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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쩍새 울음소리에 불현듯 그리운 아버지”

<土 曜 隨 筆>수필가 김문호, ‘아버지’

수필가 김문호 | 기사입력 2009/07/04 [00:40]

“소쩍새 울음소리에 불현듯 그리운 아버지”

<土 曜 隨 筆>수필가 김문호, ‘아버지’

수필가 김문호 | 입력 : 2009/07/04 [00:40]
▲ 수필가 김문호
내가 고향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아버지는 나를 대처로 유학 보내셨다. 자전거로 통학이 가능한 읍내에도 중학교가 있었지만 굳이 백 리나 떨어진 도시의 중학교로 진학시키셨다. 내신 성적의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특차로 선발하는 사범병설중학교였다.

도내에도 단 두 개뿐인 사범학교를 나와서 교사가 되는 것이 누가 뭐래도 장땡이라 하셨다. 나라에서 보장해 주는 평생직장에 군대까지 면제받는 특전이 어디에 또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학교에서부터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입학식은 4월 2일이었다. 아버지는 학교 인근에다 방을 얻어서 자취 살림을 차려 주셨다. 백철 솥과 양은냄비 등의 취사도구에 장작까지 한 짐이나 들여놓아 주셨다.
 
마침 그 도시의 농림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고향 선배와 짝을 지워서였다. 그러고는 적잖은 돈을 주시면서, 아껴서 쓰되 사용 내역을 일일이 금전출납부에 기재했다가 차후에 검사를 받으라고 하셨다.

기차역에서 아버지를 배웅해 드리고 텅 빈 자취방으로 들어앉자, 드디어 타향살이가 실감되면서 두려움과 설움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아는 것이라곤 등굣길과 자취방뿐인 객지에서 밥 짓는 것도, 빨래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두부 한 모를 신문지에 싸 들고 들어온 고향 선배가 나의 기색을 읽었는지, 당분간의 취사 일체는 자신이 할 거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닌 내 불안의 두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해가 지고 전깃불이 들어오자, 불현듯 고향집 생각이 솟구쳤다. 어머니가 그립고 동생이 보고 싶었다. 마냥 핀잔만 주던 누나들도 아쉬웠다. 나만 빠진 식구들의 저녁식사 자리가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다. 선배가 다시 나를 달래며 나섰다. 자기도 객지생활은 처음이지만 장래의 출세를 위해 참아야 한다면서….

그러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 오십 리만 되어도 밤새 다녀오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호롱불보다 몇 배나 밝은 백열등이 감고 있는 눈에도 부셨다. 머리맡 봉창(封窓) 너머 골목길을 밤늦도록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해가 지고 나면 칠흑 어둠에 소쩍새 울음소리뿐인 고향집과는 너무도 판이한 정경이었다.

다음 날은 신입생들의 학교생활을 안내하는 오리엔테이션이었고 그 다음 날 오후에는 환영회가 있었다. 사범학교와 병설중학교의 선배들이 시내의 극장을 빌려서 신입생들의 입학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잔치였다. 노래와 춤, 연극이 두 시간도 넘게 이어졌지만 내게는 도무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이튿날이 식목일 휴무였으므로, 환영회만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내달릴 생각뿐이었다 .어엿한 중학생의 모습을 고향에서 뽐내고 싶은 기대도 부풀어 있었다. 읍내에서 마지막 버스를 타고 부리나케 달려간 고향집 마당에 뒷산 그림자가 땅거미로 내려앉고 있었다.

이제 막 들일에서 돌아오신 듯, 농기구들을 정리하고 계시는 아버지께 회심의 인사를 드렸더니 아버지의 반응이 영 예상 밖이었다. 누구보다 대견스러워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의 냉담이 의아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다른 식구들의 표정 또한 하나같이 심드렁하기만 했다.

저녁식사 후 남동생과 내가 큰방에 남았을 때, 아버지의 말씀이 계셨다. 사내대장부가 뜻을 세우고 출타했으면 지긋할 일이지 그새 어미 품이 그리워 조르르 달려왔느냐고 꾸중하셨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인데 이렇게 돈과 시간을 길바닥에 깔고 다녀서야 애초에 글러버린 일이 아니냐며 나무라셨다.

그날 밤, 내가 쓰던 뒷방에서 잠을 청하면서, “어미 품이 그리워서 조르르 달려왔다”는 말씀에 억울하고 부끄러웠다. 몇 푼 되지도 않는 차비를 썼기로서니 그토록 침소봉대하시던 아버지가 야속스러웠다. 혹시라도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다 키운 자식은 아닐까 하는 설움이 북받쳤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뒷산 숲의 소쩍새가 밤새 따라 울었다.

식목일 하루 낮과 밤을 데려온 자식처럼 보낸 뒤, 어머니가 지어주신 새벽밥을 먹고 깜깜한 고향집을 나서면서, 이제 웬만한 일로는 걸음조차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도시로 가는 통학열차를 타기 위해 읍내까지 삼십 리를 타박타박 걸으면서 다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한 달쯤 지나자, 자취 양식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궁리를 하던 중, 마침 읍내의 다음 장날이 일요일과 겹친다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장날에 쌀 한 말 두 되와 된장 한 항아리를 가져다가 읍내 장터의 친척 아저씨네 가게에 맡겨 두시면 내가 시간을 봐서 찾아오겠다고…

장터가 파장으로 한산해지고 읍내에서 고향으로 올라가는 버스도 끊어진 시간이었건만 아버지는 여태 아저씨네 가게에 앉아 계셨다. 꾸벅 인사를 드린 다음 쌀자루와 된장 항아리를 찾아 메고 나서는 나를 아버지께서 잡아 세우셨다.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셨다. 저녁은 자취방에 가서 먹어도 되며 기차시간이 급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버스를 타고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쓰는 교통비에 그토록 예민하신 아버지께서, 버스 차비는 기차 삯의 두 배라는 사실을 모르실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 놀랄 일은 그 다음의 사태였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중국집으로 가시더니 우동 한 그릇을 시키셨다. 그러고는 당신은 장터에서 국밥으로 드셨다면서 우동그릇을 내 앞으로 밀어 주시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맛보는 우동을 편치 않은 마음으로 뒤적이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기왕에 읍내까지 올 양이면 토요일인 어제라도 집에 들려서 어미가 지어 주는 따뜻한 밥이라도 몇 끼 먹고 갈 일이 아니냐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콧등이 시큼하게 저려 왔다. 그런 모습을 아버지께 들킬세라 상체를 더욱 굽혀 우동그릇 위로 엎드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흐느낌을 억누르면서, 눈물방울이 우동 국물 속으로 떨어질 것 같았지만 손을 들어 닦을 수도 없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나의 정황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버지는 무심한 듯 빨부리의 권련만 피우셨고, 석양이 뉘엿거리는 구봉산(九峰山) 쪽에서 시간 이른 소쩍새가 소쩍쩍 소쩍쩍 울었다.

아버지 가신 지 어언 삼십 년, 소쩍새 울음소리에 불현듯 그리운 아버지.



▽ 김문호 프로필

現 문학동인 글마루 회장.
한국문협회원
예술시대작가회 회원
한국수필가 협회 회원
한국예총 <예술세계> 수필 등단(2003)
시흥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상(2003)
강남문협 주최 서울문예상 수필부문 수상(2005)
수필집 <내 인생의 자이로 콤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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