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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능은 방장산 밑에 있었다"-"중국의 방장산이 한반도 속의 지리산으로 둔갑했다"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6/29 [08:31]

"수로왕능은 방장산 밑에 있었다"-"중국의 방장산이 한반도 속의 지리산으로 둔갑했다"

박병역 위원 | 입력 : 2007/06/29 [08:31]

 
[제13편] 현재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위치한 구지산(龜旨山)에 가야의 시조 수로왕능이 있습니다. 또한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王山) 아래에 가야국 제 9대 구형왕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효종 원년(서기 1650)에 탄영(坦瑛) 스님(僧)이 저술한 왕산사기(王山寺記)에서 가야국 수로왕능과 제 9대 구형왕묘는 방장산(方丈山:지리산) 밑에  있다.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능과 제 9대 구형왕 묘는 경남 김해시 서상동의  구지산(龜旨山)이 진짜인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지리산(智異山)이 진짜인가?

▲     © 박병역 위원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지리산(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산100의 지리산 천왕봉)

[1]. 王山寺記(왕산사기)
山陽縣之西隅, 方丈山東麓有山 曰王山, 有寺曰王寺, 上有王臺[3], 下有王陵, 故曰王山, 知守護陵墓故王寺, 寺本王水晶宮也, 陵乃駕洛國第十葉仇衡王所예之玄宮也 蕭梁大通四年, 新羅眞興王, 來攻于駕洛, 駕洛仇衡王, 不忍以土地傷民, 遜國于新羅, 降爲金官郡都督, 後井與其食邑而舍之, 來居于此, 因卒而葬之, 累石爲邱, 輿地王山誌曰 山中累石爲丘, 四面有層級, 俗稱王陵云者, 是也. 

  왕사(王寺)는 산양현(山陽縣) 서쪽 모퉁이의 방장산(方丈山) 동쪽에 있는 록산(麓山)을 왕산(王山)이라 하고, 절을 왕사(王寺)라 한다. 방장산(方丈山) 위에 왕대(王臺)가 있고, 산 밑에 [수로] 왕능(王陵)이 있기 때문에 왕산(王山)이라 한다. [고려의 금관주 지사(知事) [탄영(坦瑛)]은 왕능을 수호하는 승려(僧侶)이기 때문에] 왕사(王寺)라 했다. 왕사(王寺)는 본래 수로왕이 사용하시던 수정궁(水晶宮)이다. 왕능은 가락국(駕洛國)말엽 제10대 구형왕은 [수정궁(水晶宮)]을 현궁(玄宮)이라 했다.

소양(蕭梁) 중대통(中大通) 4년(532) 신라 법흥왕이 가락을 침공해 오자 가락의 구형왕은 국토로 말미암아 백성을 상하게 함은 참을 수 없다 하시고, 나라를 신라에 손양(遜讓)하여, 금관군 도독(金官郡都督)으로 강등되었다. 뒤에 그 식읍(食邑)을 모두 주어버리고, 여기에 와서 거처하시다가 세상을 여의시므로 인하여, 장례하고 누석(累石)이 쌓여서 구릉(邱陵)이 되었다. 동국여지승람 왕산지(王山誌)에 말하기를 『산중의 누석이 구릉이 되고, 4면(四面)에 층계가 있는데 세속에서 왕능이라 일컫는다』고 한 것은 이것이다.

其後 王太子(王孫) 大角干舒玄, 捨宮爲寺, 王孫 大將軍興武王庾信, 追封首露王廟於王臺, 爰立仇衡王祠於玆寺, 所以薦祖父冥路, 奉香火之願刹[10]也. 因侍陵七載, 築臺習射, 故今寺右, 有金將軍射臺云,新羅三十法敏, 有制曰 朕乃仇衡王之外孫, 遣中使, 率匠石, 儼潔其祠祀之儀, 重新자寺, 特封近處三十頃田, 以奉香火之資,其後, 王陵久荒, 禪宮亦廢物不恒悴. 得時以榮, 道不終否, 得人以興故 高麗神宗四年, 下旨州郡, 重修王陵, 兼葺王寺, 及我 宣廟黑龍之歲. 靑衣之亂, 玆山寺墓, 沒入夷蕩, 金田巳灰, 垠악猶存, 但聞嶺猿哀嘯. 谷鳥悲鳴而己,

그 후 왕손 대각간(角干) 서현(舒玄)은 [김유신]의 아버지이다. 왕손 [김유신]은 수정궁을 버리고, 왕산사로 삼았다. 왕손 대장군 김유신을 흥무왕에 추봉하고 수로왕묘(首露王廟)에 왕대(王臺)를 쌓았다. 마침내 자사(玆寺)에 구형왕의 사당을 세워 조부의 명로(冥路)를 빌고 향불을 피워 기원하던 사찰(寺刹)이다. 7년 동안 능을 모시면서 축대를 쌓아 활쏘기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 왕사 오른편에 김유신 장군 사대(金將軍射臺)가 있다고 한다.

신라 30대 법민왕(文武王)은 조서를 내려 『짐은 구형왕의 외손이다』하고, 사자를 보내어 석공(石工)을 거느리고, 사당의 제의(祭儀)를 정결하게 하고, 절을 중수하고, 근처 밭 30경(頃)을 바쳐서, 향화(香火)의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그 후 능은 오랜 세월로 황폐화되고, 신궁(禪宮)건물 역시 항상하지 못하고 폐허가 되었다. 때를 얻으면 번영하고, 도(道)는 끝내 비색(丕塞)하지 않으므로 사람은 때를 만나면 흥왕하기 때문이다. 

고려 신종 4년(1202) 주군(州郡)에 교지(敎旨)를 내려서, 왕능을 중수하고 겸하여 왕사(王寺)도 고쳤다. 우리 고려 선조(宣祖)는 임진(1592) 왜란 때 자산(玆山) 능묘의 왕사(王寺)에 오랑케(왜놈)들이 들어왔으나 소탕하여 몰살되었다. 세월이 흘러 절터는 아직 남아서 다만 산 짐승들만 애타게 울고, 새 짐승이 슬피 울 뿐이다.

順治七年[15], 僧徒又爲重建玆寺, 移埋廟主於他處, 換置佛軀於王廟, 旣訖, 沙門法永, 袖其寺墓舊蹟, 淸記于余, 不敢辭詞薄, 謹按本記, 山寺之以王名者, 乃首露王建廟之地, 仇衡王遜居之址, 興武王所창之寺, 新羅文武王所封之山, 高麗神宗大王重建之處, 上有王臺, 下有王陵, 中有王之畵像. 遺衣及所用弓劍之故也. 

 순치 7년(1650) 승도들이 또 다른 자사(玆寺)를 중건하여, 위패를 이곳에 옮겨 묻고,  왕묘(王廟)에는 부처(佛)로 바꾸어 두었다. 공사를 이미 마치고, 중 법영(法泳)이 그 절과 능의 옛 문적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기사(記詞)를 청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본기(本紀)를 살펴보면 왕산사(王山寺)로 이름한 것은, 수로왕묘(首露王廟)를 건립한 지역이며, 구형왕이 은거하신 터이요, 흥무왕이 창건한 절이요, 신라문무왕이 추봉된 산이며, 고려 신종 대왕이 증건한 곳이다. 방장산(지리산) 정상에 왕대가 있고, 산 밑에는 왕능이 있고 중간에 왕을 그린 화상이 있고, 사용하시던 유의(遺衣) 및 활과 칼이 있는 연고지이었다.

古者, 駕洛諸王遺蹟, 羅麗所賜之物甚多, 若王陵本蹟曰, 婆娑墓中. 舍衛之白玉猶有, 祗桓寺裡. 須達之黃金尙存, 斯一句己知矣, 今則皆失於兵火, 只有二幅畵像. 一件天翼, 두弓殘劍客一, 是亦子孫散四, 不能守護, 故命藏於木函中, 以待百世之後也.

옛날 가락국 여러 왕의 유적과 신라, 고려에서 보내준 보물이 매우 많았다. 왕능본적(王陵本蹟)에 대략 말한 것처럼 [신라 제5대]『파사익왕묘(婆娑匿王墓) 중에 백옥(白玉)보다 오히려 지환정사(祗桓精舍:지원정사(祗園精舍)의 일화가 더 유명하다.

즉 억만장자(億萬長者) 수달(須達)이 [신라 제5대 파사익왕]의 지타(祗陀) 태자의 동산을 황금으로 깔았다는 전설이 아직도 전하고 있다. 이 한 구절로 [한국인은 석가세존이 가락국(신라)에서 설법하신 진실]을 이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난리에 다 잃어버렸고, 다만 두 폭의 화상과 한 벌의 왕의(王衣)와 좀먹은 활과 부서진 칼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이것도 또한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호할 수 없으므로, 나무궤에 간직하여 백세의 후일을 기다리게 할 뿐이다.


[洪儀泳博士 王山尋陵記] [홍의영 박사가 지은 왕산 심능기]
往年戊午, 嶺南大旱 自春. 至夏季, 竟無點滴, 邑儒閔景元, 南士之望也, 與朋주潔齋전羞, 爲文求雨于陵之下, 未崇朝而大雨驟至, 閔滯雨不能歸, 館於王山寺, 與寺僧, 說其靈異, 詢其古蹟, 僧曰古蹟誠多, 秘不敢發, 强以後, 出古木函, 경휼甚嚴, 遂排而啓之, 有沙門坦瑛山寺記一卷, 瑛乃百年前名釋(中略)

작년 무오(1798)년에 영남지방의 큰 가뭄으로, 봄부터 늦여름까지 끝내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산청읍(山淸邑) 유생(儒生) 민경원(閔景元)은 영남의 명망 있는 선비였다. (6월4일) 친구들과 더불어 정결히 재계하고 제물을 차례 놓고 글을 지어 수로왕능 앞에서 비를 빌었는데 새벽에 큰비가 쏟아지므로, 민경원은 비에 막혀 돌아가지 못하고 왕산사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승려들과 함께 신비함을 말하면서 『고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승려들은 말하기를 『고적은 실로 많으나, 비밀이라서 발설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강력히 요구한 후에 나무궤를 내 놓기에 자물쇠와 장식품으로 매우 엄밀히 만들어 마침내 이를 비틀어 열었다. 중 탄영(坦瑛)이 지은 왕산사기(王山寺記)가 있었는데, 탄영은 곧 백년전의 명승(名僧)이었다.(중략) 

當時奇偉之蹟, 受後昆無窮之饗也, 鳴呼異哉, 諸金遂以實狀告之, 道伯及本졸, 莫不欽聳稱奇, 禁其芻牧, 新其塋域, 去來文簿, 鄭重讚揚, 皆不可記焉. 十世仇衡王… 正廟戊午, 因祈雨, 始顯靈, 自營邑. 轉移京司, 當저癸亥, 八路子孫, 改築荒園, 創建陵寢. 講堂. 廊舍. 門樓·

당시 기이하고 거룩한 고적은 후손들의 무궁한 흠향을 받게 되었다. 아! 신비로운 일이다. 여러 김씨들이 마침내 실상을 보고하니, 관찰사 및 산청현감은 귀를 높이면서 신기하다고 일컬었다. 나무하기와 소를 금하고, 영역(塋域)을 새롭게 단장 하도록 하였다. 去來文簿[거래문부=가락3왕사적고 권六 왕세계(駕洛三王事蹟考 券六 王系 : 정조22년(1798)조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정중한 찬양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가락국 10대 구형왕… 정조 무오(1798)년의 기우제로 말미암아 비로소 신령스러운 자취가 나타남으로, 본읍과 관찰부에서 서울에 보고하였다. 조선 순조(純祖) 계해년(1803)에 팔도(八道)의 자손들이, 황폐한 능원을 고쳐 쌓고, 능침과 재실과 문루(門樓)를 창건하였다.
     왕산사기(王山寺記 終) 
    僧 坦瑛著書(승 탄영 저서)

[註]=> 중 탄영(僧 坦瑛)은 효종원년(서기 1650)에 왕산사기(王山寺記)를 지은 승려이다. 숙종 13년(청나라 강희26년:1687) 방호산인 형곡당 복한(方壺山人 荊谷堂 復還)이 수정암기(水晶菴記:왕산사의 개칭)을 지었을 때는 그의 문인(門人)으로써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가야국 제 9대 구형왕묘가 소재한 왕산(王山)은 지금 경상남도 산청군 서쪽 20리, 곧 금서면 화계리에 왕산이 있다. [출처 :김해김씨족보 글쓴이 : kimheakim 참조정리] 

[2]. 3신산(三神山)은 한반도 속에 없었다.
중국 전설에 의하면 동해(東海)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방장산(方丈山),봉래산(蓬萊山),영주산(瀛洲山)을 3신산(三神山)이라 한다. 즉 중국 동해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3신산을 조국을 배신했던 이병도는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智異山)이고, 봉래산은 금강산이고 영주산은 한라산이다. 라고 3신산(三神山)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어 임의대로 추정하여 주석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엉터리 지명인가? 본래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신라, 가야, 백제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진실을 밝히는 결정적 입증서(立證書)입니다. 

[3]. 일제에 의해 가짜로 만들어진 방장산 대원사
호남의 신령스러운 세산이 있는데 그 삼신산은 지리산, 무등산 그리고 방장산이다. 또 호남 서해안 지방에서 부르는 삼신산이 있는데 영주산, 변산, 그리고 방장산이 여기에 속한다.

▲     © 박병역 위원

방장산(方丈山)은 삼신산(三神山)중의 하나인 지리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전남 고창과 장성. 정읍 경계선인 방장산은 전남 구례군과 전북 남원시,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咸陽郡)에 걸쳐 폭넓게 걸쳐 있다. 지리산(智異山)을 방장산(方丈山), 두류산(頭流山)이라하며, 삼신산(三神山) 중에 한 산으로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삼신산은 중국 동해의 발해만(渤海灣)에 있었다
삼신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영주산·방장산의 세 산을 이르는데 그 유래는『사기(史記) 열자(列子)』에서 비롯된다. 『열자(列子)』에 의하면 동해(東海)의 발해만(渤海灣)에 삼신산(三神山)이 있었다. 동쪽 수억만리에 오신산(五神山)이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만리이며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이 늘어서 있고, 주옥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 그 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선인(仙人)들로서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고 한다. 오신산은 본래 마치 큰 거북등에 업혀 있는 형상이었으나 뒤에 세월이 흘러 두 산 중에 5신상은 허물어 없어지고 삼신산만 남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삼신산은 발해(渤海) 중에 있으며 인간세계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사람이 다가서면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쳐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일찍이 다녀온 사람들에 의하면 그 산에는 많은 선인(仙人)들이 있고 불사약도 있다고 전래되고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BC 3세기 전국시대 말, 진시황(秦始皇)은 신선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방사(方士) 서불을 시켜 소년 소녀 수천명을 이끌고 불사약을 구하러 동해로 보냈으나 서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이때 진노(震怒)한 진시왕은 신선도(神仙道)를 신앙했던 신도(信徒)들과 유생(儒生)을 포함한 460여명을 수도인 함양에 흙구덩이를 파고 파묻어 죽인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은 유명합니다.

기원 전 218년, 진시왕(秦始王)의 진(秦)국의 수도가 바로 함양(咸陽)이다. 하남성(河南省) 양무현(陽武縣) 남쪽. 대하(大河)의 물줄기가 화북성의 기름진 황토지대를 흐르다가 물길을 바꾸어 사라지면서 남긴 넓은 퇴적층이 모랫벌이 되었다. 세월의 비바람에 깎인 크고 작은 모래 언덕들이 마치 물결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하여 사람들은 그곳을 박랑사(博浪沙)라 불렀다. 박랑사에서 함곡관(函谷關)을 빠져나와 함양에 이른다.

북부여 해모수 재위 B.C.219년 한(韓)나라 張良(장량)의 자객으로 선발된 창해(滄海)역사 黎洪星(여홍성)은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하남성 동남쪽을 유람 중인 진시왕정을 박랑사에서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만 박살냈다. 해모수 재위 31년 임진(B.C.209년), 진나라의 농민반란 지도자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켜 장초(張楚) 왕이라 칭했다.

이때 진시왕의 압정에 고통 받던 농민들이 농민반란 지도자 진승(陳勝)에게 호응하여 지방관을 살해하고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하고 함양(咸陽)으로 육박하였다. 이때 진승의 봉기에 호응했던 반란군 중에서 유력한 세력은 강소성 패군(沛郡)의 풍현(豊縣)에서 농사를 짖고 있던 농민의 아들 유방(劉邦)과 강소성 부근의 오중(吳中)에서 일어난 항우(項羽)이었다. 병력에서 우수한 항우가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먼저 장악하여 진시왕궁의 보물과 미녀를 약탈하고 궁전을 불태워버렸는데 그 불길이 3개월이나 계속되었다. 한다.

B.C.202년 유방의 군대가 해하(垓下:안휘성 영백현)에서 항우를 포위하자 탈출하던 항우는 오강(烏江:안휘성 화현) 나룻터에 이르러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유방은 B.C.202년 2월 황제의 재위에 오르니 이로서 한(漢)나라가 성립하였다. 유방이 죽은 후에 고조(高祖)라 불렀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했다 하였으나 이때 한(漢)나라는 겨우 15군(郡)에 불과하였다. 

중국의 방장산이 한반도 속의 지리산으로 둔갑했다.

한(漢)나라를 창업한 고조(高祖:유방)는 성군(聖君)인가? 천하(天下)를 통일한 대국인가?
또한 함양(咸陽)의 방장산(方丈山=지리산(智異山)은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咸陽郡)에 소재하고 있는가? 진(秦)국의 수도 함양(咸陽)인가?  일본왕의 충견 이병도는 방장산(方丈山)을 다른 이름으로 지리산(智異山)이라 한다. 라고 주석(註釋)하므로서 중국의 방장산이 한반도 속의 지리산(방장산)으로 둔갑했던 것입니다. 이병도의 만행을 깨닫지 못한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예로부터 바다 건너 동쪽에 신선(神仙)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지리산과 금강산, 한라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여 중국의 방장산이 더욱더 한반도 속으로 굳어 졌던 것이다.

대가락국(가야)의 수로왕은 처음 중국 江蘇省(강소성) 淮陰縣(회음현) 龜州城(귀주성) 龜山(구산)에서 탄강(誕降)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국을 배신했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경남 김해시 서상동 龜旨峰(구지봉)으로 조작하고 중국 동남부 지역에서 건국되었던 6가야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었던 것이다. 중국은 강주(康州)를 강주(江州)로 고치었다. 그리고 강소성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에 7부처를 낳은 불모산(佛母山)이 있다. 

  [5]. 수로왕의 7왕자는 부처(佛)가 되었다 
 (1).『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
장유화상(長遊和尙) 보옥선인(寶玉仙人)은 여동생 허왕후와 함께 가야국에 왔는데, 본국에 돌아가지 않고, 부귀는 뜬구름과 같다며 7왕자를 데리고 방장산에 들어가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 수로왕의 왕후는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 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방장산에 들어가 3년간 불법을 수도하여 부처가 되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방장산(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을 찾아갔으나 여전히 장유화상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그 후 다시 지리산을 찾은 왕후를 장유화상은 반가이 맞으며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만나보라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께서,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 연못(影池)을 바라보니 황금빛 가사를 걸친 금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의  일곱 생불(生佛)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며 수행하던 곳에 칠불사(七佛寺)를 세웠다.

(2). 가락국기외(駕洛國記外)의 허황후 전설(許王后 傳說)
(1). 세종 6년(1424) 경상감사(慶尙監司) 하연(河演) 찬(撰)의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2)세종14년(1432)에 간행된 신찬지리지(新撰地理誌)에 이르기를 남천축국(南天竺國) 공주(公主)의 성(姓)은 허(許)씨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다. (3)예종 원년(1469)에 경상감사(慶尙監司) 김겸광찬(金謙光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와 (4)성종 17년(1486)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수로왕비(首露王妃)는 남천축국(南天竺國) 공주(公主)이며 허황옥(許黃玉)의 시호(諡號)가 보주태후(普州太后)라 했다.

(5)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김해군도호부허왕후능편(金海都護府許王后陵編)에 …수로왕능은 구지산(龜旨山) 동쪽이라 했다. (6) 가락국수로왕능비음기(駕洛國首露王陵碑陰記(1647年 許積撰)에는 수로왕은 10왕자를 두었는데 왕후(王后)의 말에 감응하여 왕후(王后)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은 자가 둘이며, 동국(東國:동천축국)의 허성(許姓)은 이에서 근원하였다.… 10인 중 3人은 허씨성(許氏姓)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7人은 불도에 정진하여 7선(七仙)이 되었다. 

 (3).장유화상(長遊和尙)과 7왕자기록(七王子紀錄)
(1)숙종32(1706) 승(僧) 징원(澄元) 찬(撰) 명월사사적비문(明月寺事蹟碑文)
명월사(明月寺)는 수로왕명에 의해서 창건되었는데 임진(1592)왜란 때 소실되어 萬曆 5년(1618)에 재건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숙종 32년(1706)에 다시 중수(重修)하면서 담장밑에 명문(銘文)이 있는 기와 한 장을 주었는데 그 기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建康元年甲申三月 長遊和尙 自西域 奉佛法而來 王之重道 崇佛亦可驗矣」

“建康元年(144) 3月에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서역(西域)에서 부처님을 신봉하고 올적에 불법(佛法)을 가지고와 수로왕은 불도를 중히 여겨 불법을 숭상하자 역시 영험하였다”

(2)순조 12년(1812)撰 「은하사취운루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
세상에 전해오는 가락국 왕비 허후는 천축국에서 올적에 장유화상(長遊和尙) 오라비도 따라왔다. 천축국(天竺國)은 본래 불교를 신앙하는 월씨국이다. 수로왕명에 의해 은하사(銀河寺) 및 명월사(明月寺)가 창건되었다.

(3)「駕洛三王事蹟考」正祖 辛亥 重刊本 …之上二十里許 有庵曰七佛…始駕洛國首露王 有子十人 一爲儲君 二人賜許氏 七人志絶塵寰徒寶玉仙人 自伽倻山 入雲上院 學道成仙…

(4). [가락국3왕사적고] 정조 신해(1851) 중간본에서...
쌍계사(雙溪寺)에서 위로 20리를 올라가면 암자가 하나 있는데 7불암이라 한다.… 가락국 수로왕은 10왕자를 두었는데 한분은 왕세자(王世子)가 되고 두 분은 허(許)씨 성(姓)을 하사받고 나머지 7왕자는 속세를 떠나 보옥선인(寶玉仙人)을 따라 가야산(伽倻山) 운상원(雲上院)으로 들어가 불도를 닦아 신선(神仙)이 되었다. 

 (5). 인조 10년(1632)刊 「진양지晉陽誌」7불암(七佛庵)편
…古稱 雲上院 昔有 玉浮仙人 隱于 此吹玉笛 得聞於 新羅王耳 王尋其聲乃率其七子 與仙人同遊 七子卽成佛 七佛王之子也 故改雲上院以爲 七佛庵…

칠불암은 옛날에 운상원이라 칭하였다. 옛적 보옥선인(寶玉仙人)이 은거하면서 玉笛(옥피리)을 불렀는데 신라 임금의 귀에까지 들려 임금은 7왕자를 거느리고 와서 仙人과 같이 놀면서 7왕자는 즉시 성불(成佛)하였다. 그런 연고로 운상원을 7불암(七佛庵)이라 하였다. 

 [6]. 장유화상비는 1915년 일제식민지 때 세웠다.
(1)長遊寺의 長遊和尙紀跡碑 (駕洛紀元1874年(1915)立)

和尙姓許氏 名寶玉 阿隃陀國君之子也 普州太后弟也… 和尙富貴如浮雲 遂超塵相入佛母山 長遊不返 世稱長遊和尙…晩年駕洛王子七人 方丈山中 化爲佛 今河東郡 七佛庵其址也.…銍知王創長遊庵 藏和尙眞影于七星閣 

 ♦ 장유사(長遊寺)의 장유화상비(長遊和尙紀跡碑)는 1915년에 세웠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의 성(姓)은 허씨(許氏)이며, 이름은 보옥(寶玉)이며, 아유타국(阿隃陀國) 임금의 아들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는 여동생이다. 장유화상은 부귀(富貴)는 뜬 구름과 같다며, 드디어 불모산(佛母山)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장유화상이라 불렀다. 만년(晩年)에 가락국의 7왕자와 같이 방장산(方丈山)에 들어가 부처가 되었다. 지금 하동군(河東郡)의 7불암(七佛庵)이 그 유지다. 질지왕(銍知王)에 이르러 장유암(長遊庵)을 창건하고 장유화상의 진영(眞影)을 7성각(七星閣)에 간수하였다.

(2) 7불암 현판기(七佛庵 懸板記)는 1910년에 세웠다.
…서역(西域) 월씨국(月氏國)의 보옥선사(寶玉禪師)는 여동생 허황후(許王后)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보옥선사는 7왕자를 데리고 방장산(方丈山)에 들어가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좌선성도(坐禪成道)하였다. 가락기원(駕洛紀元62年 癸卯(103년)에 7불암(七佛庵)을 창건(創建)하다. (註) 현판기(懸板紀) 말미(末尾)에 庚戌(1910)년에 쌍계사에서 제의(齋議)하여 선회(禪會)를 열었다.」라는 글이 있으므로 1910년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김해의 장유사(長遊寺)와 은하사(銀河寺)란 두 절이 있다. 은하사(銀河寺) 취운루(翠雲樓) 중수기(重修記)는 서기 1812년에 세웠고, 7불암 현판기(七佛庵 懸板記)는 1910년에 세웠고, 장유사(長遊寺) 기적비(記蹟碑)는 서기1915년에 세워졌다.

(3). 삼국사기 및 고려사의 산양(山陽)의 유래(由來)
산양(山陽)은 본래 신라의 근품현(近品縣:近縣), 또는 지품천현(知品川縣)인데, 757년(경덕왕 16)에 궐성군(闕城郡)에 예속시켰다 가유현(嘉猷縣)으로 고쳐 예천군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태조 23(940년)에 산양현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합주(陜州)에 이속시켰으며 상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후에 감무를 설치하기도 했으나, 1180년(명종 10)에 다시 합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상주의 산양·산남·산북·산동성·산서성 등 5개면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문경군으로 이관되었다. 라고 변조 조작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강주(康州)를 강주(江州)로 지명을 바꾸고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을 산양(山陽)으로 고치고, 일제와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중국의 방장산을 한반도 속의 지리산으로 변조하고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왕산이 있다. 라고 변조, 조작했던 것입니다. 

[환단고기 고구려편] 중국 동평군 수장현(東平郡壽張縣)에 치우천자능이 있고, 산양군거야현(山陽郡鉅野縣 蚩尤肩)에 치우 천자의 부인 견비능(蚩尤肩)은 산동성에 있으며 거리는 약 80Km이내에 있다. 중국 강남(江南)에 월주(越州)가 있었다. 월주에 산음(山陰), 산월 좌월의 속현이 있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을 천주라 했다 12년(503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었다. 한때 고구려 영토이었다. 연개소문의 묘는 운산 구봉산에 있다. 끝.


다음은 [제14편 석가세존은 가야국에서 설법하셨다]가 연재됩니다. 


 박 병 역  위원 프로필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선양회 대표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세계적 대국 고조선
3.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4.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5. 인류의 기원역사
6. 1만년 한국사 절요(切要)
7. 격암유록의 해설
부산일보 07/06/29 [15:54] 수정 삭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가락국 마지막, 구형왕능 실체가 밝혀질까.'

가락국 마지막 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구형왕릉(경남 산청군 금서면 왕산 소재)의 실체를 밝힐 왕산사 옛터(경남도기념물 제164호)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돼 사학계와 지역민,문중 등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경남 산청군은 가락국 마지막 왕 전설에다 구형왕릉으로 추정되는 국내 유일의 돌무덤 능이 실존하는 금서면 화계리 왕산 일대 가락국 관련 역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사업비 2억원을 들여 경남문화재연구원에 왕산사지(址) 2만여㎡에 대한 발굴조사 용역을 의뢰,지난 9일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오는 6월까지 왕산사지의 존재연대와 사역규모,창건 당시의 가람배치 등을 밝히고 특히 산아래 지점에 있는 국내 유일의 대규모 돌무덤형태 능인 구형왕릉과의 관련성 등도 파악해 나갈 계획이다.

왕산사(왕산사지)는 200여년 전 법당 들보 위 나무궤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활,칼 등 가락국 관련 유물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또 명승 탄영의 왕산사기 등 문헌을 토대로 이후 이를 고증,현재 왕산 초입 부근에 있는 돌무덤 능인 구형왕릉을 찾는 계기가 됐다.

이와 함께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왕대암으로 전하고,175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왕대암이 폐사돼 왕산사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왕산사는 문헌상으로도 1500년대 이전부터 실존했던 고 사찰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 산청군은 지난 2004년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에 왕산사 옛터에 대한 지표조사를 용역 의뢰한 결과,관련문헌 기록은 물론 일대 6개소에서 건물지,추정 문지,추정 계단시설,비좌,부도 등을 확인해 경남도기념물 제164호 명칭을 '전(傳) 왕산사지'에서 '왕산사지'로 개칭했다.

산청군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앞으로 왕산사지와 전 구형왕릉,덕양전 등 왕산 일대 가락국 관련 역사문화 정비 방안과 종합계획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부산일보]이선규기자
sunq17@busanilbo.com [2/12] 2007-02-12 19:19:50
국제신문 07/06/29 [16:00] 수정 삭제  
  미스테리 못 푼 왕산사지 발굴가야 '구형왕릉' 입증할 유물 출토 안돼
[왕산사지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기와류.]


경남 산청읍에서 서북쪽으로 40여리 떨어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이곳 왕산(王山·923m) 자락에 '전(傳)구형왕릉'이 있다. 일명 양왕릉(讓王陵). 가락국 마지막 임금의 능이라고 하나 실체가 분명하지 않아 '전(傳)'자가 붙었다. 사적 제214호다.

능이 있는 왕산에 '왕산사지'(경남 기념물 제164호)가 있는데, 가락국 멸망 시기의 전설이 수두룩하다. '대동지지' 등 조선 후기 기록에는 '왕산사는 가야 구형왕의 수정궁터'라고 돼 있어, 구형왕릉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미스터리를 품어온 왕산사지의 '뚜껑'이 열렸으나 결과는 신통한 게 없었다.

(재)경남문화재연구원은 최근 왕산사지 복원, 정비에 앞서 산청군 의뢰로 왕산사지 발굴을 벌여 지난 25일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조사 결과, 왕산사가 구형왕릉의 원찰 기능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초창(初創) 시기는 15세기께로, 주된 활동 시기는 18세기께로 추정됐다.

기대했던 가락국 말기의 유적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7동의 건물지와 주변 담장지, 기단석렬, 우물, 축대 등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15~16세기 이후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제의용 또는 생활용기로 사용되었을 분청사기 백자 옹기 기와류도 다수 나왔다.

왕산사는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왕대암으로, 175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왕산사로 소개되고 있어 발굴조사 결과와 문헌기록이 어느 정도 부합한다. 따라서 구형왕릉과의 연관성 부분은 '전승(傳承)'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는 것

.경남문화재연구원 정의도 학예연구실장은 "신비감을 감춘 유적이라 기대를 갖고 조사했으나 6~7세기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기록에 나타나 있는 구형왕릉과의 관련성은 향후 보완조사를 통해 밝혀야할 과제"라고 말했다.

국제신문 박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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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역 07/06/30 [13:23] 수정 삭제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죽을 때까지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충견(忠犬똥개)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삼국사기를 증서로 삼아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결과 북한지역에서 유물이 발굴되면 고구려 유적이 되고, 경북 경주부근에서 발굴되면 신라의 유물이고, 경남과 고령지방은 가야의 유물이고, 경기, 전라도 지방은 백제의 유물이 된다.

고조선 삼한은 세계적 대국이며,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 또한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아세아적 대국으로 밝혀졌다면 한반도 속의 유적 물은 모두 다 가짜 유물이며, 전국의 각 불교 사찰 또한 가짜 사찰(절)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반도 속은 온통 여기도 짜가 ~
저기도 짜가 ~ 짜가가 판친다...♪~~


세계의 문화유적은 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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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세계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 천년의 왕도(王都) 경주와 가야의 400년 도읍지이었던 김해, 백제의 700년 도읍지이었던 경도(京都) 서울에는 반드시 왕궁(王宮)이 있어야 함에도 3국의 왕궁터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본래 없었던 유적 물도 현대 신 기술로 아주 오래된 유적 물인 것처럼 가식(假飾)하여 잘 꾸며 놓으면 우리 역사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세계문화재위원들이 찾아와 눈으로 구경하고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허허 참


민족반역자 이병도는 선각자(先覺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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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고조선 삼한과 신라, 백제, 가야국의 3국을 마치 한반도 속에서 건국 된 것처럼 축소, 왜곡, 변조하여 편찬된 국사를 영원히 은폐(隱蔽)하기 위해 한반도 속의 각 지명을 한자(漢字)로 바꾼 결과 조선 8도에 향교(鄕校)가 세워지고, 전국 각처에 새로운 불교 사찰 건립, 문화재위원회 등이 창설되어 오히려 전 국토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국을 배신한 이병도는 오히려 조국의 장래를 예견한 선각자가 아니겠는가?


7천만 한국인이여..!
=> 진짜와 가짜의 판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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