이게 무슨 종교의 자유란 말인가? 헌법상으로 보아도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범법행위다. 종교의 자유란 이름으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n번방도 사이비 종교도 다 육체와 영혼의 엑기스를 빨아먹고 사는 괴물들이다. 이걸 방치한다는 것은 국가의 직무유기다.

 

목사들의 뜻을 이어받은 신도들은 작은 권력자로 둔갑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유지하려 한다. 기독교를 극성스럽게 믿는 사람들은 말을 하다 막히면 하느님을 내세워 방어한다. 마지막 종착역이 하느님이다. 자신의 영혼이 없는 자리에 대신 채워진 하느님은 복을 구걸하거나 천당을 가게 해 달라거나 심지어 구원, 영생을 바라는 탐욕을 채워주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게 무슨 종교인가. 엄밀히 말하면 아직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 이것은 다른 글에서도 이미 말한 미성숙한 사회로 설명이 될 것이다. 미성숙하면 신비하고 성스러운 영역의 하느님조차도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가 올 리가 없다. 그러니 그렇게 극성스러운 언어를 쓴다. 그게 하느님하고 무슨 관련이 있나?

  

▲ (1880년대) 이 땅을 그린 지도에 캐나다 장로교,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미국 북감리교, 미국 남감리교, 호주 장로교, 이렇게 모여 영역을 정했다. 사진=한 부산대 명예교수로부터 입수. ©이하천 소설가

 

나는 한국인이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넘어 가면서 자신들의 영혼과 자존심을 서양에 팔아 넘겼는가 늘 의문을 가졌다. 이 시점에서 내가 아는 한 부산대 명예교수로부터 놀라운 지도 한 장을 건네받았다. 나는 경악에 차서 그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리가 확 깨는 것 같았다. 나는 지도를 보고 또 보았다. 지도가 보여주듯이 그냥 어쩌다 넘어 간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너무도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던 조선은 아사 직전이었다. 이 조선 땅을 본 기독교 계통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이 가여운 땅을 구원 한다는 목표를 세우며 서로 의논한다. 캐나다 장로교,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미국 북감리교, 미국 남감리교, 호주 장로교 이렇게 모여 이땅의 지도를 놓고 영역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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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나누어 가진 하늘의 영역

1. 캐나다 장로교(Canadian Presbyterian):함경도 지역, 원산 함흥,성진, 후에 간도

2. 미국 북 장로교(Northern Preabyterian, U.S.A.):서울, 황해도, 평안도, 경북 일대, 초기에는 부산도 포함하였으나 후에 호주 장로교에 이양. 그들의 선교거점(Mission Station)은 남쪽으로부터 대구, 안동, 청주, 서울, 재령, 평양, 선천, 강계의 8지역.

3. 미국 북감리교(Meth. Epis. Church, U.S.A):서울, 충청, 강원 남부, 평안도의 평양, 영변

4. 미국 남감리교(Meth. Epis. Church South, U.S.A):개성, 강원 북부, 경기 북부, 황해도 남부

5. 미국 남장로교(Southern Presbyterian, U.S.A):처음 북장로교와의 협의를 통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뒤에 이 지역이 너무 넓다고 하여 충청도 지역을 북감리교에 넘기고 호남지역만을 확보하였다. 선교 거점으로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이었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남장로교 계통 선교사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6. 호주 장로교(Austrailian Presbyterian):1889년 데이비스 선교사가 도착했는데, 그 후 그는 300 마일에 이르는 선교여행을 하였다. 1890년 데이비스 목사가 순교한 부산을 중심으로 호주 장로교는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등의 경남 일원을 선교 지역으로 삼았다.

 

선교지 분할 조정은 1910년 초까지 여러 차례 걸쳐 진행 되었다. 이들은 지역이 서로 충돌되지 않도록 안배를 했다.(이만열, 한국기독교교회 100년사. 성경읽기사,1985. 62-63쪽.)

  

정말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이들은 각자가 맡은 지역에서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지었다. 한국인들은 으아악 탄성을 질렀다. 한국인들은 완전히 삶은 달걀처럼 녹아버렸다. 그리고 서양을 꿈의 나라로 신의 나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0년 동안 머리 좋은 사람들 대부분이 서학으로 넘어 가면서 불 꺼진 도시의 하늘을 시뻘건 십자가로 뒤덮이게 만들었다. 수운 최제우는 서학이 들어올 때 질병으로 보았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 질병은 최제우 사후 156년이 흐른 뒤 코로나 19가 발병할 때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얼마나 우월감에 사로잡혔으면 코로나19가 덮쳤을 때 그토록 국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해도 수 천 군데서 예배를 강행하나? 이들에게는 이미 국가도 국민도 안중에 없다는 게 드러났다. 오로지 하느님, 하느님이다. 우리는 코로나19에 걸리지 않게 하신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나르시시즘의 극치에서 보여주는 자폐증이다. 어찌나 파워가 강한지 이명박은 서울시장에 당선 되었을 때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 한다’는 말까지 했다. 미국인들이 보았을 때 우리를 얼마나 경멸하겠나?

 

 한 때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역사적으로 함경도, 평안도, 전라도는 중앙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인재등용도 안 했고 하물며 그 지역은 귀양 보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니 자연히 그 지역 젊은이들은 쓸쓸함과 박탈감을 절망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1880년 대 아주 강력한 지식인 선교사들이 대거 침투, 아펜젤라, 언더우드와 같은 선교사를 앞세우며 개신교가 들어와 큰 봉우리를 이루면서 개신교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세기 전야에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폐기하고 대한제국(1897)이라고 바꾸면서 고종을 왕에서 황제로 만들었다. 그 대한제국은 13년간 지속되었는데, 1910년 대한제국이 없어지고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이씨왕조는 끝이 났다. 나라는 넘어가고 부도 없고 권력도 없는 호남, 평안도, 함경도의 사람들을 향해 그 당시 물밀 듯이 들어오는 기독교의 바람은 구원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그들의 쓸쓸함과 박탈감과 절망감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평양이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까지 불렸겠나? 그리고 100년을 그 선상에서 흘러왔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한국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움직인 게 아니라 생존차원의 구원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 척박한 역사적 장면을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나? 자, 다시 동학으로 들어가 보자. 

 

李霞天(소설가, 문화비평가)

 

[이어서 2편을 게재합니다.]

소설가이며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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