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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서울 시내 유일한 향교와 서원

600년 역사를 간직한 양천향교, 서울의 숨겨진 명소 도봉서원

이삼용 기자 | 기사입력 2010/06/10 [16:26]

[명소] 서울 시내 유일한 향교와 서원

600년 역사를 간직한 양천향교, 서울의 숨겨진 명소 도봉서원

이삼용 기자 | 입력 : 2010/06/10 [16:26]
서울은 역사문화도시로서 많은 문화유적이 자리하고 있지만, 서울시내에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외에도 중등교육기관으로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어 인재들을 길러왔다. 그러나 사부학당은 지금 모두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조선시대 서울에 사부학당이 있었다면, 지방에서는 향교와 서원이 같은 역할을 맡았다. 향교는 관(官)에서 세운 학교였고, 서원은 사림(士林)들이 세운 교육기관이었다. 이들은 지역의 인재들을 교육하고, 학덕이 높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현재 서울에는 양천향교(陽川鄕校)와 도봉서원(道峰書院)이 남아 있다. 이들 문화유적은 1963년 그 소재지였던 김포군 일부와 양주군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됨으로써,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와 서원이 되어 보존되고 있다.
▲ 양천향교 명륜당     © 시정뉴스

▲ 복원된 도봉서원     © 시정뉴스
양천향교는 강서구 가양동 234번지(향교길 50)로 궁산(宮山) 아래에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 일대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양천현감(陽川縣監)으로 있으면서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린 풍경이 빼어난 곳이다.
 
양천향교는 조선 태종 11년(1411)에 건립되어, 선비들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다해 오다가, 1909년에 보통학교령(普通學校令)이 반포됨에 따라 교육 기능을 잃고, 성현(聖賢)에게 제사지내는 제향(祭享)과 교화(敎化) 사업만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1914년에 김포향교(金浦鄕校)에 통합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분리되었고,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이후 1965년 서울특별시향교재단이 설립되었다.
 
양천향교는 1981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제사지내는 대성전(大成殿)·교육 장소로 사용되는 명륜당(明倫堂)·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 머물렀던 동재(東齋)의 건물 규모를 키워 새로 세웠으며, 없어졌던 서재(西齋)도 새로 세웠다.
 
향교 입구에는 홍살문이 서있고, 외삼문(外三門)으로 오르는 계단 왼쪽에는 역대 현감(縣監)과 현령(縣令)들의 선정비(善政碑)가 모여 있는데, 1988년 중수하면서 양천관아(陽川官衙) 주변에 있던 것을 지방 유림(儒林)들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서울시는 1990년 양천향교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특히 양천향교는 2011년에 창건 600년을 맞이한다. 이를 위해 오는 6월 13일(일)에 “양천향교 창건 600주년 기념사업단 출정식”을 갖는다.
 
도봉서원은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조광조(趙光祖)가 이곳 경치를 몹시 좋아해 자주 찾았고, 조정에 나아가서도 공무(公務)를 마치고 나면 수레를 몰아 찾아가 놀았다 한다.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도 이곳의 경치를 경기 일원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 꼽았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조선 선조 6년(1573)에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가 즐겨 찾던 이곳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했고, 사람들이 뜻을 모아 원래 있던 절터에 건립 착수 6년만에 세워졌다.
 
도봉서원은 창건과 동시에 국왕으로부터 ‘道峯(도봉)’이라고 편액(篇額)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1696년에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학자 송시열(宋時烈)을 함께 모시게 되었고, 서울 동쪽 교외의 대유원(大儒院)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규모가 성균관 다음 가 서울의 선비들이  많이 모여들어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단이 설치되어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오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유도문(由道門)이라 편액된 신문(神門), 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등이 있다.
 
또 도봉서원 주변에는 도봉공원 입구에 송시열(宋時烈)이 쓴 ‘道峯洞門(도봉동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부터 시작해서, 이곳을 천하 제일의 아름다운 곳이라 한 ‘第一洞天(제일동천)’ 등 당대 명필들이 이곳의 빼어난 풍광과 학자로서의 이상과 다짐을 글씨와 시문(詩文)으로 새긴 바위 11개가 흩어져 있다.
 
이들 각석군(刻石群)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함께 도봉서원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서울시는 도봉서원과 그 주변 각석군을 함께 2009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8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이삼용 기자>
 

원본 기사 보기:시정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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