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 부정하려는 뉴라이트 교과서"김구 등은 상해임정의 적통,친일문제는 현 집권세력의 아킬레스건"
2008년 3월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에서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이하 대안교과서)를 펴냈다. 위 대안교과서에서는 기존의 일반적인 시각을 뒤집는 파격적인 평가로 내외에 관심을 끌고 있다. 역사는 현실 정치의 반영이다. 대안교과서는 서문에서 “철저한 실증주의”에 입각해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책 도처에 역사학의 수준(?)을 뛰어 넘는 정치적 쟁점을 담고 있다. 필자는 대안교과서가 제출하고 있는 문제의식이 첫째 민족통일을 부정하고, 둘째 보수세력을 역사의 주류로 격상시키려는데 있다고 판단한다. 아래에서는 위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대안교과서를 분석해 보겠다.
1) 대안교과서가 민족통일을 부정하고 있는 점은 글의 도입부와 결론 부분에 잘 나와 있다. 대안교과서는 도입부에서 “바람직한 통일의 모색”이 근현대사를 학습하는 목적이라고 밝힌 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의 입장은 공산주의 체제라는 북한의 현 체제를 전제한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전통적인 보수세력의 통일관은 북이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연방제는 적화통일을 가리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며 북의 통일관을 적화통일 방안이라고 평가해 왔다. 그런데 대안교과서에서는 북한의 입장이 공산주의 체제라는 북한의 현 체제를 전제한 것(연방제 방식)이라고 판단하면서도 그러한 통일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즉 북한이 자신의 체제를 버려야만 통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안교과서는 책 전면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절대의 가치로 놓는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데 위 부분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대안교과서의 주장은 결론 부분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대안교과서는 책을 마무리짓는 결론 부분에서 “민족통일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북한이 남한처럼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체제로 개조되기를 기다려 이룰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통일의 원칙을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적 상식으로 정착시켜 가는 것이야말로 한국이 당면한 선진화의 과제 중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대안교과서가 특별히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6.15 선언 2항인데 이에 대해 대안교과서에서는 “이 조항은 통일국가의 이념적 토대를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한 내에서 심각한 체제 논쟁을 유발하였다. 남한의 적지 않은 국민은 이 선언이 대한민국헌법 제4조에서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고 규정한 내용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250쪽에서)라고 적시하고 있다. 2) 대안교과서는 통일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대담한(?) 시도를 감행한다. 역사의 주체를 민족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설정한 점이다. 이에 대해 서문에서는 “우리는 이 책에서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한국인에게 민족주의는 여전히 소중한 공동체 의식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민족주의라는 단일 시각만으로 역사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이 제기된 상태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우리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설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역사 서술에 비해 꽤 큰 변혁이다. 이로써 지난 130년간의 역사가,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고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의 역사로 바뀌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나아가 세계사에서, 보편적으로 실천되어 온 근대문명의 한 가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역사의 주체를 무엇으로 하느냐는 역사관의 골간을 이루는 중요한 문제이다. 역사 자체가 특정한 인간 집단을 주체로 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민족이 역사의 주체라면 민족통일은 역사의 필연이거나 피해갈 수 없는 중심 주제가 된다. 반면 민족이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면 역사 서술은 근본에서 달라질 수 있다. 대안교과서는 민족통일의 필연성을 해체하기 위해 선뜻 감행하기 어려운 파격을 단행한다. 역사의 주체를 ‘민족’에서 ‘한국인’으로 바꾼 것이다.
역사의 영역 특히 한국사의 영역에서는 민족은 중요한 문제이다. 민족을 주체로 놓지 않으면 기존의 역사 서술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교과서가 역사 서술의 주체를 민족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설정하는 이유는 민족통일을 부정해야 하는 정치적 목적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주1) 덕분에 민족에 대한 논쟁은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문제가 되고 있다. 민족공조, 민족통일을 강조하는 북이나 남의 자민통(자주 민주 통일) 진영이 민족을 적어도 고대 무렵에 생긴 사회역사적 실체로 인식하는 반면 민족통일을 부정 또는 상대화해야 하는 보수진영은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생긴 것은 식민지 시기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통해서였다. 식민지 시기에 걸쳐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새롭게 강화되었다”(대안교과서, 서문 17쪽에서, 이 책에서는 민족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지 않지만 뉴라이트의 다른 저작에서는 민족을 근대 이후에 생겨난 상상의 공동체라며 이를 공격하고 있다)라고 하여 민족을 근대의 산물로 규정하려 한다.
3) 역사의 주체를 재설정하게 되면 기존 역사에 대한 파격적인 재해석이 가능해진다. 구체적으로는 1945~48년 역사와 김구,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문제가 된다. 글 서문에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태어나는 역사적 과정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것은 이 국가가 인간의 삶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기에 적합한, 지금까지 알려진 한 가장 적합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라가 태어나고 세워지도록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던, 이전과 명백하게 달라진, 세계질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대안교과서에서 핵심으로 잡고 있는 대한민국이 출현하게 된 “이전과 명백하게 달라진 세계질서”란 무엇일까? 그것은 1945~48년 냉전 질서인데 대안교과서 137쪽에서는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과정의 국제 환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만약 미국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소련이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의 점령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전후 동유럽의 경험에서 명확히 알 수 있듯이 소련 점령하에 들어간 국가는 모두 공산화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한반도도 공산화의 운명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38도선은 단순히 한반도의 분단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자유, 인권, 시장 등 인류 보편의 가치가 미국군을 따라 한반도에 상륙한 북방한계를 나타내는 선이었던 것이다.” 38도선은 민족을 갈라놓은 분단선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켜온 자유의 선이라는 것이다. 대안교과서에서는 이 주장에 무게를 실기 위해 역사책답지 않게 문학적인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자유, 인권, 시장 등 인류 보편의 가치가 미국군을 따라 한반도에 상륙한 북방한계를 나타내는 선.” 1945~48년의 역사를 대안교과서와 같이 정리하면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당연히 달라진다. 김구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고, 북한에 들어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129쪽에서) 가치 판단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객관 사실을 서술한 듯이 보이지만 대안교과서가 전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에 근거하여 김구를 평가하면 인류 보편의 가치를 가르는 기준선이었던 38도선을 넘어 공산주의자와 합작하려 했던 공상적 민족주의자이고 그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체현한 대한민국 건국에 불참한 시대착오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반면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보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중 하나는 1925년 임정에서 탄핵된 부분과 미국 활동 과정에서의 분파적 행위인데 이에 대해, “미국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려는 이승만의 노력은 좌파 한길수의 등장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승만에 대한 한길수의 공격은 소련과의 협조를 중요시하는 미국 국무부의 좌파 관리들이 한국인들이 분열되었다는 이유로 임시정부 승인을 거부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했다. 한길수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모호한 행적을 남겨 현재 대한민국은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31쪽에서)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내용을 장황하게 기술한 이유는 역시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를 위함일 것이다. 루스벨트 정부는 2차대전 과정에서 독일에 대항해 소련과 함께 싸웠고 그 연장선에서 소련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가 덜하였다. 대안교과서는 루스벨트 수준의 대소 유화노선에 대해서도 “좌파” 관리라는 교묘한 딱지를 씌워 공격하고 있다. 또한 반민특위에 대해서는, “그런데 반민특위의 활동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못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한 우파 집권 세력은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체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친일파 청산보다 내부 단결과 반공태세가 더 급하다고 생각하였다”(145쪽에서)라며 합리화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는, “...... 해방 후 건국과정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정치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였는데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올바로 잡는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고 쓰고 있다. 민족이 아니라 한국인, 민족통일이 아니라 48년에 건국한 민족의 반쪽인 대한민국의 건국을 중심에 두게 되면 연쇄적으로 역사적 사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게 된다. 대안교과서에서 가장 비중을 두는 대목 중의 하나가 바로 이승만의 복권일 것이다.
3. 보수세력 중심의 역사관 대안교과서의 또 다른 핵심은 현 집권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점이다. 1) 143쪽 박스 기사, “제헌의회 의원들의 출신을 통해 본 대한민국 건국세력의 역사적 배경”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했던 정치세력은 식민지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고 상공업자, 지주, 하급관료, 교원, 의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업인으로 성장해온 사람이 대부분이며, 그들의 정신세계는 민족운동 참여 경력이 이야기하듯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한편 이들 209명이 속한 가문의 조선왕조 시대의 신분은 향리 등의 중간 신분이 대부분이었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크게 보아 개화기 이래 구래의 중간신분으로서 개화사상을 체득하고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면서 전문적 직업능력을 키워온 민족주의자들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는, “대한민국은 이 같은 한국사의 기본 흐름에 부응하여 근대 문명을 도입하고 이식함에 있는 힘을 다하였던 개항기의 개화파에서 출발하는 독립운동 세력과 근대화세력이 세운 국가였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까지의 상식적인 역사관은 대한민국 건국에 주류가 되어야 하는 사람은 항일독립투사였다. 이것이 민족을 중심에 둔 역사관의 기본이다. 대안교과서는 이런 역사관 대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잣대 하에 “전통문명과 근대문명의 융합”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역사의 주류로 승격시키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현 집권 세력을 역사의 주류로 하여 한국근현대사를 재구성하기 위함이다. 그런 면에서 대안교과서의 필진들은 현 집권세력을 단순 찬양(?)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관 전체를 재구성하여 이를 역사의 필연으로 승격시키려는 근본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2) 1)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던 위 사람들의 가문을 추적하여 역사의 계보를 정연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갑신정변, 동학, 대한제국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갑신정변과 개화파를 높이 평가하는 것, 대한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주3) 흥미있는 점은 동학에 대한 평가인데, “동학군의 봉기를 ‘농민혁명’이나 ‘농민전쟁’이라 하여 국가체제의 급진적 변혁을 모색한 운동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 대신 ‘동학농민봉기’라는 호칭이 농민군의 정신적 배경, 사회적 계층, 저항의 양태를 나타내는 데 가장 적합하다”(44쪽)고 적고 있다. 위 평가는 역사학의 문제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문제에 대한 분석인데, “60년대 중반부터 시인과 소설가들은 5.16 이후 급속히 전개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민.노동자.빈민을 19세기까지 조선왕조 시대에 양반신분에 억눌리고 착취당한 농민 계급의 후신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1961년의 4.19 민주혁명은 농학농민봉기의 역사적 맥락이 동일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문학적 직관만으로 현실의 모순을 역사로 환원시키는 경향은 같은 시기 민족주의 역사학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 민족문학은 5.16 이후 근대화혁명을 추진한 집권 세력과 근본적으로 대립한 민주화 세력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였다”(238쪽에서)고 적고 있다. 동학에 대한 평가는 “집권 세력과 근본적으로 대립한 민주화세력”이 의도적으로 벌인 역사를 무대로 한 사상투쟁이었다는 평가이다. 당연히 역사는 현실의 정치공간에서 벌어지는 사상투쟁의 측면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대안교과서는 철저한 실증주의를 취하겠다고 하면서도 집요한 정치적 평가를 삽입하고 있다. 3) 대안교과서가 일제시대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격상시킨 “식민지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고 상공업자, 지주, 하급관료, 교원, 의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업인으로 성장해온 사람”들의 경우 민족이라는 잣대에서 보면 주변부 또는 친일에 가까운 사람들로 “식민지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일제 후반으로 가면 대체로 친일에 가까운 행보를 취했다. 따라서 항일과 친일 그리고 민족이라는 잣대를 유지하는 한 이들을 주류로 승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4)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은 3)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안교과서가 실증주의 운운하며 조심스럽게 토론을 제기하고 있는 이유는 실증을 무기로 항일과 친일, 민족 논쟁을 우회하여 본래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일제 시대 경제상황을 실증적으로 분석할 능력이 없다(물론 이러한 작업도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통계와 실증에 앞서 역사를 대하는 관점과 그것이 현실 정치에 갖고 있는 정치적 맥락을 명확히 하는데 초점을 두겠다. 만약 식민지 시대가 일제 침략에 의해 고통과 퇴보의 나날이었다면 항일과 친일이라는 잣대는 훼손될 수 없다. 반면 식민지 시대에 근대적 발전의 싹을 가지고 있었다면 항일과 친일이라는 잣대를 상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식민지 시대에 항일투쟁을 했던 독립투사들이 아니라 근대적 발전의 싹을 틔웠던 현재 집권 세력의 선조들을 역사의 주류로 복권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96쪽에서는 “식민지 한국사회의 역사적 성격”, 98쪽에서는 “식민지 한국인의 생활수준”이라는 박스 기사로 이를 중시하고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99쪽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공업이자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로 경성방직을 소개하고 100쪽에서는 그 주역인 김성수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다. 이 부분이 대안교과서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지점일 것이다. 대안교과서에서는 역사적 관점이나 인물평 등에서 항일, 친일이라는 잣대를 거의 누락하고 있다. 이를 변호하기 위해 서문에서는 “이 책을 함께 쓴 우리의 기본 자세는 철저한 실증주의이다. 우리는 이 책의 독자들이 역사가의 주관적인 개입을 피해 직접 그들 삶의 역사에 접하면서, 그 역사와 친근하게 대화하고, 그 역사를 깊이 성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거나 “이 책은 모든 종류와 모든 수준의 비판에 열려있다. 사실이 잘못 소개된 곳이 있으면 기꺼이 고치겠다. 역사관이 편향되었다면 바로잡음에 망설이지 않겠다...”라는 실증과 합리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시종일관 역사서라기보다는 역사를 통한 정치사상투쟁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단 보수세력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친일 문제를 피해가기 위한 도구로 그런 영역에 한해서만 실증과 합리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정치 투쟁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역사에 대해 대단히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4.19에 대해 “4.19는 부정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의거에 국민이 동참하여 권위주의 정부를 타도함으로써 국민주권과 대의제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재확인한 민주혁명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그렇지만, 국가체제의 기본 원리를 바꾸고자 한 민중혁명과 계급혁명은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175쪽에서) 4.19의 역사적 의의를 자유민주주의의 체제내로 한계지우면서 이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경향에 대해 제동을 걸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반면 4.19 이후의 역사를 “급진 통일세력의 도전”, “정치적 혼란의 가중과 북한의 평화공세”로 규정한 뒤 “국가체제의 위기로까지 발전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에 대한 국민의 염증과 불만을 흐트러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지체된 근대화의 과제를 강력히 추진할 새로운 리더십을 갖춘 정치집단이 부상하는 토양을 제공하였다. 그 같은 역사적 역할은 6.25 전쟁 이후 급속히 조직을 키우면서 우수한 인재를 집중해 온 군부가 담당하였다”고 평가하여 박정희 군부의 출현이 역사의 요구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6월항쟁에 대해서도 “급진 좌파 세력의 역사관과 현실 인식은 다수 중산층 시민의 일상생활이나 현실인식과 많이 동떨어졌다”고 적고 있다. (225쪽) 대안교과서에서 생각 이상으로 예민하게 짚고 있는 부분은 1971년 ‘박정희-김대중’ 사이의 대선 논쟁에 대한 평가이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지만, 선거 과정은 김대중이 박정희를 무섭게 추격하는 양상을 보였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세계경제와의 개방적인 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수입대체공업화의 전통을 이었다. 그것은 후진국에서 성공해 본 적이 없는 실험적인 주장이었다. 미국, 일본, 중국, 소련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게 하자는 그의 4대국안전보장론은 동서냉전이 치열했던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현실성이 의심스러웠다.(주4) 그럼에도 그가 제시한 정책은 급속한 경제발전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도시 서민층을 중심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는 한국 정치에서 처음으로 포퓰리즘이 위력을 떨친 선거였다”고 쓰고 있다. 189쪽에서는 한쪽에 걸쳐 수입대체공업화와 수출주도공업화를 비교하고 후자가 올바른 길이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196쪽에서는 “대중경제론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박스 기사를 통해 대중경제론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양자를 “근본적인 대립”이라며 날카롭게(?) 대립시키고 있다. 양자의 대립을 근본적인 대립으로 규정하며 이를 포퓰리즘으로 정리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대체로 1987년 이전까지 자유민주주의를 둘러 싼 갈등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집단은 보수집권세력이 아니라 민주저항세력이었다. 보수집권세력의 자유민주주의론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이를 수호하려는 민주저항세력의 투쟁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 민중, 통일 등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포퓰리즘이라는 규정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막을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한 조건에서 4.19, 6월항쟁 등을 자유민주주의로 한계지워 그 생명력을 거세하는 대신 새롭게 ‘엘리트주의-포퓰리즘’,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에 대한 대안교과서의 혐오(?) 심리는 상당히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247쪽에서는 1980년대 후반 토지공개념을 둘러 싼 갈들을 “포퓰리즘”이라는 제목 하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토지공개념 관련 법률은, “토지의 개인적 이용에 제한을 가하는 토지공개념의 본래 취지를 넘어, 국가의 조세부과라는 강제권을 발동하여 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한국 정치가 민주화 시대를 맞아 포퓰리즘 경향을 드러내는 것은 다수 한국인이 공동체.참여.평등.분배 등과 같은 집단적 가치에는 친숙하지만, 개인.자립.경쟁.사유재산 등과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양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성립할 때 그 기초에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기본 가치로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발전이 먼저 있었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근대사의 출발과 함께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기 때문에, 아직 국민의 생활원리로 완전히 정착된 상태가 아니다”고 쓰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포퓰리즘으로 매도할 정도로 한국의 보수세력은 너무 보수적이거나 낙후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시종일관 강조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대목에서는 자유주의를 강조하고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어 전진하려는 민주주의의 확장 가능성을 포퓰리즘이라며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급성장한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백화점식 조직”, “점차 대형화되고 관료화”되어 “점차 권력기관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등 시민단체에 대해 역사서에 걸맞지 않는 과도한 공격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1971년 ‘박정희-김대중’의 충돌을 자유주의-포퓰리즘, 세계적 추세에 부합하는 수출주도형 공업화-시대와 부합하지 않는 수입대체공업화로 대별하고 전자를 역사의 주류로 설정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출현한 보수정권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민경우(통일뉴스 기자) 원문보기 <주> 1) 이와 비슷한 논쟁이 역사의 주류에 관한 문제이다. 삼국시대와 관련 주로 남은 신라를 중심으로, 북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역사의 주류를 설정해 온 점, 1980년대 중반 민중운동이 고양되면서 발해와 후기 신라를 합쳐 남북국 시대로 규정한 점 등이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최근 보수 진영 내에서 신라를 역사의 주류로 위치지우려는 시도는 결국 ‘신라 →....→ 대한민국’을 역사의 기본 흐름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월간조선의 조갑제씨이다) 2) 위 책 277쪽에서는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개별 인간이다. 역사는 그 인간들이 사랑과 신뢰로 결성하는 가족, 촌락, 학교, 회사, 공장, 교회, 우애단체의 역사에 다름아니며, 나아가 이들 단체가 하나의 정치적 질서로 통합하는 국가의 역사에 다름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위 글에서 개별인간들이 결합하여 구성된 집단 중 유독 민족을 빼고 있는 이유도 민족이 갖고 있는 특별한 정치적 지위 때문일 것이다. 3)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 기준에 따르면 갑신정변, 개화파에 대한 호(好)평가는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북의 경우 3.1운동을 전후하여 앞선 시기를 부르조아혁명 시기로 보고, 다음 시기를 인민민주주의혁명 시기로 구분하여 부르조아혁명 시기의 개화파를 호평가하고 있는 반면 대안교과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개항 이후 역사를 관통하는 일관된 맥으로 보고 이를 호평가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민비, 고종, 대한제국 등에 대해서는 그들이 체현하고 있었던 보수적, 전통적 맥락에 비춰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4) 1970년대 초반은 동서냉전이 치열했던 시기가 아니라 냉전이 완화되는 시기였다. 이를 배경으로 미소간의 전략무기제한협정, 동서독과 남북 사이의 대화가 진행될 수 있었다. 불행했던 것은 김대중의 “현실성이 의심스러운” 4대국안전보장론이 아니라 박정희의 반공체제 강화였다.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라이트 관련기사목록
|
연재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