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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제주도에 산다는 것은

굴렁쇠 | 기사입력 2007/04/08 [10:29]

그 옛날 제주도에 산다는 것은

굴렁쇠 | 입력 : 2007/04/08 [10:29]
▲ 우마차를 끌고 있는 제주여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소달구지를 끌고 울퉁불퉁 돌 자갈길을 얼마나 다녔을까.     © 굴렁쇠

"쇠(牛)로도 못 낳아 여자로 낳았다" 사내 아이를 선호하는 말이 아니다. 오죽 못났으면 화산섬 제주에 여자로 태어났느냐는 자조섞인 말이다. 그 옛날 제주 섬 여인들은 소보다 더 많이 일했다. (아니 지금도 소처럼, 소보다 더 일하는 여성들이 많다.)

열길 물 속 저승길도, 팍팍한 돌무더기 화산밭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다밭에 내려 앉으면 어머니 자궁 속이었고, 화산밭에 누우면 편안한 잠자리였다.
 
왜 고통이 없었으랴. 왜 슬픔이 없었으랴. 척박한 삶의 밭을 일구더라도 그것은 견디어야 할 운명, 그런 인생이었다. 그래서 제주여성은 억세고 강했다. 남성에게 의존적이지도 않았다. 제주남성들은 또 그 여성의 존재를 꿋꿋한 노동의 동반자로 여겼다.

화산섬 제주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여성과 남성을 갈라놓지 않은 삶, 평등구조에서부터 출발하고, 평등세상을 꿈꾸는 고단한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절망은 섬의 바깥으로부터 왔다.
 
제주 섬사람들을 절망시킨 것은 다름아닌 섬의 바깥세계였다. 그 바깥세계에는 왜적도 있었고, 오랑캐도 있었다. 그들에게 간이며 쓸개를 다 빼준 이 나라 절대군주들과 그의 하수인들이 있었다.

고려시대도 그랬고, 조선시대 때도 제주 섬사람들은 그들의 노예이거나 머슴에 불과했다. 그것은 역사적 변방에 사는 사람들이 운명처럼 치러야 하는 비극이었다. 외세의 침탈과 노략질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여기에 한술 더 뜬 중앙정부의 잦은 수탈과 착취에. 제주 공동체는 끊임없이 위협받았고, 부서졌고, 산산조각 났다.

이어도의 꿈은 절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제주 섬사람들의 존재는 순전히 중앙정부를 위해 존재했다. 수천년을 사람 아닌 짐승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했다. 여기에는 몸서리치는 진상(進上)의 올가미가 있었다.

 
▲ 바다와 뭍을 넘나들며 생존을 위해 바지런한 삶을 꾸려온 제주잠녀는 제주바다는 물론 육지와 해외 물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제주여인들은 수난의 상징이었다.     © 굴렁쇠


다른말로 바꾸면 이거야말로 노동착취다. 진상은 비단 중앙조정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외세인 원나라와 명나라에도 진상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제주 섬사람들은 장구한 세월을 이들을 위해 조공품을 생산했고, 몸소 배를 끌고가 갖다 바쳤다. 사면초가의 삶 그리고 운명, 제주 섬사람들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갔다. 조공품을 실어 나르는 배에도 제주남성들이 끌려가 부역일을 맡았다.

수송 도중 풍파를 만나 배가 침몰하면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고래 밥이 되는 일이 빈번하여 오죽했으면 제주 섬사람들은 여자아이를 낳아야만 이 아이는 커서 부모를 섬길 애라고 기뻐했겠는가.
 
전통적으로 제주 남성들은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나 중앙정부의 강제명령에 따라 선박 제조와 운송 업무에도 매달려야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주변을 오가는 선박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정에 보고하는 임무까지 주어졌다. 그러나 정작 가장으로서 생업을 위한 선박 제조와 조업을 위한 항해는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됐다.
 
무얼 먹고 살란 말인가. 중앙 조정의 노리개로 전락한 순간부터. 제주남성은 아버지의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른 지방 백성도 이랬을까. 가장으로서 포기각서를 써야 했던... 얼마나 시달렸을까.
 
"제주는 중읍(中邑) 정도의 자그만 곳인데 진상 바쳐야 할 부담은 실로 통영의 백갑절에 이른다. 이는 조선팔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규정이다. 여기에다 과중한 부역, 백공지역(百工之役)이 덮치므로 어찌 제대로 살아갈 사람이 있겠는가"
 
제주목사를 지냈던 실학자 이형상(1653~1733)의 기록이다.

탐라상계초(耽羅狀啓抄)에 들어있다. 오죽했으면 감귤 진상이 두려워 귤나무에 팔팔 끓는 물을 붓고 시들어 죽게 하는 일이 빈번했을까. 가혹한 진상으로 우량말이 멸종될까 두려워 일부러 말의 눈에 상처를 내고 소경말을 만들거나 가죽과 귀를 찢어 진상용에서 빼돌려 종마(種馬)로 삼으려 했을까.
 
▲ 제주남성들은 제주여성의 존재를 꿋꿋한 노동의 동반자로 여겼다. 변방의 섬에서 그들의 삶은 곧 고난의 역사였다.     © 굴렁쇠

 
사면초가...제주 섬사람들의 존재.
 
목자 이야기는 한마디로 고통스럽다. 중앙정부가 제주남성들을 어떻게 노예로 혹사시켰는지 알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까지 제주섬에는 국마장과 목축장이 설치됐다. 이곳에 제주 남성들이 강제로 끌려가 목자인생을 살았던 세월은 600여 년이나 지속됐다.
 
16세에서 60세까지 말테우리(목자)로 살게되는 그 집안은 대개 파산 운명을 맞는다. 겨울철 꼴이 모자라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말이 죽기라도 하면 가난한 목자가 이를 변상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집과 밭, 소나 가재도구, 농기구를 팔아 갚아야 했고, 심지어는 처자식까지 팔았던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여러 마리를 변상할 경우에는 목자의 친족을 가려내어 대신 변상토록 했다.

40여 년의 임무를 마친 목자 앞에 가로놓인 삶은 생지옥과 구별되지 않았다. 그런 비참한 인생에서 벗어나 흙으로 돌아가 편안히 쉬라고 타살하는 사례도 있었다. 생활이 고달프고 비참한 나머지 가족 모두가 섬을 탈출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과중한 진상품 부담과 관의 잇따른 수탈과 착취, 왜구의 침범이 빈번해지면서 노역을 견디다 못한 포작(鮑作)들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사료에 의하면, 세종때 63,093명이던 섬인구가 숙종때에 이르러 34,980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제주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조선조정은 여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제주도민의 섬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1629년) 때부터 약 200년에 걸쳐 출륙금지령까지 내려버렸다. 당연히 외부 세계와의 소통은 단절됐다.

절해고도, 오도 가도 못하는 고립무원의 땅으로 숨통을 막아 놓은 것이다. 단절은 정보와 문화의 유입마저 불가능하게 했다. 강력한 철권통치도 당연히 뒤따랐다. 섬사람들의 생활권과 개인의 능력 같은 것은 중앙정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그게 삶이었다. 역사적 변방에 사는 섬사람들의 신세는 말이나 소나 다르지 않았다. 제주 섬사람들이 고난의 순간마다 지탱하는 힘이 됐던 운명공동체는 언제나 중앙 조정에 의해서 무너지고 파괴되었다.

오랜 역사에 거쳐 제주도민이 중앙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품어왔는지, 왜 저항정신이 강했는지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 이 기록사진은 제주4.3 당시 제주여인들이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서는 모습이다. 기구한 역사에 동원된 제주여성들, 젊은 남성들은 상당수 입산했거나 다른 곳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낮에는 성벽을 쌓는 일에 동원됐고, 밤에는 교대로 성을 지켰다. 중앙정부에 의해 군인이 되었던 제주여정(女丁)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굴렁쇠

제주 옛 여성군인, 여정(女丁)을 아세요?
 
제주남자의 기구한 삶은 제주여인의 강인함을 길러냈다. 부역을 치루는 과정에서 남성의 인구는 점차 줄어들다보니 당시 제주도에서는 아버지인 남성이 가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 따위는 적용되지 않았다.

슬픈 변방의 역사가 그들을 주인이 아닌 머슴으로 섬에 살게 했던 것이다. 제주 사람들의 수눌음 공동체와 저항정신, 그것은 역사적 변방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제주여인들은 남성이 부역을 치를 때 미역 전복 등 진상되는 모든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맡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대부 남성들이 사용하는 모자(망건과 탕건)를 제주의 말총으로 만들어 진상하는 일을 전담했다. 안스러운 기록도 있다. 제주섬을 방위하고 때에 따라서는 전시동원령에 의해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조 시대의 일반인 군복무 기한은 지역방위군인 경우 약 40년이었다. 제주 섬사람들에게는 대체복무규정이 적용되었다. 만일 집안의 남성이 군복무를 해야하는데 병을 앓거나 변고가 생기거나 노약자가 있는 경우, 그 집안의 젊고 튼튼한 여성을 골라서 군역을 지게 했다.

이들 제주도의 여성군인을 여정(女丁)이라 불렀다. 다른 지방에는 찾아볼 수 없는 징발제도였다. 여정은 1600년대 초기에는 남성군인의 수를 웃돌았다. 물질, 밭일, 집안일 말고도 군역마저 짊어져야 했던 제주여성들은 한마디로 질곡과 수난의 상징이었다.
 
그 옛날 제주섬에 산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까? 제주역사의 거울을 들여다 보기가 두렵다.
 

                                                                                                                        - 굴렁쇠 -


데일리포스트(원본 기사 보기)
저항생각 13/06/08 [12:21] 수정 삭제  
  임금에게 진상되었다는 것에 관한 실제적인 애기를 알게 되니 그걸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역사의 거울을 들여다 보기가 두렵다" 그래서 민주주의, 인내천이 필수라는 생각, 부당함에 대해서는 자손을 위해서 참지말고 들고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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