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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이위종 (李瑋鍾) 선생

박미순 기자 | 기사입력 2007/05/28 [00:32]

6월의 독립운동가 이위종 (李瑋鍾) 선생

박미순 기자 | 입력 : 2007/05/28 [00:32]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대한제국기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 이위종 선생(1877 ~ 미상)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7년 서울에서 태어나 주미공사로 부임한 부친 이범진을 따라 7세 때 미국으로 가서 소년 시절을 보내고 4년 뒤에는 유럽주재 공사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가서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 그는 영어·불어·로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하였다.

1905년 러시아 귀족의 딸과 결혼하여 러시아 여성과 결혼한 최초의 한국외교관이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은 각국의 한국공사관을 폐쇄조치하였으나, 이범진은 이에 불응 아들 위종과 함께 러시아 빼쩨르부르그에서 비공식적 외교활동을 지속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은 이준, 이상설과 함께 이위종을 헤이그에 파견하는 3명의 특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부친 이범진의 지원으로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얻은 뒤, 이위종은 헤이그에 도착 한국대표로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으나 일본 측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특사 일행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선언하였다.

7월 9일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이위종은 불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하였다. 그의 열변은 국제여론을 환기하는데 성과를 거뒀다. 이때 울분에 차 있던 이준이 현지에서 운명하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를 전후하여 영국과 미국 등 각국을 순회하며 한국을 위해 호소하였다.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국내에서는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였고, 이상설은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형이 선고 되었다. 이후 이위종은 블라디보스톡과 뻬쩨르부르그를 오가며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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