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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희망, 인문학

임영인 신부(대한성공회 노숙인 다시서기센터 소장)

임영인 신부 | 기사입력 2007/04/22 [10:26]

가난한 이들의 희망, 인문학

임영인 신부(대한성공회 노숙인 다시서기센터 소장)

임영인 신부 | 입력 : 2007/04/22 [10:26]
 
   ‘성 프란시스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노숙인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물었다. “노숙인도 교육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까?” “그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당혹스럽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필자가 어떻게 빈곤현실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필자가 꽤 오랫동안 빈곤계층의 자활을 거드는 일을 해 온 끝에 인문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지원을 넘어 ‘어떤 것’이 필요하다


   필자가 20여 년간 지켜본 빈곤현실은 암울했다. 사회복지가 발달되면서 경제적으로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그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장의 혜택에서 배제되어 상대적인 빈곤은 더 심해졌고 문화적으로 소외되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채 살아간다. 교육의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과거에는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반면 이제는 노력을 해도 불가능하다는 ‘절망의 빈곤’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빈곤계층에게 행복한 삶은 점점 멀어지고만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빈곤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지원을 넘어선 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또 다른 그 ‘어떤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자존감의 회복’이라고 생각했다. 자존감. 필자는 그것을 ‘자신은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고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존감이 회복된다면 비록 궁색하고 불편한 생활을 할지라도 희망을 갖고 조금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그 자존감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필자는 그것을 성찰할 수 있게 돕는 교육, 인문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인문학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온 삶과 역사와 문화를 통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빈곤계층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훈련’이 아니라 ‘교육’


   우리사회에 빈곤계층을 위한 교육은 여러 가지가 있다. 기술교육, 취업교육, 직능교육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훈련은 기대하는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반복되는 학습이다. 교육은 생각하게 만들고, 스스로 좋은 것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빈곤계층을 대상으로 한 많은 교육들이 사실은 훈련이었고 조금 더 풍요로운 삶에 대해 사고하도록 돕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곤계층에게 사고하고 성찰하게 돕는 인문교육은 절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문학은 빈곤계층에게는 너무 멀리 있었다. 입시지옥으로 변한 중고등학교, 취업학원이 된 대학교육. 인문학을 공부해 보았자 돈을 벌거나 승진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풍토. 심지어 인문학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특권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성찰이라는 본래의 정신을 놓아버리고 상아탑 안에서 안주한 채 삶의 현실과 거리가 먼 난해한 이야기만 주고받은 인문학자들의 잘못이 크다.


   노숙인들에게도 ‘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다


   어쨌든, 일반인들의 추측과는 달리 노숙인도 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맹자가 진심편상(盡心篇上)에서 “거처는 기상을 변하게 하고 먹고 입는 것은 몸을 변화시킨다. 사람이 거처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만 다 같이 사람의 자식이 아닌가.”라고 말한 것처럼 이들은 한사람의 인격체로서 변화와 성숙을 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구태여 사회교육이나,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들을 통해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과정인 ‘성 프란시스 대학’이 만들어졌다는 것만을 이야기하자.


   이야기가 여기쯤에 이르면 현실적인 질문들이 이어진다. “어떤 인문학을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묻는 것이다. 노숙인이 배우는 인문학의 과정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무언가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를 것이 없다. 교양과목인 철학, 역사, 문학, 예술사, 문화인류학, 글쓰기 등을 두 학기에 걸쳐서 배운다. 다만 학력수준을 고려하여 조금 적은 양의 독서와 글쓰기 과제가 부여되고 있으며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대화식 토론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혹자들은 “그들의 자세는 진지한가”를 묻기도 한다. 물론 강의 초반기에는 술 취한 상태로 참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토론문화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 익숙하지 않아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변해갔다. 진지해졌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이들은 성숙한 삶을 위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으로 칸트가 “교육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고 한 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빛과 외모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이 변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할 때쯤이면 꼭 한마디씩 묻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과연 그들은 사회복귀를 했습니까, 몇 사람이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까?”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만큼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을까! 교육은 교육일 뿐이며 성찰하며 스스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면 된다. 그리고 교육의 결과는 곧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기꺼이 그러한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준다. 이들은 짧은 시간에도 확연한 변화를 보인다. 먼저 초점이 없었던 이들의 눈빛이 변한다. 그리고 외모가 깨끗하게 변한다. 도서관을 이용하여 독서를 하고, 개인적인 자리에서도 학구적인 토론을 한다. 그리고는 이런 고백도 한다. “내 자신의 과거와 내면이 들여다보여 고통스럽다. 도중에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그만두면 나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다.” 그들은 졸업식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일자리를 갖고 사회에 정착하여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방송대에 입학을 한 사람까지 있다.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교육기회의 배제는 빈곤의 배경이자 결과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문교육은 이제까지 사회의 주변부에 머물던 이들이 시민의 대열에 들어서게 한다. 빈곤계층은 인문학을 통해서 ‘공적인 존재’(Public Beings)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인문학 교육, 그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 위 글은 교육개발원 교육포럼에 실린 글입니다.

수원시민신문(원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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