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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배’ “한겨울 속 봄의 활기와 숨결”

<토요일 수필>수필가 김미옥, ‘알밤은 무죄’

수필가 김미옥 | 기사입력 2009/01/17 [11:14]

‘200배’ “한겨울 속 봄의 활기와 숨결”

<토요일 수필>수필가 김미옥, ‘알밤은 무죄’

수필가 김미옥 | 입력 : 2009/01/17 [11:14]
▲ 수필가 김미옥
얼마나 징그러웠는지 몰라. 퇴근하고 온 딸아이가 식탁에 앉으며 하는 말이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말투에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하룻밤 사이 알밤 몇 톨의 변신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다. 

간식으로 가져갔던 알밤이었다. 남은 몇 개를 책상서랍에 두고 왔더란다. 그런데 다음날 무심코 꺼내다가 아주 기겁을 했다지 않는가. 오죽하면 징그럽다고 했을까.

뽀얗게 껍질 벗긴 벌거숭이 밤톨들이 단 하루 만에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허연 싹을 쑤욱 달고 있었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아이는 자못 심각한데 난 순간 ‘풋’하고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눈앞에 벌거벗은 닭의 질주가 떠오른 까닭이다. 옛날 시골에서 닭을 잡느라 뜨거운 물을 끼얹어 털을 다 뽑았는데, 어느 순간 느닷없이 푸드득거리며 달아나는 바람에 식구대로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는 얘기 말이다. 

알밤이나 꼬꼬닭이나 발가벗겨 놓고 방심하는 사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생명력을 불쑥 펼쳐보였으니, 생명의 본능이란 얼마나 강하고 놀라운 것인지.

지난 추석 무렵에 냉장고에 넣어 둔 밤이었다. 가끔씩 삶아놔도 저마다 바쁜 탓인지 귀찮은 때문인지,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아 혼자 처치하느라 애를 먹었다. 아무래도 우리 집에선 말만으로도 군침 도는 꿀밤이 아닌가 보았다.

설이 다가오기 전에 냉장고를 정리해야겠기에 궁리 끝에 생밤 껍질을 벗겼다. 밥에라도 조금씩 넣을 작정이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밤 깎는 곁을 오며가며 하나 둘 집어먹더니 그 오드득거리는 씹는 맛이 좋았던지 아이가 간식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 아이가 간식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몇 달째 차갑고 어두운 냉장고에 잊혀지듯 방치되었던 녀석이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생명의 불씨를 번쩍 피웠다는 사실은 내게도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야말로 엄동설한(嚴冬雪寒), 입동에서 시작된 추위가 최고조에 이르는 대한(大寒)이다.

모든 게 죽어 있는 이때에 새로운 생명의 뜨거운 약동이라니! 모든 싹이 껍질을 뚫고 나올 때는 자신이 가진 것의 200배의 힘으로 터져 나온다 했는데, 난 한겨울 속에서 놀라운 봄의 활기와 숨결을 느낀 셈이다. 

제사상은 물론이고 각종 상차림에도 빠지지 않는 밤은 새색시가 폐백을 드릴 때도 새색시 치마폭에 던져지곤 한다. 아들 딸 많이 낳아 집안의 대를 이어가기를 염원하는 오랜 풍습이다. 밤은 싹이 나고 자라서 새로운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썩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후손의 성장을 지켜보는 조상으로 상징된다는 것이다.

요즘 딸아이가 새로운 둥지로 날아갈 준비로 한창 바쁘다. 언제까지나 품안에 있으리라 여긴 건 아니지만 막상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못내 아쉽고 허전하다.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는 건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햇병아리를 물가에 내놓는 것 같아 염려스런 마음도 어쩔 수 없다. 

▲ 우주의 질서를 따라 새로운 싹을 틔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잔설 밟으며 오른 뒷산에는 한겨울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린 겨울 햇살이건만 나무들은 저마다 볼록볼록 꽃눈 잎눈을 매단 채 때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내게 처음으로 엄마라는 이름을 달아준 아이. 지금껏 늘 기쁨만을 안겨주던 믿음직하고 착한 딸. 미처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어느새 때가 되었다는 것인가. 그래, 우주의 질서를 따라 새로운 싹을 틔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서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든든한 나무로 자랄 수 있기를 염원해야지. 

돌아오는 새봄엔 세상의 모든 부모들처럼 한 톨의 밤이 되어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내 몫이지 싶다.

 
▽ 수필가 김미옥

경남 남해 출생.
한국문협,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청탑수필, 동작문협 회원
작품집<숨어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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