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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 명나라 여인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낸 이유는?

한문수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2/13 [10:07]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 명나라 여인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낸 이유는?

한문수 컬럼니스트 | 입력 : 2013/12/13 [10:07]
 
홍 순언(洪純彦)과 기생 

결초보은(結草報恩)하리라. 오늘도 곱디 고운 비단에 “보은(報恩)”이라 수를 놓았다.
금무늬(錦緞)로 새겨진 글을 어루만지며, 조선의 한 선비를 또 그려 본다.
이렇게 새긴 금단이 한 방 가득히 쌓여 간다.  

“조선인 홍 순언(洪純彦)”이라는 이름 석자.
부녀자의 생명인 정조와 가문을 지켜 주신 분, 은부(恩父) 홍 순언을 한 순간도 잊을 길이 없다.
해마다 조선에서 오는 사절단을 기다려도, 사람을 놓아 애타게 찾아 보아도 소식이 없다.
 
▲ 조선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홍순언     © 편집부
한어 역관 신분의 홍 순언이 절사(節使)행차를 따라  명나라에 들어 간 것은 선조 때이다. 국가의 중차대한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도착한 사절단 중 홍 역관은 시중을 배회하다가 ‘은 천량이 없으면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현판이 걸려 있는 기생집(靑樓)을 발견했다.

홍 역관은 이처럼 비싸면 필시 여자는 경국지색일 것이며, 미인이라면 천량인들 무엇이 아깝겠느냐는 생각에 청루에 들었다. 명나라 탕자들도 값이 비싸 감히 출입을 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홍 역관이 만나 본 여자는 창가(娼家)의 여자가 아니라 시랑(侍郞) 벼슬을 가졌던 이의 딸이었고 자색(姿色)과 재화(才華)가 출중하였다. 가세가 기우러 부친이 돌아갔으나(다른 기록에는 횡령으로 구금) 장례를 치룰 수 없는 형편이 못되어 몸을 팔아 이에 충당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은 홍 역관은 측은한 마음에 돈을 내어 깨끗이 도와주고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홍 역관은 귀국 후 공금 축낸 죄로 구금된다.

한편 그녀는 청루를 그만두고 본가에 돌아온 후,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계취(繼娶)가 되었고 홍 역관의 은덕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다.  
금단을 짜서 매 필 마다 “보은(報恩)” 두 글자를 수놓으며 매번 인편에 애타게 찾기를 해마다 하였다.
이 즈음 임진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홍 역관이 사신을 따라 또 명나라에 가게 되었고, 석성(石星)이 그 때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어 있었다.  

석성은 홍 역관의 높은 의절을 부인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홍 역관이 중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힘써 주선해 줄 것을 소원했다.
석 상서가 황제에게 간구했고, 황제는 제독 이여송과 장졸 수만을 파병, 조선을 구해주도록 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왜구로부터 누란의 위기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앞서 조선은 2백여 년간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 있어, 여러 차례 고쳐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이를 거절하다가 선조 17년(1584)에 바로 잡게 되었다.
이를 종계변무(宗系辨誣)라 하는데 이 또한 석성이 예조상서로 있으면서 이를 처결하는데
그녀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기록은 성호사설 제9권 인사문(人事門)에 보인다.
 
▲ 이인임의 아들에서 이자춘의 아들로 수정된 이성계     © 편집부
 

심전고(心田稿) 제2권 대수암야화(大樹菴夜話)에는
청루에서 헤어질 때 그 여자가 백 번 절하며 은부(恩父)라고 불렀다.
그 뒤에 홍 순언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의 사신을 따라 다시 연경에 들어가 통주(通州)에 이르니
공장(供帳)이 구름같이 잇따랐는데, 곧 석공(石公)의 마중이었다.  
홍 역관이 이상히 여기면서 따라서 석성의 집에 이르자
상서가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니, 그 부인이 성장을 하고 나와서 절한다.

홍 순언이 황공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니,
석공이 말하기를, “은장(恩丈 은혜로운 어른)께서 이 사람을 오래되어 잊었소이까?” 하였다.
부인이 울면서 창관을 나와서 석공의 계실(繼室)이 된 사연을 말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부인이 귀한 몸으로 손수 짠 비단에 모두 보은단(報恩緞)이란 글자를 수놓아
극구 사양하는 홍 순언의 돌아오는 행장에 보내었다.
홍 순언이 한양(漢陽) 미동(美洞)에 있으면서 보은단을 팔았는데,
미동은 곧 보은단동으로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이라 썼다.

석공은 부인의 일로 해서 더욱 조선의 일에 힘을 써
변무(辨誣)와 청원(請援 원병 청원)의 두 가지 일에 크게 공로가 있어 
산 사람을 모신 생사당(生祠堂)을 평양에 세웠다.
홍 순언 또한 이 공로로 2등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고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으며, 정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두 기록이 약간의 사실적 차이는 있으나,
홍 역관이 한 여인에게 베푼 은덕이 조선의 숙원과 위기를 구한 것은 사실이다.
음양에 대처하는 대장부의 처신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는지 음미해 볼만하다.
 
▲ 창담동 공원에 있는 홍순언 비석     © 편집부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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