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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조선의오늘 2015년 기사] 일곱 아이를 거둬들인 20살 '처녀 어머니'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3/21 [21:45]

[북 조선의오늘 2015년 기사] 일곱 아이를 거둬들인 20살 '처녀 어머니'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3/21 [21:45]

 [플러스코리아=이형주 기자] 외세의 의한 남북분단 75년, "북조선을 알아야 통일이 가까워 진다"는 본지의 신념으로 북조선 알리기를 하고 있다. 오늘은 지난 2015년 6월 7일 자로 북 조선의 오늘이 보도한 '처녀 어머니'에 대한 기사를 소개한다. 장정화 씨의 사연을 그린 작품으로도 소개된 그림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될 정도로 작품성이 높다고 한다.

 

▲ 부모없는 일곱아이의 어머니가 된 20살의 처녀어머니인 장정화 씨 가족. 사진=조선의오늘     © 이형주 기자

▲ '처녀어머니'장정화 씨와 평양시청년학생들의 상봉모임 진행. 세상에 부럼없는 행복만을 안겨주며 어엿하게 키워주고 내세워준 어머니당의 크나큰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일념으로 부모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게 되였다고 강조하였고,젖먹이어린이까지 돌보면서 앓는 애를 업고 새벽길을 걷기도 하고 아이들의 음악공부를 돕기 위해 짬시간마다 기타를 배우던 이야기, 자기자신도 잊었던 생일상을 차려주며 고무해주던 직장의 일군들과 종업원들, 인민반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 등은 모임 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고 한다. 사진=조선의오늘     © 이형주 기자

 

▲ '처녀어머니' 장정화 씨와 가족. 사진=조선의오늘     © 이형주 기자

 

다음은 보도 전문.

 

《처녀어머니》

 

얼마전 평양에서 진행된 제2차 전국청년미풍선구자대회의 높은 연단에 올라섰던 토론자들중에는 부모없는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있는 강선땅의 20살 처녀 장정화동무도 있었다.

토론자들중에서도 제일 나이어린 그가 《처녀어머니》라는 희한한 부름과 더불어 우리 시대 청년미풍선구자들의 제일 앞자리에 떠받들려 나서게 될줄은 사람들 누구나 생각지 못했었다.

대회가 끝난 후 기념사진촬영에 앞서 모범적인 청년미풍선구자들을 만나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부모없는 7명의 아이들을 데려다 정성껏 키우고있는 장정화동무의 소행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처녀어머니》라는 말은 오직 우리 나라에서만 생겨날수 있다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소행을 상상도 하지 못할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에만 있는 《처녀어머니》!

예로부터 어머니가 되기는 쉬워도 어머니구실 하기는 힘들다는 말이 있다.

더구나 아직 아이도 낳아보지 못한 20살의 처녀가 한두명의 아이도 아니고 무려 7명 아이들의 어머니구실을 하자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정화는 어릴적부터 천리마시대의 청년이였던 할머니와 비오나 눈이 오나 자기가 맡은 도로구간에 성실한 땀을 바쳐가는 아버지, 그리고 가정일보다 나라일을 더 중히 여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의 무거운 짐을 자기 어깨에 떠메려는 고귀한 성품을 자래웠다.

언제인가 어머니가 명예전투원으로 일하고있는 강철직장에 지원을 나갔던 정화는 현장에 있는 아이들을 보게 되였으며 그들이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라는것을 알고서는 주저없이 그 애들을 집에 데려와 친동생으로 삼았다.

은정이네 세 자매를 집으로 데려온 다음달에 정화는 또 4명의 부모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문턱을 넘어섰다.그 애들속에는 2살짜리 어린애도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18살이였다. 소녀티를 갓 벗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그 어린 나이에 7명 어린이들의 어머니가 될 생각을 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높은 그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것인가.

7명의 아이들을 품어안으면서 정화는 자기의 엄청난 결심과 행동이 그 무슨 미덕이라고는 꼬물만큼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꽤 해낼수 있겠는가고 따져보지도 않았다.

그저 당의 부름에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원의 깨끗한 량심으로, 부모없는 아이들을 위해 그토록 마음쓰시며 주실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안겨주시는 경애하는원수님의 뜻을 받들어나가는 이 시대 청년으로서의 응당한 본분으로 여겼을뿐이였다.

정화는 이렇게 너무도 소문없이 일곱자식의 어머니가 되였다.

제가 낳은 친자식도 고왔다 미웠다하는데 잔손질이 끝없는 철부지아이들을 한둘도 아니고 여럿을 키우자니 그동안 그가 기울인 수고와 로력은 과연 그 얼마였겠는가.

운동회날 아이들의 특식을 준비하느라 밤을 밝혀가던 일이며 앓는 아이를 위해 발목이 쉬도록 뛰여다니던 일, 바치는 진정을 몰라주고 속을 태우던 아이들 몰래 흘리던 눈물이며 정화가 오늘처럼 아이들과 한가정이 되기까지의 눈물도 많고 기쁨도 많았던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정말 끝이 없을것이다.

정화도 한창나이의 처녀였다. 자기 또래 처녀들처럼 고운 옷을 떨쳐입고 놀러 가고도 싶었고 춤추러 가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처녀들이 마음껏 누리는 꿈많고 노래많은 즐거운 처녀시절의 권리를 어머니된 의무와 스스로 바꾸었다.

그라고 왜 처녀시절을 즐겁게 보내고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거목을 떠받드는 뿌리마냥 내 조국의 미래를 가꾸는 길에 자기의 청춘도, 사랑도 모두 바쳤다.

정화는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놓고 매 아이들의 얼굴을 짚어가며 말했다.

《은정이는 제 소원대로 인민군대에 입대할거예요. 우리 막내는 조금 더 크면 축구선수로 키우고 은향인 성악가로 키우겠어요.》

나이에 비해 너무도 성숙한 장정화동무.

이처럼 그는 평양애육원을 찾으시고 원아들을 잘 키워 앞으로 이들속에서 이름난 과학자, 체육인, 예술인, 군인도 나오고 영웅도 나오게 하여야 한다고 절절하게 이르시던 경애하는원수님의 그 말씀을 한생의 좌우명으로 안고사는 애국자였다.

하기에 제2차 전국청년미풍선구자대회 이후에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장정화동무의 소행에 대하여 다시금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를 안아주고싶었다고 그처럼 절절히 말씀하시며 오늘은 이렇게 조선청년의 최고영예인 김정일청년영예상까지 안겨주신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우리 공화국의 청년들의 모습이며 바로 우리의 청년강국의 모습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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