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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는가?

윤진성 기자 | 기사입력 2017/12/01 [08:47]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는가?

윤진성 기자 | 입력 : 2017/12/01 [08:47]

[플러스코리아타임즈= 윤 기자]당나라가 고구려를 차지했다’고 기록한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왕명을 받아 최치원이 글을 썼다. 왕이 ‘최종 결재’를 한 글에서 이런 식으로 기록했다는 것은 신라 지식인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신라가 고구려 지역을 통합하지 못했음을 인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 역사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미화와 과장, 혹은 왜곡의 대표적 사례는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다’는 믿음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정설이다. 모든 한국사 교과서에도 그리 적혀 있다. 물론 신라의 삼국 통일을 반박하는 학자가 소수이지만 있다. 이들조차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에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신라인들의 생각을 검증하는 최상의 방법은 신라인들이 남긴 기록을 모두 조사하는 것이다. 서기 7세기 중엽 이후 신라인들의 기록을 전수조사해, 신라인들이 국경선을 어디로 생각했고 ‘자신들이 이룩한 통일’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살피면 된다. 이를 ‘신라인들의 통경(統境) 인식’이라고 한다.

 

신라인들이 남긴 기록은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과 ‘한국고전종합DB’, 그리고 동국대학교 전자 불전 문화콘텐츠연구소가 운영하는 ‘한국 불교 전서 검색 시스템’에 원문(판독문)과 한글 번역문이 망라돼 있다. 역사 비전공자들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수천 건의 사료를 전수조사했다. ‘신라인의 통경 인식’ 관련 사료는 모두 50개였다. 이 중 45개는 ‘신라인들이 평양 이남의 삼한 지역을 차지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뒷받침했다. 5개만이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지지했다. 지면 관계상 <표>로 사료 5개만 소개한다. 나머지는 졸저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 352~357쪽을 참조하면 된다.

 

50개 사료 가운데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은 3차례, ‘삼한 통일’은 11차례 나온다. 한국사학계는 서기 7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인들이 ‘삼한=삼국’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삼한 통일’이나 ‘삼국 통일’은 같은 의미라고 지적해왔다. 그 근거로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을 제시한다. 최치원은 여기서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며, 진한은 신라”라고 적었다. 이 글 외에 ‘삼한=삼국’을 이야기한 것은 ‘김입지가 비문을 지은 성주사비’뿐이다. 한데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을 조금 더 읽어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고구려의 잔당이 태백산 아래 모여서 발해를 건국했다. (중략) 오늘날까지 신라가 무사하고 평안한 것은 무열대왕(김춘추)의 공이다.”

 

최치원은 분명 마한이 고구려라고 한 뒤, 고구려의 잔당이 발해를 건국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삼한 통일은 깨진 것이다. 마한이 결국 발해가 됐으니 말이다. 한데 최치원은 신라가 여전히 무사하고 평안하다고 이야기한다. 발해를 두고서도 신라의 통일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결국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 초입부에서 최치원은 ‘삼한=삼국’을 이야기했지만, 문장 후반부에선 ‘삼한≠삼국’이라고 이야기한 셈이다.

 

삼한=삼국’ 둘러싼 최치원 글의 진실

더 나아가 최치원은 다른 글에서 삼한과 삼국이 결코 같지 않음을 여러 차례 이야기한다. 우선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서 그는 “성스러운 당나라가 고구려를 차지했다”고 기록했다. ‘삼한=삼국’이라면 신라는 삼국 통일이 아니라, 삼한 통일조차 못한 것이다. 고구려를 당나라가 차지했으니까! 이 글은 왕명을 받아 작성됐다. 당연히 왕의 ‘최종 결재’도 받았을 것이다. 이는 결국 신라의 지식인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했음’을 뜻한다.

 

또한 최치원은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뿐 아니라 ‘예부에서 상서를 맡고 있는 배찬에게 올린 글’, ‘헌강왕이 당나라 강서에 사는 대부 직함을 가진 고상에게 보낸 글’(최치원 대필), ‘외교 석상에서 발해가 신라보다 상석에 앉지 못하도록 당 황제가 조치한 것에 감사하며 효공왕이 올린 글’(최치원 대필)에서도 ‘예전의 고구려가 지금은 발해가 됐다’고 기록했다.

 

다시 말하지만, ‘삼한=삼국’이라면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등장으로 삼한 통일은 깨진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한데 최치원뿐 아니라 신라인 누구도 ‘발해의 건국으로 삼한의 통일이 깨졌다’고 기록한 이는 없다. 발해를 두고서도 삼한의 통일은 유지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9세기에 세운 ‘대안사 적인선사탑비’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월광사 원랑선사탑비’ 등에도 탑비 주인공들이 ‘온 삼한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한 것’을 소개했지만, 이들이 신라의 적국인 발해에서 포교했다는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 ‘삼한≠삼국’인 것이다.

 

신라 최말기에 후백제와 고려가 등장했을 때 신라인들이 ‘나라가 어지럽다’며 한탄했던 것과 비교하면 결론은 명확하다. 신라인들은 발해 지역, 그러니까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자신의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발해 건국 때 신라인들은 ‘나라가 분열된다’는 안타까움을 담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군사적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발해의 멸망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통경 인식’을 가졌기에, 신라인들은 통일을 이룩한 왕으로 문무왕이 아니라 ‘백제의 멸망’만을 지켜본 무열왕을 꼽았다. 태종 무열왕을 통일 군주로 꼽은 것은 7개, 문무왕은 3개였다. 반면 <삼국사기> 제사 기록에는 무열왕과 문무왕을 공동으로 꼽았다. 그나마 문무왕을 꼽은 것은, 문무왕 자신의 발언이거나, 문무왕을 기려 만든 비문에서나 나왔다. 문무왕을 제외하고, 문무왕을 통일 군주로 단독으로 꼽은 신라인은 하나도 없다.

 

통일 이룬 왕은 문무왕 아닌 무열왕
이는 한국사학계의 인식과는 판이하다. 한국사 교과서는 통일을 이룩한 임금으로 무열왕(661년 사망) 대신 문무왕(681년 사망)을 꼽는다. 백제 멸망(660년)과 고구려 멸망(668년)을 생각한다면, 통일 군주는 당연히 문무왕이 돼야 ‘옳다’. 고구려가 멀쩡히 있는데 어찌 무열왕이 통일 군주가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신라인들은 그리 생각했다. 고구려는 ‘자신들이 통합한 땅’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신라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고 두 차례 기록으로 남겼다.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국가 간 왕래하는 외교사절’을 뜻하는 ‘사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료를 종합하면 45 대 5로, 대부분의 신라인은 자신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사실이 한국사학계에서 당분간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 주장을 담은 필자의 책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를 출판할 때 몇몇 학자가 보인 반응도 그랬다.

 

출판사는 필자의 주장이 기존 학계의 주장과 파격적으로 다르기에 신라사 연구자 두 분에게 원고를 보냈다.(출판사는 이들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글의 신뢰성을 판단해달라는 뜻이었다.

 

두 분은 필자가 제시한 50개 사료 중 몇 개만을 예로 들며 ‘신라의 삼국 통일 부정론은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신라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서기 7세기 이후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했으므로, 삼한 통일이나 삼국 통일은 같은 뜻이다’라는 식으로 답했다.

 

필자가 이 글에서 다룬 것은 ‘신라인들의 통경 인식’이다. 그러나 두 연구자는 필자가 ‘신라의 삼국 통일이 옳으냐, 그르냐’를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했다. ‘신라인들의 통경 인식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가 아니라, 학계의 소수설인 ‘삼국 통일 부정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 ‘새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글을 오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전수조사된 사료를 눈앞에 두고서도 ‘신라인들은 삼한=삼국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쉬웠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중국 사료로 ‘삼한=삼국’을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동북공정’을 낳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필자의 지적에 언급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 사료에서 3세기 이후 나오는 ‘삼한’은 애초 ‘한반도 중남부’를 뜻했다. 그러나 7세기 이후 중국뿐 아니라, 당으로 건너간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의 사료에는 ‘삼한=삼국’으로 바뀌었다.

 

앞서 밝혔듯, 전수조사 결과, 대부분의 신라인들은 ‘삼한=삼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통일 전쟁’ 뒤인 7세기 중엽 이후 중국 혹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사료에 나오는 삼한은 ‘당나라 영토’라는 의미로 뜻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만약 중국 역사학계에서 이를 근거로 ‘삼한=삼국=당나라 땅’임을 주장한다면 한국사학계는 어찌 대처할 것인가? 신라인들은 ‘삼한=삼국’은 받아들였지만, ‘삼한=당나라 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변명할 것인가?

 

신라사 연구학자들의 ‘콤플렉스’

이 사실을 적시했는데도 왜 ‘신라인들의 통경 인식’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 했을까? 혹시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로 인식되는 신라사를 되도록 찬란하게 기술하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대부분의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삼한≠삼국’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낭패스러울 수 있다. 가뜩이나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었기에 한국사 교과서는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불완전한 성격을 띤다’ 운운하며 변명해야 하는 판이니까.

 

이런 ‘콤플렉스’가 신라사 혹은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있었기에 신라인이 남긴 기록의 냉정한 전수조사가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제2의 동북공정’까지 가능하게 할지 모를 중국 사료의 ‘삼한=삼국론’을 신라인들도 받아들였다고 한국사학계가 별 고민 없이 생각해온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한국사학계는 유사역사를 비판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한국사학계가 냉정하게 우리 역사를 연구하고 이를 대중에게 전파했다면, 유사역사학은 뿌리내릴 토양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을 기반으로 주장을 펼쳐야 할 한국사학계가 우리 역사에 대한 과장과 미화를 해왔기에 그 틈에서 유사역사라는 괴물은 탄생하고 자랄 수 있었다. <환단고기>에 근거해 중국 대륙을 지배한 광대한 조선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자기 입맛에 맞는 극히 일부 자료만 선택해서 ‘찬란한 우리 역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세계적 미술사학자 곰브리치(1909~2001)는 저서 <서양미술사>에서 ‘우리(서양미술)는 모두 그리스의 제자’라고 선언했다. 그가 조국 오스트리아나, 자신이 주로 활동했던 영국 문화에 자부심이 없어서 이렇게 말했을까? 이러한 객관성과 개방성이 1950년 출간된 이 책을 여전히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남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한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그러나 자라나는 세대에게 진정으로 강화해야 할 역사교육은 한국사가 아니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된’ 세계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였든, 한국은 세계 속에서 성장했으니까.

이메일:tkpress82@naver.com
앙드레 18/04/20 [10:14] 수정 삭제  
  그런데도 대왕의 꿈인지 하는 쓰레기 드라마에서 묘사를 그렇게 하고 한국사기인가 하는 다큐서도 또 ebs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나라는 영상에서도 그딴식으로 묘사했습니다. 이게 우리나라 학계가 멍충이같은 이유입니다. 입으로만 떠드는 자들이 하는말이 역사인줄 알고 나대는 그자들이 매국노들입니다. 신라는 궁예의 말대로 멸도입니다. 선량한 신라백성들 은 제외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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