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4)

항일무장투쟁의 방향을 설정한 명월구회의

이용섭 역사연구가 | 기사입력 2015/11/18 [08:16]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4)

항일무장투쟁의 방향을 설정한 명월구회의

이용섭 역사연구가 | 입력 : 2015/11/18 [08:16]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4)

 

항일무장투쟁의 방향을 설정한 명월구회의

 

우리가 탄 시외버스는 안도현 소재지인 명월구(明月區)를 향해 달린다. 10월 중순임에도 연변의 계절은 이미 늦가을의 풍경을 보여준다. 나뭇잎은 이미 거의 다 떨어져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어 쓸쓸함을 더해준다. 또 길가에 무성한 풀들 역시 모두 한 여름 내내 가졌던 푸르름을 잃어버리고 생기 없는 연갈색의 잎새들만 보인다. 길 양 옆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강냉이 밭이 보인다. 아직은 강냉이 추수를 하지 않아 누런 강냉이 대가 무성한 숲을 이룬다. 강냉이는 설사 가을에 추수를 하지 않아도 겨울이 지나고 다음 해 봄이 와서 가을(수확)을 해도 강냉이 알곡생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농가들에서는 일손이 딸리거나 강냉이 가을을 하는 농기계를 얻지 못하면 해를 넘겨 다음 해 봄에 거두어들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연변지방에서 보았던 강냉이의 특징은 강냉이 대 하나에 강냉이 딱 한 개씩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강냉이는 강냉이 대 하나에 여러 개의 강냉이가 달려있는데 연변지방에서 보았던 것들은 딱 하나씩만 달려있다. 이송덕 선생은 그래야 강냉이가 커짐으로 강냉이 알곡 수확이 늘어나기에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강냉이의 크기를 보면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이 땅에서 기르는 강냉이의 크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연길시에서 안도현행 버스를 타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동안 이창기 기자가 강냉이를 몇 개 사가지고 와서 이송덕 선생과 나에게 하나씩 먹어보라고 주었다. 솔직히 필자는 입맛이 매우 까다로운 편이다. 비록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를 두고 조선반도와 접해 있지만 내가 평생 먹고 살아왔던 이 땅에서 거두어들인 알곡이나 남새(채소) 그리고 과일 만큼 맛이 없다. 강냉이 역시 내 입맛에는 별로 맛이 없다. 또 다시 내가 태어나 태를 묻은 이 땅이 신성하고 귀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조선반도(朝鮮半島=아사달)를 우리 조상들이 왜 아사달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이 땅을 하늘=한울이라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내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그래도 강냉이 알곡을 생산하기 위해 우리가 답사 여행을 가는 길 양 옆의 거의 모든 농지는 강냉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지의 약 80% 정도는 강냉이 농사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짓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이는 자신들이 식량으로 이용하기 위해 벼농사를 짓는 것이지 수매를 한다거나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벼농사를 짓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벼농사를 그만큼 짓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한 1018일은 햇빛이 밝게 내리비치는 화창한 날씨이다. 아직까지 버스창가에 보이는 풍경들은 그리 수려하다거나 산천경계가 그리 뛰어나지 않다.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은 어딜 가나 수려한 풍치를 자랑한다. 필자가 세계 많은 나라들을 다녀왔지만 이 땅에서 펼쳐지는 앙증맞을 정도로 아름답고 수려한 풍경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역시 조선반도와 접해있지만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조선반도에서 펼쳐지는 풍경보다는 훨씬 못하다.

 

안도로 가는 중간 중간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이송덕 선생께서 항일유적지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주신다. 필자와 이창기 기자가 달리는 버스안에서 차창밖으로 보이는 유적지들을 자료로 남기기 위해 연신 사진을 찍었다. 혹시라도 답사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유적지들에 대한 설명을 약식으로라도 모두 기록을 하리라고 귀국을 한 후에야 다짐을 하였다.

 

1) 명월구(옹성라자)

 

사진.1,2 안도현 명월구 옹성라자(항아리형 바위)

▲ 1932년 12월 15일 항일무자투쟁을 토의 결정을 했던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명월구(옹성라자)"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커다란 바위절벽이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명월구 시내 한 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옹성바위"이다. 확대를 해서 보니 영락없이 항아리의 형태를 띄고 있다.현재 도시의 지명은 "안도현(명월구)"라고 안도현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1931년 9,18사변 후 만주를 강탈한 일제가 명월구라고 지명을 바꾸기 전까지 바람이 불면 바위가 항아리에서 나는 소리를 낸다 하여 그 지역 이름을 "옹성라자"라고 지어 불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우리가 탄 안도행 시외버스는 약 두 시간 정도 달린 후 오후 1시 경에 안도현 소재지인 명월(옹성라자에 도착을 하였다. 명월구에는 도시 한 가운데에 항아리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절벽이 우뚝 솟아 있다.명월구의 옛 이름은 옹성라자이다. 바람이 불면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항아리처럼 생긴 바위에서 항아리에서 나는 소리가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가 19319·18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침략한 후에 옹성라자라는 지역 이름을 명월구(明月區)로 바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연변조선족자치주지도를 보면 안도현(安圖顯)으로 표기를 하고 괄호안에 명월구(明月區)라고 표기를 하였다. 결국 같은 땅의 이름이 겨우 80여년 만에 두 번이나 변한 것이다. 옹성라자》 → 《명월구(明月區)》 → 안도현(安圖顯)으로 변한 것이다. 이송덕 선생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땅 이름이 자꾸 변하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항일유적지들에 대한 고증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라고 걱정을 하였다.

 

명월구지역에는 량병태(대서), 포대산, 옹성라자, 신선동, 도목구·이청배(장흥), 차조구중평의 항일유격전적지가 있다. 먼저 량병태(대서)에서는 1935819조선의 독립은 이전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왔던 반일·항일투쟁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조선의 젊은 반일· 항일유격대가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화물자동차를 습격하여 수많은 천과 식량을 노획하였다. 이때 노획한 천과 식량 등은 지원을 해줄 나라도 후방물자를 원호해줄 든든한 백성들도 미약했던 항일유격대들에게는 천금 같은 물자가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항일유격대는 량병태에서 기차를 호송하던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린 항일유적지이다. 이 때 이루어진 기차습격전투는 1935년도 장도산에서 있었던 3차례의 기차 습격전투 가운데 하나이다.

 

포대산 항일전적지에서는 193112월 중국동북항일연군소속의 왕덕림의 병사 3명이 19319·18사변 후 만주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주마저 자신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이 지역을 측량하기 위해 포대산으로 올라오던 일본만철회사 소속 측량기사들과 일행을 모두 격멸하였다. 왕덕림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일·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가열 찬 항일투쟁에 나섰다.

 

옹성라자는 19311215일과 19325월 중순 두 차례에 걸쳐 명월구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1931년 옹성라자에서는 중공동만당적극분자회의가 열렸으며, 본 회의에서는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건설하여 당의 농민운동에 대한 영도를 강화하는 문제들을 토의하였다. 회의에는 40여명의 대표가 참석을 하였다. 본 문제는 중요하기에 아래에서 자세히 논할 것이다.

 

1933년 연길현 항일유격대는 신선동에 밀영을 세우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연길현 도목구 일대에서 항일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19352월 일본군과 만주괴뢰군 그리고 조선인들로 구성된 간도특설대 등의 토벌에 더 이상 신선동 근거지를 사수할 수 없기에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살아가던 일반인들과 유격대 모두 처창즈근거지로 이전을 하였다. 1935년 봄 혁명군들은 신선동으로 돌아와 일본군 주둔지를 습격하여 10여명의 일본군 병사들을 섬멸하였다. 신선동은 30년대 중반기 연길현 항일유격근거지가 이전하던 시기에 임시로 사용하던 항일유격근거지이다.

 

도목구·이청배(장흥) 전적지는 민족주의독립운동가인 홍범도장군이 활동을 하던 거점이다.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 이청배사관학교를 건립하고 항일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낼 의지를 가졌던 곳이다. 차조구 중평유적지는 1942년 김명주 등이 친인척의 연관 고리를 이용하여 소부대활동을 벌이던 거점이다.

 

위에서 간략히 본 바와 같이 명월구(옹성라자)지역에는 초기 조선의 젊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반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전 민족주의독립운동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투쟁방법을 도입하여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가열 차게 투쟁을 벌이던 중요한 거점 중에 하나이다.

 

 

2) 명월구회의

 

사진.3,4,5 명월구회의를 가졌던 장소에 세워진 기념비석

▲ 1931년 12월 15일 "경울명월구회의"와 1932년 5월 중순 "봄명월구회의"가 열렸던 자리에 세워져 있는 "명월구(옹성라자)회의 기념비"이다. 비석은 본래의 자리가 아닌 근처로 이동을 하여 세워져 있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비석에는 "1931년 12월 15일 중공동만특별위원회 서기 동장영은 명월구(옹성라자)에서 중공동만특별위원회당면열성자회의를 소집하였다"고 새겨져 있다.연변조선족자치주가 중국영내에 있기에  명월구회의를 중공동만특위에서 소집하여 열린 것으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명월구(옹성라자)회의"가 열렸던 건물이 있던 본래의 자리는 비석이 서 있는 곳에서 약 20여 미터 떨어진 도로 한 가운데 있었다고 한다. 몇 년전에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도로를 내었기 때문에 건물터가 도로에 묻히고 말았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명월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항일유격대의 투쟁근거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더해 명월구는 19311215일에 있었던 겨울명월구회의19325월 중순에 가졌던 봄명월구회의를 개최했던 곳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명월구회의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학자들이 규정하는 것과 북의 자료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본 명월구회의는 조선의 젊은 반일·항일독립운동가들이나 중국의 동북항일운동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이다. 따라서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정리한 자료와 북에서 규정한 자료를 비교분석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① 《유격대, 빨찌산, 게릴라그리고 빨갱이의 유래

 

먼저 본격적으로 명월구회의를 다루기 전에 유격대, 빨찌산, 게릴라그리고 빨갱이는 과연 무얼 말 하는 것인가. 이 언어의 탄생과 유래는 무엇인가. 또한 위에서 언급한 말들은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보도록 하자. 어차피 겨울명월구회의에서 향후 항일투쟁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적용될 투쟁의 방향으로 토의가 된 내용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유격전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유격대, 빨찌산원본 기사 보기:자주시보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완도 약산 해안 치유의 숲, 지난해 대비 방문객 3배 늘어
1/23
연재
광고