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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박혁거세 왕능은 중국 양주에,
고구려 시조와는 형제간이다

박병역 대표 | 기사입력 2007/04/13 [16:51]

[단독]박혁거세 왕능은 중국 양주에,
고구려 시조와는 형제간이다

박병역 대표 | 입력 : 2007/04/13 [16:51]
[1]. 박혁거세왕능은 중국 양주에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다. 시조의 성(姓)은 박씨며 휘(諱)는 혁거세이다.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은 정월 15일)날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중략)

[삼국사기 신라 본기] 20년(BC:37년)에 경성(京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26년 봄 정월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3월 왕은 하늘로 올라 가셨는데 7일 후에 유체(遺體)가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의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하여 5체(五體)를 각각 장례하여 5능(五陵)이 되었다. 역시 능의 이름을 사능(蛇陵)이라 하였다. 담엄사(曇嚴寺) 북쪽에 이 능(陵)이 있다. 태자 南海(남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본문 끝.

대한민족의 반역자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1]. 금성(金城) => 이병도는 註(주)에서 금성(金城)은 여지승람(輿地勝覽) 경주고적조(慶州古蹟條)에서 재부동서리(在府東西里). 토축(土築) 周(주) 2,407척이라 하였으나 지금에는 유적이 뚜렷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金城湯池(금성탕지)의 뜻에서 취하였다기 보다 <검城(성)> 즉 <임금성(왕성)>의 뜻이 아닌가 한다. 라고 하였다.

[2]. 담엄사(曇嚴寺) =>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증서도 없이 임의대로 註(주)에서 담엄사(曇嚴寺)->경주(慶州) 남천(南川) 남(南)라고 했다. [개가 멍멍 짖는다]

 
(2) 혁거세왕의 묘지는 강소성 양주에 있습니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의 묘지는 경북 경주 탑리 5능(五陵) 남쪽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를 살펴보면 담암사는 경북 경주 탐리 오능 남쪽이 아니라 楊山村(양산촌)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거서간혁거세의 무덤은 虎丘山(호구산)의 雲岩寺(운암사) 남쪽 4里(리)에 있다. 고 기록돼있습니다. 곧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墓地(묘지)는 강소성 吳縣(오현)의 虎丘山(호구산)에 있습니다.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2].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형제간이다.


[삼국유사,북부여]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재위 3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천제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5룡거(五龍車)를 타고 홀승골성(訖升骨城: 의주(醫州)에 있음)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북부여라 칭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 6] 사로(斯盧)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 혹자는 말하기를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왕을 낳았기 때문에 中華人(중화인)들이 선도산성모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고  성모가 동국의 선도산으로 가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다.  또한 상서스러운 게룡(鷄龍)이 나타나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西述聖母(서술성모)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몸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본문:[仙桃山神母本 中國帝室之女,名娑蘇] : 선도산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북부여 해모수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깨우쳐 해동(海東:신라)에 들어와 오래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 성모(聖母)가 시초로 진한(辰韓:신라)에 도착하여 성자(聖子: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시조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본문에서] 史臣(사신) 김부식은 정화년(政和年)에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대궐의 우신관(佑神館)에 一堂(한당)을 설치하고 여선상(女仙像)을 모셔 놓은 곳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輔)가 말하기를 이 상은 귀국의 신(神)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고대 중국제실지녀(中國帝室之女(중국 부여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이 바다 건너 진한(辰韓진한:신라)에서 아들(혁거세)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늘 선도산(仙桃山)에 계셨는데 그분의 상(像)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의 시조편]에서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북 부여를 떠나 동부여(가섭원)를 개국하게 된다. 즉 북부여 해모수 황제 궁실의 여인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며 또한 유화 부인이다.

[상기의 본문을 고찰]해 보면 북부여 황제 해모수의 부인은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 또한 사소(娑蘇)이며, 이를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혹은 동신성모(東神聖母)라 칭했습니다. 따라서 고주몽과 박혁거세왕의 어머니는 같은 사람이며, 형제간이 된다.
[상기와 같은 역사적 고증을 한,중,일 학자들 중에 그 누가 부정한단 말인가?]
 
선도산 정상의 성모사(聖母祀)-사진


▲ 경주 성모사   
경주 성모사(聖母祀)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을 낳은 성모(聖母)를 기리기 위해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세운 사당이다. 1963년 사우(祠宇)를 중건한 것이다.

신라 천년의 도시 경주는 궁궐의 유적물은 단 하나도 없고 온통 무덤의 도시입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지정한 경주의 각 유적 물에 대하여 1945년 8.15광복 이후 학문적 토론의 비평이나 단 한번의 검증도 없이 경주를 신라 천년의 도시로 믿고 있는 얼빠진 민족입니다. 도대체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언제까지 왜곡된 국사로 국민을 호도하며 기만 할 것인가?
 
◆. 경주 김유신의 묘는 남의 무덤이다
 
▲가짜 김유신의 묘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은 673년(문무왕13)7월향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내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를 세워 공명(功名)을 기록하고 또 민호(民戶)로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하라. 라고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 기록돼 있습니다.

835년(흥덕왕 10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묘 앞에는 조선 시대에 세운 비석이 있고 석상은 최근 묘를 수리할 때 세운 것이다. 즉 김유신의 묘는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지정한 가짜 묘이며 다른 사람의 무덤입니다.
 
◆ 금산원(金山原)에 대한 이병도의 주(註)

이른바 금산원이 어디인지 이것이 당시의 지명인지 혹은 후세의 그것인지 또 혹은 誤傳(오전)인지 아닌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전김유신묘[傳金庾信墓]란 것은 당당한 왕능으로 진정한 김유신묘가 아니라는 것을 필자는 밝힌바가 있다.
 
[金載元 博士 回甲紀念論文集 所載 拙文 [金庾信 考] 愚見으로는 [傳 金庾信墓]는 실상 명칭상의 와전(訛傳(神武. 興武)으로 신무(神武)왕능과 혼동한 것 같고 진정한 유신묘는 저 서악하(西岳下)의 태종무열왕능에서 전면 약 60여미터 위치한 김양묘(金陽墓)의 전면인 세칭 각간묘(角干墓)가 그것이라고 인정 된다. 자세한 내용은 전기졸문(前記拙文)을 참고하기 바란다.(同上) 라고 이병도는 임의로 지정했습니다. [여보시오 소가 빙긋이 웃고 있습니다]
 
◆ 김유신의 묘지는 강소성 楊州(양주)에 있습니다.

금산원(金山原)은 金山寺(금산사)가 소재하고 있는 중국 강소성 楊州(양주)에 있습니다. 금산은 중국 楊州(양주)에서 爪州(조주)를 떠나 鎭江(진강)으로 들어가면 강의 왼쪽 앞에 커다란 탑이 있는 작은 산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金山(금산)이다. 금산은 높이가 44M인 작은 섬이며 長江(장강)의 기슭에 있다.
 
金山(금산)에 절이 창건된 것은 東晋(동진:317-420년)이다. 이후 역대 황제들은 이곳을 많이 찾았다. 당나라 宣宗(선종:847-859년) 시대에 法海(법해)라는 사람이 法海洞(법해동)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섬에서 금을 캐어 이 금을 황제에게 헌상하였다. 황제는 받은 금을 佛堂(불당)이나 탑 伽藍(가람)의 수복 비용으로 충당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부터 이 섬을 金山(금산)이라 부르게 하고 절의 이름도 東晋(동진) 시대에 澤心寺(택심사)에서 오늘날의 金山寺(금산사)로 바뀌게 되었다.
 
金山(금산)의 서쪽에는 塔影糊(탑영호)라는 호반이 있고 호반의 서쪽에 中冷泉(중냉천)이라는 샘이 있다. 이곳의 샘물은 맛이 좋아 天下第一泉(천하제일천)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養生之道(양생지도)를 잘 알고 있는 한 노인이 금산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산중턱에 오목히 들어간 큰 암석을 발견하고 파헤쳐 보니 고대의 독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 독항아리 속에 수십 종의 귀중품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이 물건을 갖고 떠나기 전에 금산(金山)의 서쪽에다 옮겨 놓고 石翁徙貧帝里(석옹사빈제리)라는 진어를 남겨 두었다. 이 때문에 금산을 翁山(옹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292년 원대의 과학자 곽수경은 昌平(창평:하북성 북경 북쪽) 일대의 泉水(천수)를 옹산 아래로 끌어들여 하나의 큰 저수지를 만들어 옹산박이라 이름을 붙혔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 인공호수를 대박호 서호 서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무제는 장안에 있는 昆明池(곤명지)를 개간하여 호수 이름을 곤명호라 하였다. 명나라 무종(1506-1521년) 시대에 이 옹산을 다시 金山(금산)이라 불렀으며 옹산박도 金海(김해)로 개명하였다.
 
★ 지금 중국의 楊州(양주)는 인구 28만 명의 작은 도시이다. 9세기 초에는 이 양주가 장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처음 도착하는 도시였다. 양주시가는 사방이 운하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부와 동부의 운하는 수나라 煬帝(양제)시대에 만든 오래된 운하이다. 양주(楊州)에서 爪州(조주)를 거치면 鎭江(진강)에 이른다.
 
▶ 진강(鎭江)이 유명한 것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孫權:222-258)이 이곳에 한때 도읍을 정했기 때문이다. 진강(鎭江)의 명소는 長江(장강) 연안에 있는 金山(금산). 北固山(북고산). 焦山(초산)의 3개의 바위산이 있다. 이 北固山(북고산)을 가운데 두고 金山(금산)과 .焦山(초산)은 각각 시의 동쪽과 서쪽 끝에 있다.
 
▶ 후백제의 견훤은 양주 금산사(金山寺)로 들어갔다.

[삼국사기 -50권-열전10-甄萱(견훤).] 견훤은 尙州(상주:吉林省(길림성) 영안현) 加恩縣(가은현) 시람이며 本姓(본성)은 李(이)씨였으나 후에 甄氏(견씨)가 되었다. (중략)
견훤은 金山寺(금산사:전북 김제군 금산사)에서 있은 지 석 달 만인 6월 초하룻날 막내아들 能乂(능예)와 딸 哀福(애복)과 애첩 姑比(고비)등과 錦城(금성)으로 급히 도망쳐 나와 사람을 파견하여 고려 태조에게 만나 줄 것을 청원하였다.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黔弼(검필)과 萬歲(만세)등을 파견하여 “ 鎭江(진강)”의 水路(수로)로 들어가 위로하고 데리고 와서 고려에 이르니 고려의 태조는 후한 예로 환대하였다. 견훤은 태조보다 나이가 10년이 더 많아 尙父(상부)로 받들어 南宮(남궁:강소성)을 주어 직위를 백관들 보다 상위에 있게 하고 楊州(양주:강소성)를 食邑(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金帛(금백)과 蕃縟(번욕)과 奴婢(노비) 각 40명과 內廐馬(내구마) 열 필을 하사하였다.

후백제의 견훤은 한반도 속의 전북 김제군 金山寺(금산사)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중국 강소성 楊州(양주) 金山寺(금산사)로 들어갔다. 金山(금산)은 중국 楊州(양주)에서 爪州(조주)를 떠나 “鎭江(진강)”으로 들어가면 강의 왼쪽 앞에 커다란 탑이 있는 작은 산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金山(금산)이다. 견훤은 강소성 양주(楊州) 金山寺(금산사)에서 있은 지 석 달 만인 6월 초하룻날 막내아들 能乂(능예)와 딸 哀福(애복)과 애첩 姑比(고비)등과 錦城(금성)으로 급히 도망쳐 나와 사람을 파견하여 고려 태조에게 만나 줄 것을 청원하였다.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黔弼(검필)과 萬歲(만세)등을 파견하여 “鎭江(진강)”의 水路(수로)로 들어가 위로하고 데리고 와서 고려에 이르니 고려의 태조는 후한 예로 환대하였다. 견훤은 태조보다 나이가 10년이 더 많아 尙父(상부)로 받들어 南宮(남궁:남경의 궁전)을 주어 직위를 백관들 보다 상위에 있게 하고 양주(楊州)를 食邑(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金帛(금백)과 蕃縟(번욕)과 奴婢(노비) 각 40명과 內廐馬(내구마) 열 필을 하사하였다.
 
 
왜독에 중독돼 넋을 잃은 7천만 한겨레여...!
후백제의 견훤은 전북 김제군 금산사에 있었는가?
중국 강소성의 양주에 있는 금산사로 들어갔는가? 대답하라...!
 
▶ 따라서 중국의 강소성 양주(楊州)는
신라의 땅인 동시에 후백제 또한 고려의 영토이었습니다.

 
넷티즌 여러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가 형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매한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지방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플러스코리아 넷(http://pluskorea.net/) 제1탄]의 핵탄이 중국 본토를 향해 날아가고 있습니다.드디어 단 한발의 폭탄에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은 파괴되고 말았다. 완벽한 승리입니다.
 
기뻐하십시요 우르르 쿵쾅~쾅쾅 한민족정기를 되찾는 우렁찬 함성이 들립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짝짝~~ 7천만 국민의 응원 소리에 천지가 진동합니다.
대한민국의 통쾌한 승리입니다. 넷티즌 여러분 다 같이 일어나 만세 삼창을 외칩시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다음은 [제3 탄-> 경주의 선도산(仙桃山)은 가짜이고 중국에 있다] 가 연재됩니다.

박병역(朴炳譯) 위원 프로필
 
△ 한국정신문화선양회 대표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인류의 기원역사
3.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4.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5.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6. 격암유록의 해설


광마 07/04/13 [21:38] 수정 삭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교육시키려고 교과서에 왜곡된 역사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점이 빨리 바로잡혀야 우리것도 우리거라고 당당히 말할수있져
정동진 07/04/13 [23:44] 수정 삭제  
  잘못된 역사... 친일사학자에 의해서 왜곡되고 일본 사학자보다 더 악랄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엿가를 국사교과서로 만들어놓고 바꾸지 않는 것은 과거 이승만정권이나 박정희정권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그리했디고 하는데 이것을 바로잡지 못하는 현정부의 잘못도 크다고 할 수있겠습니다.
선생님들이 나서시어 주시기 우리들은 적극 성원하겠습니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강탈하려는 것도 우리의 잘못된 역사서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그렇겠지요?
박병역 07/04/15 [10:02] 수정 삭제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해 설치된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중국지명을 한반도 내의 지명으로 얽어 맞춰 신라, 고구려, 백제 및 가락국의 4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 변조하여 대한민족의 자긍심을 철저히 말살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가 거짓 가짜로 만들어 준 국사교육에 무려 62년 동안 세뇌되어 뇌리 깊숙히 각인된 거짓 지식으로 분별력을 상실하여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의 실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고증에 의한 역사적 진실]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습성이 한국인의 고질병이며, 왜독(倭毒)이 아니고 무엇인가?

7천만 대한민족은 왜독에 중독되어 참과 거짓의 역사도 분별하지 못하고 넋을 잃고 있으니 한국인의 고질적 병폐를 그 누가 치유할 수 있겠는가?

머리는 짤라버리고, 전신이 유린되어 오늘도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으나 이미 눈과 귀가 먹은 대한의 아들 딸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백의민족의 장손국 천손들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 통한의 한국역사여...! 하늘을 우러러 땅을 치며 통탄 할 뿐이다.
해바라기 07/04/25 [08:32] 수정 삭제  
  해바라기
민족얼 살리기에 열심인 여러님들의 노고에 큰박수 보냄니다.진리는 언젠가 밝혀지게되어있는 법, 건강하세요.   2007-04-23 18:11:46

해바라기
오늘 플러스코리아에 접속해 검색한 결과 일부 잘못됐다고 생각되는부분을 고칩니다. " 혁거세의 묘지는 강소성 소주 (쑤쪼우 )에있다. 쑤쪼우에는 호구산 ( 후치우산.tiger hill,이라는 낮은 언덕이있고 안에 운암사 가있다. 이전에는 오현 ( 우시엔)시에있었은나 얼마전 수쪼우시로 통합됨.   2007-04-24 13:06:30

해바라기
수쪼우는 아시다시피 전국시대 오나라의 수도이며 호구산( 낮은 언덕 )에는 조그만 연못이있고 그기에 3000자루의 검을 오왕 부차가 죽었을때 묻었다고하며, 오왕의 묘지가있다고함. 참고로 재플리넷 중국여행의 수쪼우 후치우공원 참고요망.   2007-04-24 13:18:46
07/05/03 [22:39] 수정 삭제  
  선도산성모는 미혼의 몸으로 몇명의 왕을 낳는겁니까? 글들이 두서 없는데가 좀 있군요..여기선 해모수의 아내로 나오고.....
감동은 07/07/10 [21:24] 수정 삭제  
  노심초사하고 계시는 박병역위원장님께 뭐라 표현을 하겠습니까?
자나깨나 민족을 위해 고뇌하시고 식음도 전폐하시고 계신 님에 대한 우국충정!!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17/04/05 [01:58] 수정 삭제  
  아들일 수 도 있지 않겠습니까? 연관성은 분명합니다. 두분이 태양을 상징하는
알에서 탄강했다는 신화부터 고구려 신라 모두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유일하게
승하 라고 표기했다는 점 그리고 두분만 유일하게 천자 로 불리웠다는 점 에서는
아무리 봐도 혈연간은 분명합니다. 혁거서간은 왕의 존호 이며 역대 서라벌국은
누대로 여왕 승계이나 최초로 남자 왕의 시작이 혁거서간이었습니다.
파소성모 전대 서라벌국 여왕이 혁거지 라고 표기 된 것으로 봐서는 혁거는 여인국에서
사용하는 존호인듯 합니다. 조금 더 디테일 하게 쓰셨으면 독자들에게 충분히 이해
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혁거서간의 본래 이름은 박씨 성을 사용하지도 않은
일광(日光) 입니다. 주몽의 실제 이름도 해 가씨 상해 입니다. 이는 양부 금와왕이
태어날때 직접 지어준 이름으로 해를 닮은 아이 라는 뜻 이라 합니다.
상해 추모는 해모수 단군의 본처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씨인 해씨성을
물려받을 수 없고 모계인 어머니 성 류화부인의 옥씨 성을 물려받았어야 되었으나
모든사실을 알고 있는 금와왕이 양부로 되었기 때문에 해씨성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그러나 모수단군의 본처 소생의 자녀들에게 설득이 필요했으나
이는 패망한 북부여의 9제후국가를 모두 수복한 공로로 해씨성을 쓰도록 인정 받은
계기가 된 것 입니다. 참고로 선도산 파소성모는 류화부인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
입니다. 파소성모는 부여제실의 공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부여국 출신인데
혹자는 대소의 딸 이라고도 하고 정확히 누구의 딸인지 알 수는 없으나 출신 성분은
공주라는 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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