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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하나…파란하늘 하얀구름 담아”

<土 曜 隨 筆> 수필가 김문호, ‘초가을편지’

수필가 김문호 | 기사입력 2009/09/12 [00:38]

“옹달샘 하나…파란하늘 하얀구름 담아”

<土 曜 隨 筆> 수필가 김문호, ‘초가을편지’

수필가 김문호 | 입력 : 2009/09/12 [00:38]
1
가을에는 

하늘만 쳐다봐도 눈물이 난다구요?

우리 같이 가 봐요. 

강 너머 갈매산 계곡 옹달샘 말이에요.

아기 사슴

물 마시고 막 떠나간 동심원에

화살나무 빨간 이파리 하나 떠 있을 거예요.

보일듯 말듯 일렁이면서 말이에요.

 
 
가을이면 

먼 기차 소리에 새벽잠을 설친다구요?

우리 함께 가 봐요.

고운사 뒷담 너머 오솔길 말이에요.

산탱자 반 노랗게 익어 가는 풀숲에

풀끝마다 가을햇살 부서져내릴 거에요.

애틋한 수줍음

가르마 숙인 길섶에

살며시 내려앉던 고추잠자리처럼 말이에요. 

 
▲ 수필가 김문호
또 가을이 오는 가 봅니다. 태양과 소나기의 계절이 어제런 듯 싶은데 풀벌레 소리는 어느새 창가로 다가와서 새벽을 뒤척이게 합니다. 공연한 설레임 때문입니다. 맑고 천진했던 지난날의 회억들이 설움 같기도 하고 회한 같기도 한 서정으로 물결쳐 와서 전신을 적셔 놓기 때문입니다.

유독 초가을이 그렇습니다. 눈에 띄게 밝아진 햇살과 하늘 빛, 풀벌레 소리, 단풍으로 접어드는 잎새들의 정취가 하찮은 편린마저 애잔한 서정으로 물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지천명을 훌쩍 넘긴 오늘까지 해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을병입니다. 대양을 항해하던 시절에도 꼭 그랬습니다. 바다에도 계절이 있어서, 새벽 오리온 별자리가 휑하니 높아지면 가을입니다.

바닷물도 연한 남색으로 옅어집니다. 훌쩍 높아진 하늘빛을 따라서 그럴 것입니다. 그런 계절이면, 달빛만 출렁이는 선실 창가에서 몇 밤을 불면으로 지새워야 했습니다. 

 
2                               
소년은 가을이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 가슴 한 구석이 서운했고, 하늘가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럴 때면 하숙집 뒷산을 올라가서 산길을 걸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와, 시가지를 싸고 흐르는 강도 아름답긴 했지만, 북쪽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능선길이 아늑해서 좋았습니다. 억새꽃이 수북한 사이 사이로 쑥부쟁이, 들국화가 드문드문 피어 있는 그 길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길섶에 주저앉아 파란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예쁜 소녀의 얼굴 하나가 하늘가로 떠올랐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정말 예쁘고 착한 소녀가 있다면 그곳으로 같이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능선길을 함께 걷거나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것 같았습니다. 쑥부쟁이, 억새꽃을 한 아름 꺾어 주면서 맑고 고운 우정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시 동네 뒷산으로 돌아왔을 때, 강물과 백사장이 연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고, 시가지에는 전등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숙방을 들어서자마자 도화지를 펼쳐 놓고 소녀의 얼굴을 그려봤습니다. 수도 없이 그려봤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의 모습은 또렷한데 그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해 가을은 날마다 해질녘까지 능선길을 걸으면서. 밤마다 소녀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어서 빨리 소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것은 순수하고 고결한 것이어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면서, 그러나 언젠가는 꼭 이루어지는 소망이라고 다짐하면서 억새꽃도 하얗게 지고 가을도 지나갔습니다.            

 
3
이듬해 가을에는 갈매산 계곡으로 가 봤습니다. 강 너머 남쪽에서 주위의 산들 위로 우뚝 솟은 채, 엷은 구름에 덮여 신비로운 남색을 띠고 있던 갈매산이 밝은 햇살 아래 다가와서 손짓을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계곡은 깊고 한적했습니다. 아직은 초가을이라 대부분의 나무들은 여름처럼 푸르렀지만 화살나무, 개옻나무, 북나무, 산벚나무들은 이미 벌겋게 단풍들어 있었습니다. 연보라색 억새꽃도 계곡과 산발치에 무더기로 피어 있었습니다.

인가도 없는 그곳에 작은 옹달샘 하나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담고 있었습니다. 풀숲 위에 팔베개하고 누워서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수없이 많은 하늘 조각들이 북나무 잎새 사이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붉은색 이파리들이 검은빛으로 변하면서 하늘 조각 하나 하나가 꽃송이처럼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단풍든 나뭇잎 사이로 바라보는 가을 하늘은 바로 공중에 피어난 거대한 꽃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소녀가 그리워졌습니다. 이번에는 얼굴과 목덜미가 뽀얗고 하얀 칼라 아래로 가슴이 봉긋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산, 나무들뿐인 계곡은 너무나 적적했습니다. 사슴 한 마리라도 옹달샘으로 내려온다면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쓰다듬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사슴도 마음을 알아 줄 것 같았습니다.

산 그늘이 밀려드는 계곡을 떠나 강까지 왔을 때는 드넓은 백사장과 강물이 연보라색으로 저물고 있었고 강 너머 시가지에는 불이 켜지고 있었습니다. 소녀와의 만남은 좁은 문의 제로옴과 알리사보다 더 애틋하고 순결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긴 인도교 위를 천천히 천천히 걸었습니다. 창랑정기의 을순이도 알퐁스 도떼의 별의 목동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4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해 가을이었습니다. 하숙집 마당과 툇마루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울타리를 따라 촘촘히 피어오른 살비아 꽃대들이 따가운 햇살에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눈부시게 푸른데다 살비아 꽃빛마저 너무나 붉어서 도저히 하숙방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살비아 꽃대들도 외롭고 서러운 마음을 따갑게 태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문을 나서 고운사로 향했습니다. 기차로 두 정거장을 가서 2십여 리를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자주색 물봉선화가 피어있는 좁은 강변길 옆으로 가지가 찢어지도록 오달지게 열린 홍옥 사과알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고운사는 긴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울창한 숲에 싸인 채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경내를 지나 뒷담 쪽문을 넘어설 때였습니다. 산으로 나 있는 오솔길 옆 작은 바윗돌 위에 여학생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눈길이 마주치자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나 고왔습니다. 지금껏 마음속으로 그려봤던 소녀의 모습이었습니다. 반갑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면서 숨까지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말을 해 보려고 해도 입술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장승처럼 우뚝 서서 건너다보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양쪽으로 갈라 묶은 머리채를 뽀얀 뺨 위로 드리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수리의 가르마가 하얗게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조용히 일어서더니 부끄러운 듯 옆을 지나 쪽문 안으로 사라져 가 버렸습니다.

꿈결인 듯 짧은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소녀가 앉아 있던 바윗돌 옆에는 산탱자나무 한 그루가 댕그라니 서 있었습니다. 반 쪽은 파랗고 반쪽은 노랗게 익어 가는 탱자알들 주위로 고추잠자리 떼가 분주로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푸 푸 한숨을 토했습니다. 자신이 바보라는 생각이 치밀었습니다. 바보일 뿐만 아니라 용기도 없는 졸장부라고 목덜미를 쥐어뜯고 가슴을 때렸습니다. 부끄럽고 서러웠습니다.

그 해 가을에는 일요일마다 고운사로 갔습니다. 어쩌면 소녀가 다시 찾아 올 것도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쪽문을 넘어서면서 살풋 돌아보던 소녀의 표정이 그런 암시를 보내는 것도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나 반노랗던 탱자알들이 샛노랗게 익고, 탱자알마저 떨궈낸 가지들이 앙상하게 드러날 때까지도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을도 끝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운사를 돌아서던 날, 너무나 어리석었던 자신이 또 부끄러웠습니다. 기차를 타고 어두운 강을 건너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알아 줄 상태를 찾아 헤매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래서 헬만 헤세의 페터 카멘찐트도 일생을 방랑한 거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서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5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가을이었습니다. 화경을 통과한 듯 따가운 햇살이 교정 가득히 쏟아져내리고 강 너머 갈매산이 단풍으로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우중충한 교실에 앉아있기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를 꼬드겨서 갈매산으로 갔습니다. 밝은 햇살 아래 벌겋게 타오르는 산 빛도 대단했지만, 산꼭대기에 우뚝 서서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큰 나무도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던 참이었습니다.

두 시간을 숨가쁘게 걸어서 찾아간 갈매산 정상의 큰 나무는 그루 둘레가 한 아름도 넘는 참나무였습니다. 덩치는 대단했지만, 멀리서 바라보던 위용 같은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참나무였습니다.

더구나 낮은 가지마다 문종이와 요란한 색깔의 천 조각들을 덕지덕지 달고 있는 모습은 흉물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타다 남은 양초 쪼가리와 숯덩이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것으로 봐서, 산신령을 모시는 당나무였습니다.

갑자기 허망한 생각이 치밀었습니다. 친구도 그런지 묵묵히 앉아서 강 너머 시가지 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가지 전체가 작은 마을처럼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차라리 그 앞의 강이 시가지보다 더 넓고 크게 보였습니다.

당나무에 불을 지르기로 했습니다. 친구와 나무 둘레를 돌면서 문종이, 천조각마다에 성냥을 그어 댔습니다. 그러자 불길이 무섭게 타오르면서 검은 연기가 나무 전부를 휩싸고 하늘 높이 치솟았습니다.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겁이 덜컥 나서 올라왔던 반대편 능선으로 내달렸습니다.

정신없이 한참을 달렸을 때였습니다. 말갛던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면서 거센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산신령이 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신령이 아니더라도 경찰이나 마을 주민들이 잡으러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능선길을 벗어나 계곡 쪽 가파른 비탈로 뒹굴면서 내달렸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도 소낙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고, 마을 앞 개울은 황톳빛 물로 넘치고 있었습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주막집 헛간에서 비를 피했습니다. 너무나 허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업까지 빼먹고 산으로 달려갔던 일이며, 당나무에 불을 지른 것, 공포에 질려 절벽 같은 산비탈을 뒹굴었던 사실들이 무엇에 홀린 듯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근원 모를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이제 곧 고등학교도 졸업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6년을 살았던 이 도시도 흔적 없이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외롭고 서러웠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은 교복차림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친구도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등산도 많이 다녔고 여러 지방을 무전여행 하기도 했지만 외롭고 서러운 마음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우정이란 것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의 마음도 알아 줄 수 없는 것이고, 이제 헤어지면 그뿐인 허망한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더욱 외롭고 서러웠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안채로 들어가서 주막집 누나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누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서럽게 울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누나의 봉긋한 두 가슴이 어머니의 손길보다 보드라운 감촉으로 서러움을 달래 줄 것만 같았습니다. 누나도 꼭 껴안아 줄 것 같았습니다. 주막집 누나야말로 가을이 외롭고 서러울 것 같아서였습니다. -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때의 친구도, 주막집 누나도, 고운사의 소녀도 모두 나처럼 외롭고 서러운 시간을 혼자서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래도 한 번은 다녀와야겠습니다. 갈매산 아니면 고운사라도 들려서 그때 그 소녀는 아닐지라도 그와 같은 시간을 살았던 마음들을 만나고, 절 아래 주막집에서라도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이제는 눈 덮인 겨울 산장의 페치카 훈기를 기대하면서 가을을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소년시절에도 겨울은 가을만큼 외롭고 서럽지 않았습니다. 해 저무는 강 숲의 자욱한 강설이 쓸쓸하긴 했지만, 연탄불로 데워진 하숙방은 따뜻하고 아늑했습니다. 그때 내 하숙방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활짝 핀 화분 두 개가 있었습니다.

눈빛처럼 새하얀 칼라 화분과 검도록 붉은 시클라멘 화분이었습니다. 새봄에는 칼라꽃보다 순결하고 시클라멘꽃보다 정열적인 소녀를 만나리라는 기대로 포근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 밤이면, 고향집 안방 호롱불 아래에서 나즉나즉 고담책을 읽으시던 어머니의 음성으로 싸락싸락 눈이 내렸습니다.



▽ 김문호 프로필

現 문학동인 글마루 회장.
한국문협회원
예술시대작가회 회원
한국수필가 협회 회원
한국예총 <예술세계> 수필 등단(2003)
시흥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상(2003)
강남문협 주최 서울문예상 수필부문 수상(2005)
수필집 <내 인생의 자이로 콤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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