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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홍갑표 칼럼 | 기사입력 2015/06/13 [01:22]

"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홍갑표 칼럼 | 입력 : 2015/06/13 [01:22]
 [위 영상은 MBC보도내용. 게시일: 2013. 8. 21.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는 화학무기가 사용돼 천3백 명 넘게 숨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리아 반군은 정부군의 어제 화학무기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천3백 명에 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는 전면 부인했습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자주통일연구소에서 소개한 글입니다. http://fromfront.tistory.com/633]

▲ 홍갑표 회장     © 자주시보
 
 
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홍갑표 <민족정기구현회> 전 회장
  
 
들어가며
 
나는 세균전의 희생자다.
 
얼마 전 케블 티비 히스토리 체널에서 한국전쟁 시기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에 대하여 집중 방영하였다. 시청을 하다 보니까 그 시기가 바로 내가 염병(장티브스?)에 걸려서 사경 한 달을 견디고 겨우 몸을 추스릴 수 있었고 같은 병으로 이웃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와 일치하였다.
 
많은 미국인들이 세균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특히 극비리에 세균을 전단에 섞어 뿌렸다는 비행사의 증언도 있었다.
 
또 일본군이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내용도 히스토리 체널은 언급하고 있었다.
악명 높은 731 이시이 부대는 숱한 한국인과 중국인을 생체실험 대상인 마루타 해부를 통하여 세균 무기를 개발했으며 패전 이후 여기에 종사했던 자들이 미 점령군에 그대로 영입되어 미국의 세균 무기 개발에 참여했으며 이들의 일부가 미 군속으로 위장하여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시이 부대 소속 대원들은 전범 재판은 커녕 미국의 비호 아래 한국전 특수로 일본 혈액사업을 벌여 떼돈을 벌었고 일본 굴지의 제약회사로 발전했다.
 
또 뒤에 실은 韓國戰爭資料叢書(63-67)(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미국 정부의 공문서로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 미국무부가 작성하였거나 국무부에 접수된 다른 행정부서 및 재외공관, 개인, 전문가, 비평가들의 문서들을 집약한 것인데 이 글의 요약 부분을 읽고 내가 세균전의 피해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동네 사람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 생존하며 비록 이사를 갔다하더라도 거의 다 연락이 되고 있다.
 
아직도 미국이 세균전을 부인하고 은폐하려 한다면 이는 양의 꺼풀을 쓴 이리떼와 뭐가 다르랴.
 
당시 내가 머물렀던 곳은 둘째 누님 댁이 있는 현 경기도 양주시 회천 1 행정동 관할 봉양 법정동으로서, 2km 쯤 떨어져 있는 현 회천3 행정동 관활 덕정 법정동인 당시 회천면 덕정리 원잠동 집(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을 그냥 두고 누님 댁인 그 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곳이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기 좋은 철도 정거장과 면 소재지에서 떨어져 있고 들을 앞으로 둔 산록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는 조선 전기 이태조와 관련하여 국내 최대의 명찰인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과 북으로 이어지는 칠봉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내 초등학교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고난과 아름다움의 기억이 함께 깃든 곳이기도 하다.
 
내가 디지털 말에 2002년 6월 20일과 7월 1일에 색션에 선택된 나의 6.25전쟁 체험기(1)과 (2)의 필요부분만을 다시 게재하여 당시의 상황에 이해를 보태고자 한다.
 
이 글을 읽음으로써 내가 꾸며낸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또 자료를 첨부하고 내가 세균전의 희생자임을 반세기가 넘은 지금 발표하게 된 기회를 디지털 말을 통하여 알리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1
 
1950년 6월 25일 새벽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 조국의 허리가 톱질 당하며 낭자한 피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 의정부 아래 덕정리에 살고 있던 나는 아버지를 백 일만에 여윈, 당시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다.
누나는 영등포 공장에 가고, 어머니는 큰 누님 해산 차 서울 가시고 둘째 누님은 거리가 떨어진 칠봉산 밑에 살고 계셨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없어졌지만 봉우재(봉화재-지금은 밀어버려 없어지고 그 곳에는 봉우 아파트가 서 있다)는 제법 높아서 일대를 보기에 좋은 전망대였다.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 들고 이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생전 처음 듣는 포성과 저 건너 구덕정 신작로를 타고 길게 나타난 피난민의 행렬을 보고 있었다.
 
난리가 났다!
나는 혼자라는 공포에 질렸다. 외가는 등 너머 있었다. 외가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간다는 말도 없이 일찌감치 장롱 속 어머님이 두고 가신 몇 푼의 돈을 티셔츠 윗 주머니에 챙기고 초가 삼간을 뒤로 철길을 따라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철길은 모터카 몇 대가 가끔 탄알 같은 것을 싣고 내려가는 것 외에는 아직은 한가했다. 나는 딸기를 따먹기도 하며 서서히 의정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교통 정리를 하던 헌병이 오는 사람 모두를 초등학교 수용소로 들어가란다. 나는 기겁을 하여 왜 수용소로 가? 하면서 도루 집으로 가서 자고 내일 다시 올 요량으로 가던 길을 되돌려 덕정을 향했다.
 
엄상굴 다리 근방에 왔을 때 포성은 더욱 커지고 동네 사람들은 피난 봇짐을 싸서 지고 이고 모두들 의정부를 향하고 있었고 하늘은 소나기를 퍼붓고 있었다.
 
나는 겁이 나고 두려워 샛길을 통해 십여 리 되는 고주내 큰댁을 향해 뛰었으나 막상 도착해 보니 대문은 굳게 닫쳐 있었다.
 
그때 샛길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도롱이를 쓰고 구부정하고 가시는 큰어머니였다. 반가웠다. 큰댁과 동네 사람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다. 춥고 배고프고 다리가 아프고 졸려 왔다.
걷다가 한내 개울 뚝 아래로 내려가면 올라오기가 힘들었다. 감자라도 캐 먹고 싶었다. 동막골에 도착해 밥을 지어먹을 때는 제일 많이 담긴 밥 사발을 골랐다.
이튿날 일어나려 하니 뱃살이 땅겨 억지로 몸을 틀어 손을 집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라디오를 들은 사람들이 국군이 이미 개성서 300리를 쳐들어갔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거짓임이 증명되었다. 야포가 건너편 도봉산 자락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수락산을 넘어 퇴계원으로 가서 장위로 향했다.
 
같이 가던 사촌 큰 형님의 딸 손위 조카마저 떨어진 채 피난민을 따라 마냥 걸어가고 있었다. 누님 댁인 왕십리 안장사 동네로 간다 하나 길을 알 리가 없다. 그냥 가는 것이다.
 
그 때 길가에서 내 이종형이 나를 낚아챘다.
"어머니 우리 집에 계셔." 그는 알코올 중독자로 동네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였으나 내게는 정다운 형이었고 또 생명의 은인이다. 그는 피난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들어가 보니 동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어머니는 안장사(현 도선동 청련사) 누님 댁을 오가며 내가 이미 서울로 떠났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은 들은 터에 덕정리로 찾아 나선다고 하는 것을 이모나 동네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는 나를 껴안고 우셨다. 어머니는 부어 오른 내 발을 한없이 주무르고 계셨다.
그 날로 왕십리 안장사 큰 누님 댁으로 가고 이모 댁과 다른 사람들은 계속 피난길에 올라 우리하고는 헤어졌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동네 뒷산 일제 시대 파놓은 방공호에 담당하는 사람에게 집요하게 매달려서 결국 나만을 방공호에 겨우 밀어 넣어 놓고 누님 댁으로 돌아가셨다.
 
9남매 중 다섯이 죽고 남은 세 딸과 유일한 아들인 나. 이튿날 아침 세상은 바뀌었다.
 
붉은 완장을 찬 치안대원들이 나타나서 동무들 해방이 되었소. 수고하시오 이제는 잘사는 세상이 되었소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은 온통 파괴와 살육이었다. 끊어진 전기 전선줄, 무너진 건물에 흩어진 벽돌 더미 근방에 여기 저기 널려있는 시신들, 하늘에는 몇 대의 인민군 야크기가 서울 상공을 날고 있었다.
 
큰 누님은 광무극장 옆에서 조그만 오뎅 집을 하면서 극장 안에서는 매점을 운영하셨다.
누님이 챙겨준 오징어, 과자 사탕 봉지를, 양손에 들고 왕십리를 떠나 종암동, 창동을 거쳐 의정부 덕정리로 이어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땅을 보며 하늘을 보며, 나는 마냥 가고 있었다. 수많은 회향 피난민 무리에 끼어 의정부, 덕정 쪽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2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많은 인민군 병사들이 대오를 정비하고 행진해 오고 평복에 빨치산 행정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손을 흔드는 피난민들을 거슬러 서울 쪽으로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의 도봉산 입구 도로 양옆 구거 에는 시신 둘이 한 사람은 엎어져 있고 또 한 사람은 의자에 앉은 자세로 얼굴을 들어 눈을 뜬 채 하늘로 향하고 몸 여러 군데 총 창에 찔린 상태로 누워 있었다.
예외 없이 파리는 윙. 특유의 냄새는 코를 찌르고 버려진 기관총 박격포 등이 북을 향해 버려진 채 놓인 부근에 숫한 탄피들이 널려 있었다.
 
도로 양옆에 여러 구의 시신을 보면서 의정부를 지나 샘내 고개를 넘어 막 덕계리로 들어서는 순간 두 대의 무스탕 전투기가 신작로를 따라 저공 비행하며 덕정역 옆 일제시대 지어진 군수창고를 폭격하고 서울 쪽으로 나르면서 연속 사격을 가하고 사라졌다.
순간의 일이었다.
길옆 밤나무 밭 아래 몸을 던져 몸을 오그린 순간 나를 보호하려고 몸을 덮치고 있는 어머니의 베 적삼 사이로 늘어진 젖꼭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관포탄은 인간 생체 열을 관통 할 수 있다나.
한길에는 마차를 끌던 황소가 여러 방의 기관포탄을 맞고 네 다리를 허공으로 하고 쓰러져 있었고 주인은 달아나고 없었다.
 
비행기의 폭격은 거세졌다. 쌕쌕기(제트기)는 날쌔고. 프로펠러의 그라망은 좀 느리나 오랜 동안 폭격을 해 목표물에 뿌리를 뽑고 약간 작고 날렵하게 생긴 무스탕은 날쌘 편이었고 B29나 24는 고공에서 서서히 왔다 갔다 하면서 새우젓독 만한 폭탄을 똥누듯 내려 부으면 교량 철도는 말할 것도 없고 터진 곳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형성되었다.
 
기관포 사격이나 로켓포도 무서웠으나 북같이 생겨서 가블가블거리며 떨어지면 그 일대는 불바다가 되고 끈적거려 묻으면 떨어지지도 않는 네이팜탄이 더 무서웠다.
대개의 민가는 몽땅 이놈의 피해를 많이 보았다. 후에 이놈의 외피로 웅덩이에서 보트를 타기도 했다.
 
어느 날 나이가 열 여덟이었던, 둘째 누님의 아들 영만이는 친구 어머니의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연설을 들은 후 수건을 질끈 동이고 의용군으로 트럭을 타고 떠난 뒤 소식이 없었다.
워커라인인 낙동강 전투에서 폭탄을 삼태기로 떠서 뿌리는 것 같은 미군기 융단 폭격에 희생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산곡 어느 강변에 누워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후 칠봉소년단 화랑소년단이 조직되고 나는 좀 똑똑하고 노래 잘한다는 이유 하나로 저학년인데도 지도부장의 감투를 쓰고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회천면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내촌, 공회당(덕정 분교로 사용되던)에서 기만이 형과 그 애인이었던 쌍 가랑머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노래를 따라 배워 그것을 다시 저녁에 마당에 모깃불 피우고 멍석 깔고 동네 주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 -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위에 역력히 비춰 주는 거룩한 자국 아아…’
 
애국가 -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 금의 자원도 가득 찬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적기가 -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밑에서 선서하리라. 비겁한 놈은 갈려면 가라… 임화의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소년단 노래 - 빛나 오른 새 조선에 밝은 아침에… 기세도 높이 우리들은 민주소년 조국의 아들 딸, 가슴 펴고 일어나라 김장군 따라, 깃발을 흔들어라 소년단 깃발을 외쳐라… 소년단 만만세’
농민의 노래 - 불러라 노래 불러라… 논밭을 빼앗겨 삼십 육년간…’
 
이러한 일들은 비단 우리 동네 만의 일이 아니라 당시 북한의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에서는 예외 없이 일어난 것으로 어설핀 색깔론은 펴지 말기 바란다.
 
낙엽이 졌다. 가을이 되었다. 교교한 달빛이 비췄던가?
쿵쿵쿵쿵쿵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인천상륙작전,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을 한 여러 나라 군인들이 왔다.
이번에는 오대양 육대주… 평화의 사도… 유엔군의 노래를 불러야 했고, 공비 토벌로 떠나온 이내 몸이…나 혹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면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여 잘 자거라… 단장의 미아리 고개나 님께서 가신 길은 영강의 길이 옵기에 이몸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를 불러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갔다.
기만이 형도, 흥범이 아버지도, 구두쇠 아저씨도….
 
머리가 유난히 커 대갈 장군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성민이란 분은 갓 시집온 부인을 두고 동네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으로 가다가 며칠 후 되돌아 왔다.
그가 가기 전에 "나는 도마 위에 오른 고기예요!" 그러나 그가 인공 치하에서 한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고기예요가 한동안 유행했다.
 
동급생으로 나이가 서너 살 위인 소년단 면 위원장이었던 수남이가 총살되었다.
여성동맹 면 위원장으로 금시계를 탔던 요욕이 어머니도 내촌 시냇가 찔레 덤불 아래서 사살되었다.
축동 밖 집이 있었던 방직공장 누나 친구는 동네 일 봤다고 칼빈 총 개머리 판으로 손가락을 짓이김 당했다.
미군들의 사냥에 윤간을 당한 등 넘어 한 누나는 양잿물을 먹다 실패하여 호스로 음식물을 넣어야 했다.
 
3
 
다음해 겨울 덕정리 일대의 소개 명령이 떨어졌다. 적을 유인하여 원자탄을 쓸 것이니 살고 싶으면 38선으로부터 50리(?)밖으로 소개하라는 통보를 받고 동네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동네는 텅 비우게 되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어머님은 해소 병이 악화되어 퉁퉁 부으셨고 촌보를 움직이지 못하셨다.그래도 횃대를 잡고 걸음 연습을 하시면서 좀 나으면 나가자고 하셨다.
 
빈 동네를 지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개도 짖지 않았다.
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나셨다. 칠봉산 밑 봉양리 현암동 거무네미 누님이 오셨다. 그는 사력을 다하여 짝짝 미끄러지는 시오리 빙판 길을 한번 쉬지도 않고 주내면 덕고개 안 동네 큰댁으로 모셨다.
어머니를 모실 피난을 포기한 10촌 누나가 나타나자 외아들인 나는 피난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고집과 주위의 권유로 송산까지 나갔으나 중국지원군의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결국 저녁에 조명탄을 낮같이 밝혀놓고 폭격과 포격을 가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흰 홑이불을 망토 처럼 두른 중공군(중국 인민 해방군 지원군)이 왔다. 우리가 돌아올 때 근방에 폭격을 당했으나 피해자는 없었다. 그들은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시신을 묻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땅을 파는데 곡괭이가 텅텅 튀었다. 어느 날 갑자기 쌕쌔기(제트기)가 마을로 덮쳤는데 방공호 속으로 뛰어든 우리는 무사했으나 우리가 있던 방 옆 마루에 놓였던 뒤주를 기관포탄이 관통했고 옆집 할머니 벌되는 분이 허벅지 관통상을 입으셨다. 그분은 호박 삶은 것과 소금을 섞은 즙을 상처 부위에 처매고 나셨다.
 
우리 동네는 홍씨 집성촌이었다. 길, 마당에는 기관포탄이 언땅을 뚫지 못하고 강철 탄환만 박히고 구리 외피가 널려져 있었다. 실탄 사격은 따따따가 아니고 마른나무더미를 거대한 힘으로 일시에 짓이기는 소리가 난다. 아지직!아지직! 한다고나 할까?
이 경험으로 4.19경무대 공격 시 실탄 사격을 즉각 감지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칠봉산 밑 누님 댁으로 왔다. 나는 비행기 공포증과 방공호에 물이 차 상한 곡식 밥으로 식욕을 잃고 있었는데 이 곳으로 온 후 알타리 김치 된장찌개에 입맛을 찾고 이 동네는 비행기가 와 사람들이 나다니고 있었다.
 
아마 공군 당국도 민간인이 있다고 알고 있어 폭격이 고려 된 것 같았다. 중국 지원군들은 부대 이동이 주로 도보였다. 그래서 누빈 방한복과 여러 종류의 신발은 튼튼하고 따뜻했다.
주요 수송수단은 노새가 끄는 마차였다. 그들은 학습 등을 위한 만년필이나 손전등이 잘 보급되었고 우리들은 장수연 담배로 그것들과 맞바꾸어 사용할 수 있었고 국군이 버리고 간 권총을 챙겨 논 애들의 수입은 더 짭짤했다.
 
주로 밤에 행군했다. 어둠이 깔리면 있던 부대는 이동하고 새 부대가 왔다. 노새 울음소리 마차 바퀴소리 ,그리고 허리에 찬 물 컵과 수저 호크가 부디쳐 절겅거리는 소리 그리고 각 집으로 숙소를 배정하는 지휘관의 낯선 언어...
 
그들의 무기는 노획한 미제무기가 꽤 있었다. 모택동의 말 "우리의 무기고는 바로 미국에 있다" 주인집 여자들은 아랫목으로 그들은 윗목으로, 그래서 그 경계선은 당연히 남자인 내 몫이 되었다. 심지어 칫솔 치약까지 미제가 많았다.
 
밤에는 문을 가리고 전대에다 넣을 미수 가루나, 간단한 과자를 굽거나 튀겼다. 나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집어먹곤 했다. 쌀은 몰래 땅에 묻는데 총 창으로 찔러 잘도 찾아냈다. 붉은 돈(북한 전시 화폐)을 주기는 하나 그것으로 교환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치 된장 간장은 나누어 먹었다. 물론 돈을 주고..달빛이 교교한 한밤 내 옆에 자던 병사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울고 있었다. 쌍 가랑머리 예쁜 여자의 사진 ..손발언어로 의사 소통, 그는 북경대학 의과 출신이고 그 여자는 간호사 ....
 
시아버지와 며느리만 남은 집에 들었던 한 병사는 밤에 자다가 며느리의 치마꼬리를 잡았다가 고발되어 저녁 회의인지 군법회의인지 동방홍(모택동 찬가)등의 노래를 부른 후 ....등등광에다 가두고 밥을 굶기는 벌을 주는 것을 보았다.
광에는 열쇠도 안 잠갔는데 그는 나오려 하지도 않았다. 눈이 하얗게 덮이고 그들의 모자 옷의 안쪽은 하얗고, 비행기가 뜨면 하얀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훌륭한 대피.
밤이면 어떤 이는 앞밭에 쓰러져 있던 꽁꽁 얼은 국군의 시체를 일으켜 세워 한 방 치는 경우도 목격되었다. "너희들은 국군이 오면 그만이야 알았어?"하니 그 병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윗동네 가보니 그 사람이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게 아닌가. 그는 통역관이었다. 나를 본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수통을 벗어 걸어 주고 머리를 만지고 한번 웃더니 가 버렸다. 나는 혼이 나는 줄 알았다.
 
얼마 있다 동네로 포격이 가해졌다. 멀리 가는 포탄 소리는 부웅... 아니면 삐 융..하는 소리가 나지만 근처로 떨어지는 소리는 쓔 ㅅ 챵!이었다.
용인 선까지 밀렸던 전선을 다시 북으로 밀고 하는 과정을 거쳐 그들은 갔고 국군이 다시 왔다. 


 
 
4
 
온 동네를 장 티브스가 휩쓸고 나도 예외 없이 걸려 되걸린 것까지 합쳐서 꼭 한 달 만에 간신히 살아 남았다.
 
후에 사람들은 미국이 세균전을 했다고 주장했다. 의료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기적 같은 회생이었다.
나무 한 짐하고 동지팥죽 먹은 후 주워온 온 수류탄에서 분리해 낸 뇌관에 불 붇혀 던지다. 손가락 셋을 잃었다.
 
벌말 춘향이는 한 손목을 잃었고 엄상굴(고암리) 우리 반 이었던 애는 안 마당에서 지뢰를 안고 두드리다 터져 완전 분해되어 고깃점이 외양간 기둥에 너덜너덜 붙었다고 했다.
 
나는 계속 누님댁에서 누님과 손위 조카딸과 피난 가신 자형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던 중 51년 초봄인가 별안간 우리 동네를 염병(장 티브스로 알고 있슴)이 휩쓸었다.
기억이 잘 안나지만 당시 어른들은 어디로부터 전염되었는지 알겠지만 전염경로는 자세히 모르겠다. 확인을 요하는 것이다.
 
이 병의 특징은 내게는 견딜 수 없는 고열과 두통이다. 장의 병이니 정상 변일 리도 없다. 우리 집에서는 이상하게 나 하나만 병에 걸렸고 전염병을 알고도 그랬는지는 몰라도 친구들은 나를 찾아와서는 "도화가 죽었단다." "도응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등등 사망소식들을 전했다.
 
낮에는 두통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밤이 되면 좀 머리가 서늘해지곤 했다.
 
51년 봄 중국 인민해방군 지원군의 춘기공세 후, 늦봄 전쟁 직후라 의료기관은 없었고 환자들은 자기투병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누님은 어디서 들었는지 꿀을 구해서 먹이는 둥 온갖 노력을 기울이셨다. 한 열흘쯤 지나서 열이 내리고 걸을 수 있었는데 보리 찬 밥에 열무김치 국을 말아서 맛있게 먹은 것이 탈이었는지 또다시 쓰러졌다.
 
사경 열흘쯤 후에 다시 일어나니 머리가 빠지고 몸은 검불처럼 말라 있었다. 모든 채소들, 모든 세계가 녹색으로 변하고 오디가 익어서 정신 없이 따먹고 또 보리 찬밥에 열무김치 국, 그래서 또 쓰러졌다.
 
이것을 세 번 되걸림이라 한다. 병후 몸조리에 기초지식도 없었던 당시로서는 있음직한 일이었다. 투병 마지막 날 발병 한 달이 거의 될 무렵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특히 한낮은 성할 때의 시간 개념이 상대적으로 하루가 수 개월이었다. 까마득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웃집 아주머니와 누님은 머리에 끈을 고정시키고 끈 끝에 추를 달고 머리를 저어 돌리기 시합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님은 자꾸 목을 앞으로 숙여서 추가 내려지곤 했다. 그러니 나는 자꾸 누님 턱을 위로 떠밀며 턱을 왜 안올리느냐고 되 뇌이니 누님은 답답할 수밖에, 거기는 아무도 없었고 누님이 나를 무릎에 나를 뉘이고 사그러져 가는 동생의 최후를 내려다보고 계셨던 것이다.
열이 나서 체온이 오르면 추위를 느끼지만 내가 더워서 몸을 뒤틀 때는 내 체온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고 누님이 말씀하셨다. 느낌은 반대인 것이다. 그러니 염병 앓는 사람들이 웅덩이로 뛰어 든다고도 했다.
 
흑백의 영화스크린이 나왔다. 탱크 여러 대가 나뭇가지를 꽂고 질주하는가 하면 방 안인데 어두컴컴한 곳에 여러 부처님들이 여러 개의 독립된 좌대에 앉아 있는데 방 전체가 서서히 회전하는 것이었다.
 
이미 나는 새 까만 배냇똥(배안의 똥- 사람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본다는 똥)을 싼 후였고 누님은 일어서 부엌으로 가셔서 막 끓어오르는 보리밥 국물을 떠다가 내 입에 흘려 넣으신 것이었다.
 
나는 땀을 쫙 흘리고서는 머리가 맑아지면서 도저히 혼자 일어날 수가 없었던 몸을 벌떡 일으킨 것이었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나? "염병하다 땀 통이 끊어 질 놈!"이라는 욕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땀을 흘리면 산다는 얘기다. 
 

 
 
세균전과 관련된 자료
 
세균전과 관련된 자료로 가보자. 자료를 읽으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글 마지막에 아직도 이 문제가 유야무야 되었다고 했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를 비롯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 일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증거 이전에 산 증인들이 수두룩하다.
 
내 나이 이미 만 64세(이 글을 쓸 2003년 당시-편집자 주) 어려서 일제 말기를 겪었고 6.25전쟁과 4.19, 5.16을 겪었다. 동족 상잔의 처참한 현상을 톱질의 한 가운데서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그 뒤에 많은 것들을, 그러나 이 땅의 자주화와 민주화와 평화통일의 길이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짐은 무엇 때문일까?
 
 
<참고자료>1.韓國戰爭資料叢書(63-6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이 문서는 미국 정부의 공문서로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 국무부가 작성하였거나 국무부에 접수된 다른 행정부서 및 재외공관, 개인, 전문가, 비평가들의 문서들을 집약한 것이다
 
1952년 2월 24일 평양과 북경방송은 1월 28일과 2월 17일 사이에 미국이 세균을 지닌 많은 양의 곤충을 북한지역에 조직적으로 투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전 세계 공산권의 신문에 게재되었다. 1951년 당시 북한 지역에는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만연하였으며, 이듬해에 다시 전염병이 창궐한다 해도 공산 측으로서는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엔군 측은 즉각 3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산군 측의 세균전 주장을 강력히 부인하였다. 그러나 공산군 측은 3, 4월에 들어 유엔군 측이 병균에 감염된 거미, 벼룩, 탄저병균을 전염시키는 갑충과 들쥐를 투하하였다고 발표하면서 계속적으로 선전공세를 취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공산군 측의 세균전 주장이 처음에는 선전에서 이제는 비난으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적은 국내 및 세계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선전을 조작할 가능성이 있고, 그들 영토 내의 전염병을 은폐하기 위해 연막치장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리고 세균전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세균전의 실시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하였다.
 
한편, 3월 14일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는 미국이 세균전을 전개했다는 비난성명을 발표하였으며, 20일에는 중공의 신화사통신이 세균전의 증거 사진을 제시 보도하자 유엔군 측은 공산군 측의 주장이 증거제시가 없는 사실무근한 주장이라고 부인하였다.
 
또한 사태수습을 위해 국제적십자사에 진상조사를 의뢰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공산군 측은 국제적십자사가 미국의 영향 아래 있음을 들어 이를 거부하였다. 공산군 측의 세균전 관련 선전은 일시적으로 잠잠해졌으나 포로폭동이 확대되면서 다시 제기되었다.
 
미국의 유엔 대표 그로스는 6월 18일 세균전 비난에 대한 조사를 위한 결의안을 유엔안보리에 제출하였으나 소련에 의해 거부되었고, 7월 중공에 의해 현지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처럼 1952년 여름 공산군 측은 세균전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켜 유엔군 측을 궁지로 몰아갔으나 점점 세계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유야무야 되었다.
 
결국 공산군 측의 세균전 주장은 대내적인 전염병의 만연을 유엔군 측의 세균전의 결과로 몰면서 국내전열을 정비하고자 의도한 것이었다. 또한 세계여론을 이용하여 당시 진행 중인 휴전협상에서 유엔군 측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심리전의 일환이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위 자료는 한 단서에 불과하다. 발굴된 자료가 많고 앞으로의 발굴될 자료도 수 없이 많을 것으로 안다.
 
이 문제는 다만 우리 민족의 희생자가 얼마였다는 문제보다도 세계도처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현재도 저지르고 있는 미국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만천하에 밝히고자 함에 있다.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없도록 전 세계의 양심세력은 단결된 힘으로 미국의 군산매파 신자유주의 다국적 자본 신보수들에게 족쇄를 채워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2. 장티브스와 유행성 발열열의 임상 증세
 
1) 장티브스의 임상증세
 
특별한 증세가 없는 데도 고열이 4주간 정도 계속되고, 전신이 쇠약해지는 질환이다. 연령적으로는 청장년의 사람에게 걸리기 쉽다.
 
1~2주 간의 잠복기 후에 몸이 나른하고 식욕이 없어지며, 두통·요통·관절통 등이 일어나고, 오한과 함께 발열한다.
 
열은 하루하루 높아져서 5,6일이면 40℃ 전후가 된다. 소장에 병변이 생기나 설사가 나는 일은 적고, 오히려 변비가 되는 경우가 많다. 발병 제2주에는 40℃ 전후 고열이 계속되고 지라나 간이 부어서 다소 커진다. 가슴·배·등의 피부에 장미진이라고 하는 지름 2~4mm의 담홍색의 발진이 5~30개가 드문드문 나타난다.
혀는 황색 또는 갈색의 두꺼운 설태(舌苔)에 덮이고 식욕이 없어진다. 합병증으로서는 기관지염에서 시작하여 폐렴을 일으키는 수가 있고, 중증일 때에는 귀가 멀고 의식이 혼탁해지는 수도 있다.
 
발병 제3주에는 열이 높고 아침 저녁의 차가 차츰 커진다. 식욕이 나고 병이 회복되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위험한 합병증인 장출혈을 일으키기 쉽다.
 
발병 제4주가 되면 열은 아침 저녁으로 크게 오르내리면서 차츰 내리기 시작하고 1주간 정도이면 평열이 되어 완쾌된다.
 
2) 유행성출혈열의 임상증상
 
국내에서는 1951∼53년 간 한국전쟁 중 UN군에서 약 3,200명 이상의 유행성출혈열 환자가 발생하고 수백 명이 사망함으로써 학자들이 관심을 두고 원인 규명에 나서게 되었다.
1976년에 제2종 법정전염병으로 지정된 바 있으며, 매년 가을철에 발생하는 급성 열성질환의 4∼18%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환자의 대다수가 10월부터 1월까지의 대유행기에 발생되며, 5∼7월의 소유행 시기에도 소수의 환자가 발생되나 점차 감소되고 있다.
잠복기는 9∼35일 정도로 평균 약2∼3주 정도이며 급성으로 발열, 출혈경향, 요통, 신부전이 특징으로 임상 경과로는 5기로 나눌 수 있으며,
다음과 같다.
 
발열기(3∼5일):
갑자기 시작하는 발열, 권태감, 식욕 부진, 심한 두통 등이 나타나고 복통, 요통, 얼굴과 몸통의 발적, 결막 충혈, 출혈반 등이 차차 발생한다.
 
저혈압기(수시간∼3일):
전신증상이 지속되고, 해열과 동시에 혈압이 떨어져 불안해 보이며, 심하면 착란, 섬망, 혼수 등 쇼크 증상을 보이며, 심한 단백뇨, 빈뇨가 나타나고, 혈소판 감소, 백혈구 증가, 혈뇨, 토혈, Hematocrit 상승 등의 출혈 경향이 나타난다.
 
핍뇨기(3∼5일):
혈압이 정상 혹은 떨어지며 오심, 구토, 핍뇨, 질소혈증, 전해질 이상(K 증가), 때로는 뇌부종, 폐수종도 볼 수 있으며, 반상 출혈, 자반, 위장관 출혈이 현저해 지고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
 
이뇨기(7∼14일):
신기능이 회복되는 시기로 다뇨(3-6ℓ/일)가 동반되며, 심한 탈수, 쇼크, 폐합병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
 
회복기(1∼2개월):가끔 다뇨가 지속되거나 야뇨, 빈혈 증상이 있다. 


 
 
 
마치며
 
이 글은 십 몇 년 전 글이다. 
그런데 지금 미군의 탄저병균 운운하는 기사는 메르스의 소동 속에서 묻혀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이 문제야 말로 우리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야 할 문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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